〈 27화 〉027 아카데미
"뉴비 중에 꽤 큰 거물이 있나 본데?“
한 남자는 헤븐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부둣가에 서서는 이곳으로 다가오는 호화스러운 거대한 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배에는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뭣도 모른 채로 비쓰온 게임에 참가해 운이 좋았거나 실력으로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은 한국인 30명이 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저 배가 예상보다 빨리 온다는 것.
평균적으로 튜토리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짧으면 1주일에서 2주, 길면 3주나 걸리게 된다. 그야 그럴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배틀 로얄에 일반인들을 마구 집어넣었기 때문이니, 평범하게 살아오던 그들로서는 제대로 된 게임을 치를 수나 있을까. 절대 불가능했다. 그로 인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참가자들을 차례차례 죽여나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이번 배는 튜토리얼이 시작하고 고작 1주일도 되지 않은 지금, 헤븐의 바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제발 정상적인 새끼들이길.“
이런 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과거에도 1주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튜토리얼을 끝내고 헤븐으로 향한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 배에는 엄청난 거물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벌써 3년.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인데. 참가자 중에서 3년이면 꽤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면 뭐가 어쩌나. 빚을 갚기도 힘든 현실이 눈 앞을 가리고 있으니.
이렇다 할 능력도 없어 등급도 하찮을 뿐이고, 아무리 게임에 참가하여 운 좋게 살아남아 상금을 타 본다고 한들 이자를 갚느라 그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이자가 불어 빚은 점점 더 늘어가기 시작하고.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어느새 더 커진 모습을 한 배를 보았다.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있으려나?“
모든 걸 포기하고 죽는 게 두려워 결국 게임에 참가하지 않게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갔다. 이처럼 빚을 갚기보단 목숨이 아까워 헤븐 안에서 어떠한 일이든 도맡아 하며 꾸역꾸역 생활하는 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남자들은 죽을 것처럼 힘든 막노동에서 여자들은 몸을 팔아서.
"여어~ 아직도 살아 있었냐?“
"......"
그를 향해 다가오며 한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이 대충 짐작이 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무시하기냐?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목소리의 주인은 강제로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아 몸을 돌리게 만들자 그제야 그의 눈에 남자의 얼굴을 보여왔다.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냐? 기분 더럽게?“
그가 무척이나 걸리적거리며 불쾌한 존재인지 괜히 시비를 걸다 못해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린 김태호는 언제 주먹을 들고 때려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었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얼굴의 주인인 그는 잘 알지 못하였지만 아마도 무표정이 아닐까 싶었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감정에 따라 표정이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의 속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김태호가 누군가. 미친놈, 정신 나간 돌아이 등등 부정적인 별칭들이 따라붙는 그이기에 지금 공포가 전신을 사로잡고 있어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다. 때리려나? 정말 때리려나. 저 주먹에 맞으면 엄청 아프겠지. 아니, 성인인 자신이 여기서 맞고 질질 짤 수도 있었다.
그렇다.
그는 겉으로만 보면 태연한 모습을 가진 겁 없는 당당한 사내였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도 겁이 많은데 그걸 표출하지 못하는 찌질한 새끼였다.
"시발... 나중에 보자. 인성아. 게임 안에서 말이야."
김태호는 장인성에게 나중에 게임 안에서 보자고 말하며 떠나갔다. 정말 다행히 아닐 수가 없었다. 게임 측에서 폭행이라는 사건으로 김태호를 입건하게 되면 곤란한 건 김태호일 테니까. 그래서 그 사실을 아는 그는 차마 여기서 때리지는 못하고 나중에 게임 안에서 보자는 말을 남긴 게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더 다행히였다.
"하아... 참가자 신분 버리고 섭외 팀으로 들어가길 잘했네."
김태호의 말처럼 게임 안에서 만날지는 못할 것이다. 그야 이미 한 달 전에 참가자의 신분을 개나 줘버리고 섭외 팀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으니까. 물론 급여는 참가자의 신분이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적지만 그 대신 안전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충분한 돈이 나왔다. 그래서 지금은 아닐지라도 이자가 한계까지 쌓이면 그때 곤란하겠지만. 아무튼, 장인성은 멀어져가는 김태호의 모습에 안도하며 옷새무새를 정돈하곤 정착 장에 정착한 배를 향해 걸어갔다.
