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024 튜토리얼
정장을 입은 남자의 뒤를 따르던 그녀들의 눈에 TV에서나 볼법한 작업복을 입은 무리가 지나쳐 간다. 작업복의 등에 '시체 처리반'이란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아서는 방금까지 그녀들이 있었던 곳의 시체들을 처리하러 가는 것처럼 보이자 이 남자의 말대로 정말로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셋은 해변에 정박해 있던 호화스러운 배에 올라탔으며, 그 뒤로도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은 26명 또한 배에 올라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양 각색이었다. 익숙할 정도로 자주 보았던 근육질 남자부터, 그의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몸매만 좋지, 화장을 전혀 하지 못해 얼굴이 개박살이 나 있는 여자와 아무 말도 없이 차인원의 무리에서 도망쳤던 소년을 포함한 사람들까지.
"으으......“
적색의 눈이 소년 자신에게 닿은 걸 알아차리자마자 힐끔힐끔 미안한 표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던 소년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끙끙 앓는 듯한 신음성을 흘려보냈다. 별 감정은 없었다. 평범하고 어린 애가 그 상황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신기할 따름이니. 그래서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도 저렇게 죄책감에 쌓여있는 소년은 그리 좋게만 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괜찮다고,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방해만 되었을 터이고, 애초에 그들을 상대로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정도로 자신이 강하다는 것도 미리 말하지 않은 사람은 재희였고, 눈에 띄게 큰 피해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가지 마요......“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민정이가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고개를 젓자 하는 수 없이 살짝 공중에 떴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곤 민정이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내려놓았다.
'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다 먹었어야 했는데.‘
민정이의 다리는 뼈가 앙상하게 남아 있을 뿐이라 머리에 살짝 아픔이 찾아오자 굳이 뒷일을 걱정해 그 많던 식량을 조금씩 아껴먹은 것이 뒤늦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게임이 끝날 줄 알았다면 그냥 대책 없이 막 먹었어야 했는데. 재희는 부드럽지만 살은커녕 가죽밖에 남지 않은 민정이의 다리를 안쓰럽게 쓰다듬었다.
"우으... 재희야. 여기서 할거에요? 조금 그렇지만 재희가 원한다면 전 좋아요.“
뭔가 착각을 했는지, 몸을 옅게 떨면서 얼굴을 붉히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성욕이 미친 듯이 피어오른다고 할지라도 이 배에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긴장을 완전히 풀고 민정이의 몸을 덮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슨 헛소리냐고 말을 하려던 찰나. 이미 손은 민정이의 붉어진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으응... 알았어요.“
어떻게든 충동적인 욕망을 참으며 말하자 민정이는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언니들... 이곳에 오기 전에도 아는 사이였어요?“
"음...?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 그냥 여기서 만났어. 이제 이틀 됐으려나?“
"이틀이요? 근데 대체 뭘 했길래 이틀 만에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예요?“
"그러게......“
고작 이틀. 굵직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민정이가 재희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사건은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있어도 인질에서 구해준 것과같이 사소한 것뿐이라 같은 여자인 자신에게 그런 이유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남자와 달리 여자는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사랑에 빠지려나?
"아...! 그것보다.“
재희는 기울였던 몸을 바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이 커다란 홀에서 유일한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정장을 입은 남자들에게 다가가서는.
"혹시. 화장실이 있나요?“
"화, 화장실이요?“
"네.“
"밖에 있는데... 지금 참가자분께서 사용해도 되는지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화장실을 찾는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나 여자의 이해 못 할 행동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바뀌었길래 그러는 것인지. 정말 궁금해 미칠 노릇이었다.
"급해? 급하면 내가 친히 받아먹어 줄 수 있는데. 어때?“
총 29명의 생존자. 재희와 일행을 제외하면 26명. 그리고 그중에 몸매만 좋지, 얼굴은 박살이 난 여자를 끼고 있던 한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두고 재희에게 다가오며 황당한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튜토리얼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정상적이지 못한 사고를 가지고선 이런 미친 소리를 해대는지 이해할 수 없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는 재희였다.
"미친 거 아니야. 너의 몸에서 나온 거라면 다 받아 먹어줄 수 있을 텐데? 작은 거던, 큰 거든.“
"......“
보아서는 게임 관계자로 보이지 않는 단순히 운 좋게 살아남은 참가자일 뿐인데. 애는 또 뭘까. 화장실에 가도 되는지 알아봐 주겠다던 정장을 입은 남자도 미친놈을 보듯 그를 보고 있었다.