"각 길드의 섭외팀들은 다 모이신 건가요?"
배와 다리가 연결되고, 배에서 걸어 나온 게임 주최 측 간부, 강 팀장은 해맑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 혹시 안 오신 분들이 있으면 기다릴까요?“
"아닙니다. 강 팀장님. 올 사람은 다 왔습니다.“
"음... 그러면 문제가 없겠네요!“
현 헤븐에서 나온 섭외 팀들 사이에서 게임 속에서나 볼법한 디자인의 옷을,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지존 길드에 속한 한 남자가 강 팀장에게 말했다.
"뭐,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새로 오신 분들에 대해선 전 일절 말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건, 여러분이 하실 일이니까요.“
싱긋. 웃으며 옆으로 나온 강 팀장은 고개를 들어 배에 연결된 다리 끝에 시선을 가져갔다.
"......“
"......“
"어, 어라...? 제가 분명 이쯤에서 나오시라 말씀드렸는데. 왜 안 나오시는 걸까요?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강 팀장은 다급히 손을 귀에 가져갔다.
"왜 안 나와? 뭐? 무슨 소리를. 그냥 내보내. 다 기다리고 있다고.....!“
그리곤 아무 일도 없던 것마냥 손을 내려, 해맑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 이제 나오시네요!“
아무리 뉴비들이 갑이라곤 하는데 강 팀장의 말을 무시하면서까지 섭외 팀들을 기다리게 한 죄는 웃어넘길 수준이 아니었다. 굳이 길드들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단순히 길드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얻으려는 속셈도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뉴비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 길드에 속한 섭외 팀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게 하다니.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참... 나를 기다리게 하네? 뉴비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김태호는 자신 같은 인물이 뉴비들을 섭외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런 뉴비들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이니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잠시 뒤. 이제야 뉴비들이 하나하나씩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눈 안 깔어? 씨발 놈아?“
"하...? 오자마자 시비를 거는 개새끼가 있네?“
"뭐? 개새끼? 눈에 보이는 게 없지?“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몸매는 정말 좋은데 면상은 360도로 들끓는 아스팔트에 막 갈아엎은 얼굴을 가진 여자를 옆에 낀 근육질의 한 남자가 김태호를 쳐다보며 배에서 내리자 김태호는 곧장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하고 눈을 깔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김태호가 누군지 모르는 뉴비는 욕을 입에 담았고.
"씨발... 나중에 게임에서 보자.“
"뭘 나중에 봐. 지금 여기서 대화하면 될 텐데.“
"......“
뉴비는 뉴비인지. 안 그래도 바로 옆에 강 팀장이 자리 잡고 서 있는데 뉴비는 지금 당장 싸우자는 듯이 말하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여자를 옆으로 치웠다. 그 때문에 결국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르자 김태호는 말을 잃어버렸다. 속으로는 이미 저 뉴비를 패 죽였을 텐데. 이곳은 게임 안이 아니라 헤븐의 안이기에 차마 주먹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왜? 쫄았냐?“
"......“
전혀. 그럴 리가. 단지 헤븐 안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건데. 그 사실을 모르는 뉴비는 자신의 패기에 쫄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만하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배에서 내리기 전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헤븐에서는 죄가 될 만한 행동을 해선 큰 벌이 따른다고요.“
"하. 설마 이 병신은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야? 한심하네. 그까짓 벌이 뭐라고.“
"여기 처음 오신 거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하죠. 그건 차차 알아가시고요. 나머지 분들이 마저 내리게 앞을 막지 말아주시겠어요?“
"뭐, 그러지.“
뉴비는 다시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다른 뉴비들이 배에서 내렸고, 총 26명이 내렸을 때, 그 후로 내리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음...? 윤재희 씨는 왜 안 내리죠?“
의문을 품은 강 팀장은 다시 귓가에 손을 가져가고."
아...! 이민정 씨가 갑자기 덮쳤다고? 으음... 그 분은 보기보다 적극적이네요. 아무튼, 빨리 내보내.“
윤재희? 이민정? 이름만 들어서는 여자 이름 같은데. 그나저나 이민정이 덮쳤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장인성은 알 수 없는 강 팀장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오시네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든 강 팀장의 말에 섭외 팀들의 시선이 다리 끝으로 향했다. 그리곤 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벙찌게 되었다.
"미, 미친... 사쿠라님보다도 예쁜 여자라니.“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이 여자야말로 피를 부르는 사나이의 아내가 될 분이다.“
은색을 띠는 머리카락을 허리 부근까지 길게 늘어뜨린 것도 모자라 적색의 눈, 작은 얼굴과 그 안에 어찌 눈, 코, 입이 다 들어가 있는지 의심이 들어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에 따른 비율과 위치는 여신이라 칭해지던 헤븐의 절세미녀 사쿠라 길드의 길드장, 사쿠라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여자는 또 어떤가. 단발머리가 인상적이고, 몸매 또한 엄청난 미인에, 교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되지 않게 어린 티가 팍팍 나는 귀여운 인상의 미녀는 모두가 넋을 놓고 바라봐도 전혀 이상할 게 아니었다.
"처음 뵙겠나이다. 본인은 지존 길드의 철혈의 이단죄라 하오.“
"뭐...? 이단죄? 철혈의?“
"그렇소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뭔 시꺼멓게 다가와서는 자신을 철혈의 이단죄라 자칭하자 재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이름이야?“
"하하. 철혈은 별칭이고, 이름은 개명한 것이오.“
"것이오... 참 특이한 말투네.“
"감사하오. 그쪽 이름을 들을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여쭤보겠소.“
조심스러울 것까지야. 되도록 조심스럽다고 말하기 전에 창피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재희는 힐끔, 강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강 팀장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속 웃고만 있으니 이 자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신경 써야 할 인물인지, 무시해도 되는 인물인지.
"이야~ 이거 대박인데?"
재희가 이름을 밝히려던 그때, 김태호는 겁도 없이 이단죄를 무시하고 재희에게 다가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건지, 여쭈겠소. 김태호.“
"여쭈겠소... 허미. 지랄 염병은, 오글거려서 귀를 닫고 다녀야겠는데 꼭 그딴 병신 같은 말투는 계속해야겠냐?“
"벼, 병신.....?“
"그래. 병신아.“
"......“
팩트를 정통으로 때려버리는 김태호의 말, 하지만 지존 길드가 무엇인가. 헤븐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건 물론이고, 가장 강한 존재인 피를 부르는 사나이가 길드장으로 있는 그 무시무시한 길드가 아닌가. 그 때문에 지존 길드를 아는 이곳 사람들은 김태호의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지랄은. 어이. 이름은?“
이단죄를 무시하곤 은근슬쩍 재희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김태호가 물었다. 그런 김태호를 눈앞에 두고는 재희의 눈은 강 팀장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이런.' 하고 소리 없이 말한 강 팀장은 한숨을 픽 내쉬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이 자, 김태호라는 남자는 재희가 신경 써야 하는 존재가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김태호 씨, 그 손 놓는 게 어떠십니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장인성은 용기를 내어 김태호에게 말하자, 그 말을 들은 김태호는 누구 한 명을 죽여도 이상할 게 없는 눈을 돌렸다.
"뭐? 씨발아? 뭐라고 했냐. 다시 한번 말해봐.“
"그 손을 놓는 게 어떤가 물었습니다.“
"하... 씨발. 별것도 아닌 새끼가.“
무섭다. 미치도록 무서워, 다리에 힘을 주지 않는 순간 곧바로 주저앉을 정도로 무서웠지만 장인성은 버텼다. 대체 왜일까.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 가만히 있었다면 중간을 갈 텐데 말이다.
"이곳에 처음 오신 분들 게 뭐하는 짓입니까?“
"내가 뭐. 뭔 짓을 했다고 지랄이냐?“
"그야......“
"하... 씨. 왜 발정 난 짐승들은 언니를 못 잡아먹어서 안 달이야?“
이유를 설명하려던 찰나에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지자 장인성은 어, 하고 말을 내뱉으며 김태호를 향하던 눈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잔뜩 일그러진 귀여운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교복을 입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뭐...? 씨발?“
김태호는 그 말에 제대로 빡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