"재희야! 뭐에요! 이 남자는!“
뭔가가 갑자기 떠오른 듯. 발 빠르게 움직이던 재희가 정장을 입은 남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방금까지 여자를 끼고 있던 남자가 음흉한 표정으로 재희에게 다가가는 모습에 민정이는 황급히 도도도 달려와서는 재희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고선 적대적인 시선으로 실실 웃고 있는 남자를 째려보았다.
"일행이야? 애도 엄청 예쁘네. 역시 끼리끼리 노는 것 같네.“
낄낄거리며 손을 뻗자 그 손을 민정이는 툭 쳐버린다.
"손 대지마. 더러우니까.“
"음...? 더럽다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그럼 손을 깨끗이 씻고 오면 만지게 해 줄 거야?“
"꺼져.“
"어우. 단호한 대답.“
거친 말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만 있는다. 그러자 그의 여자로 생각되는 여자가 다가와서는 초조함과 질투가 가득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남자에게 말한다.
"오빠. 저것들 딱 보니까 걸레들이잖아. 오빠만 더러워질 뿐이야!“
"닥쳐 봐. 그리고 네가 걸레지. 애들이 걸레인지 아닌지 모르는 거잖아?"
"그, 그건......“
"꺼져. 이제 필요 없으니까."
마치, 내 것이라 주위에게 알리듯 남자의 굵은 팔을 가슴 사이에 끼워 넣으며 당당히 소리쳤는데 곧이어 들려오는 남자의 말에 경악한다.
"무, 무슨 소리야 오빠! 피, 필요 없다니!“
"솔직히 네가 생각해 봐. 이렇게 아름다우신 미인들이 계시는데 너 같은 걸레 년이 눈에 들어오겠냐?“
"그, 그럴 수가... 날 지켜주겠다며! 사랑한다고까지 말했잖아!“
"닥쳐라. 시끄러우니까.“
"꺅!“
여자의 품에서 팔을 빼내어 밀치자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흐윽... 흑...! 나쁜 놈...! 이 쓰레기!“
예쁜 여자들에게 눈이 팔려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훌쩍거리며 욕을 입에 담는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재희에게 분노가 가득한 시선을 가져다준 뒤에 힘겹게 일어서서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뭐야. 이것들은.‘
드라마 촬영인가. 꽤 재밌는 상황이긴 한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데. 원치 않는 악역이 되어버린 사실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름은 뭐야?“
"......“
"아... 지금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근데 내 여자가 될 생각 없어? 너희 둘이라면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줄 수 있는데. 잘해 줄 수도 있어. 그리고 저기 교복을 입은 애도 예쁘니까 너희 셋을 내 아내로 삼아 줄게. 어때?“
"미친놈......!“
"하하하! 미친놈이라니. 너희들도 경험했잖아. 고작 여자 셋이서 어떻게 살아가게? 내 힘이 필요할걸?“
"흥...! 필요 없어!“
재희가 있는데 굳이 남자의 도움이 필요할까. 물론 재희에게 부담을 주긴 하지만 그래도 재희 외에 다른 여자나 남자의 것이 되면서까지 부담을 덜어주고 싶진 않았다. 이미 민정이의 몸 어느 것이든 재희의 것이니까. 그리고 은빛을 띠는 재희의 머리카락 또한, 한을 한 올이 다 민정이의 것이니까. 이런 멍청한 남자의 부인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뭐,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기 마련이지. 그래도 나는 그 장미의 가시를 다룰 방법을 아는 신사적인 남......“
"지랄하네. 발정 난 짐승 새끼가. 어디서 얻어들은 병신같은 멘트로 언니들이나 나를 부인으로 만들겠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뭐, 뭐? 지, 짐승?“
대꾸조차 하지 않고 있는 재희와 소심하게 대응하던 민정이의 모습이 너무나 답답하기 그지없어 결국 예림이가 나서서 욕을 입에 담았다. 역시 고등학생이며 하라는 공부는 않아고 놀긴 놀았는지 욕이 참 찰졌다.
"뭘 꼬라봐? 병신아."
남자의 무서움을 튜토리얼 안에서 질리도록 느꼈을 거라 생각되는 예림이었는데 아직 부족한지 대답하게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다시금 욕을 내뱉었다.
"이, 이 미친년이! 얼굴이 반반하다고 아내로 삼아 주려고 했더니! 넌 안 되겠어. 애들과 다르게 성노예로 삼아 주지!“
딱 봐도 교복을 입은 게 미성년자로 보이는 예림이에게 욕을 먹게 되니 분노가 한계까지 찾아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거대한 주먹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민정이의 몸을 밀어내고 예림이에게로 떨어지는 주먹을 받아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재희, 그랬던 그때. 문이 열리고.
"멈추세요. 참가자분. 배 안에서는 싸움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년이 먼저 나한테 욕을 했다.“
"하? 짐승이 발정 나서 언니들에게 개소리를 지껄인 게 누군데! 뭐? 부인? 지랄 염병."
"이, 이게!“
"그만. 저도 참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만?"
멈추라는 말에도 다시 싸우려는 둘의 모습에 얼굴은 웃고 있는데 목소리는 낮게 깔린 어투로 말하자 그제서야 남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씩씩거리며 돌아서서는 의자에 무거운 몸을 떨어뜨렸다.
"좋습니다. 재희 씨? 그리고 두 분도 자리에 앉아주시겠습니까?"
"그러죠.“
화장실에는 조금 있다 가야겠다고 생각한 재희는 민정이와 예림이의 가냘픈 허리에 팔을 두르며 걸음을 옮겼다.
"아앗...! 재희야. 부끄러워요. 그런데 왜 저년까지도 팔을 두르고 그래요?“
"그냥. 넘어가 줘.“
"......“
"하아... 알았어요.“
민정이의 시선에 예림이는 눈길을 돌렸다. 탐탁지 않았다. 자신의 것인 재희에게 알짱대는 불여시 같은 년인데. 그렇다고 예림이가 말했듯이 발정 난 짐승들이 곳곳에 놓여있는 이곳에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재희에게 몸을 기대었다. 그렇게 셋은 남자의 말대로 의자에 앉았고. 그녀들이 자리에 앉아 만족한 표정으로 남자는 손뼉을 쳤다.
박수 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지자마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은 참가자들에게 카드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재희와 예림이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카드를 하나 뽑아 민정이에게만 주는 것을 보니 아무렇게나 주는 게 아니라 카드들의 주인이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빚 15억......“
받은 카드를 바라보며 민정이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빚?“
"네. 빚이요. 제가 여기 오는 조건으로 받은 돈이 5억이거든요. 여기.“
재희가 의문을 가지자 민정이는 자신의 카드를 내밀며 보여주었고, 카드에는 민정이의 얼굴 사진과 개인정보, 그리고 빚의 금액이 나와 있었다.
"예림이는?“
민정이의 카드를 보고 있을 때, 마침 예림이도 카드를 받은 걸 확인한 재희는 예림이에게 물음을 던졌다.
"20억... 꽤 비싸게 날 팔았네요. 보기보다 나 능력 있는 몸?!“
해맑게 웃으며 농담하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그래서 예림이를 품에 안아주었고.
"아.... 유, 윤재희 씨......“
드디어 재희에게 카드가 도착했는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재희의 앞에 섰다. 그러나 그는 재희를 향해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드를 조심히 내밀었다.
"고생하세요... 어, 언젠가는 다 갚을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렇고요."
대체 얼마이길래. 자신에게만 이런 말을 해 주는 것일까. 망할 아버지 때문에 이곳에 강제로 참가하게 되어도 노력과 근성만 있다면 빠져나갈 정도의 액수의 빚이 있길 간절히 빌며, 불안한 마음으로 카드를 바라보았다.
"아......?“
언제 찍은 지 모를 남자였을 때가 아니라 지금 여자의 모습을 한 재희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카드에 붙어 있었다. 성별로 여자라 바뀌어 있었고, 고작 이런 거로 얼빠진 소리를 낼 리 만무했다. 예상이 가능한 범위였으니까. 하지만......
"시발... 대체 뭔 개 같은 사고를 친 거야?"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벼 다시 보아도 숫자는 바뀌지 않아 욕을 입에 담으며 바닥을 향해 카드를 집어 던졌다.
1000000000000 라는 어마 무시한 숫자. 0이 많아도 너무 많은데... 과연 아버지가 무슨 수로 이 많은 액수를 빚을 진 것이며, 대체 왜 이 빚을 아들인 자신이 갚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