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021 튜토리얼
재희가 일어났을 때를 맞춰 재희의 인기척에 예림이도 그때 일어났지만 몰려드는 수마에 저항하지 못하고 눈을 도로 감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 아침에 피곤할 법한데도 일어나 대체 어디로 향하는지 의문이 들어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고 눈을 떴을 때, 무리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재희의 모습과 그런 재희의 뒤를 의미심장하고 기대와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따라는 남자의 모습에 불안한 생각이 들어 곧장 차인원을 깨워서 둘을 찾았다고 한다.
안 그래도 피와 흙 등등이 묻어 새하얀 원피스가 더러워진 상태라 불쾌하기 그지없는데 여기서 새로운 더러움이 추가될 수 있었다. 당연히 조심만 한다면 피가 튀지 않을 테지만 김유한처럼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굳이 직접 죽여줄 필요도 없을지언정 더러워진 칼을 아침부터 닦기도 싫어 오히려 더 나은 상황이 펼쳐졌다고 생각하는 재희였다. 하지만.
"죄송해요... 인원이 오빠를 깨우지 않고 재희 언니를 보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흉물스러운 걸 본 것도 모자라 강간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만으로 일반 여자라면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짓을 재희처럼 이미 두 번이나 당했던 예림이에게는 무척 이해가 되는 고통과 가까운 기억이며 두려움이었으니까 재희의 지금 심정을 아는 듯 몸을 크게 떨며 사과의 말을 반복한다.
"괜찮다니까. 오히려 예림이 덕에 무사한걸?“
예림이가 차인원을 깨우지 않고 재희를 붙잡았더라면 남자는 그저 미수로 풀려나기만 하지 무리에서 퇴출당할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럼 계속해서 재희를 노리러 귀찮게 굴어 스트레스만 받다가 이내 직접 손으로 처단했을 터이기에 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평범한 여자가 아닌 재희로서는 별로 큰 충격적인 일을 당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 괜한 걱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그래도.....“
"괜찮아. 봐봐. 어, 언니. 아무렇지도 않잖아?“
"......“
스스로 언니라는 말을 하니 살짝 자괴감이 들어오는데 그래도 자신을 위해 나서준 거로 모자라서 걱정하는 예림이를 위해서 찌그러지던 표정을 웃는 모습으로 바꾸었다.
"네......“
그러자 자신을 위해 애써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성이 느껴져 예림이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렇게 둘은 차인원과 남자를 내버려 두고 다시 무리로 돌아왔고.
"재희야아!“
재희의 걱정에 울먹이고 있던 민정이는 무리로 돌아온 재희의 모습에 결국 울음을 펑펑 터뜨리며 재희에게 달려들었다.
"어... 아... 그, 그래.“
그게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이었나. 그 새끼보다 더 강해 보이던 남자들을 동시에 상대해 이겼을 때가 바로 어제였는데 그새 까먹었던 것일까.
"무, 무슨 일은 당하지 않았어요?! 재희가 강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구요!“
"응...? 재희 언니 강한 거야?“
민정이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물음을 툭 던지지만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정이는 예림이의 물음에 대답해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오두방정이었고, 그런 민정이를 말리느라 바쁜 재희조차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내 거에요! 재희는 저만의 거라고요!“
다짜고짜 울음이 자옥하게 깔린 얼굴로 입을 맞추는 민정이. 하는 수 없이 여기서는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어야겠다며 민정이의 가냘픈 허리에 손을 바쳐 키스를 이어나간다. 어제와 그저께와 달리 자기 스스로 적극적으로 키스에 임하자 살짝 당황하며 힐끔, 옆에 있는 예림이와 둘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고 있는 사람들을 살핀다.
"푸하... 이제 그... 읍?!“
도대체 얼마나 입을 맞추려는 것인가. 무차별적으로 혀의 습격을 그대로 받다가 이내, 손으로 민정이의 몸을 살짝 밀어 서로의 입술을 떨어뜨렸는데 아직도 부족한지 민정이는 재희의 머리를 끌어다가 다시 입을 맞추며 혀를 찔러 넣는다. 고작 키스일 뿐인데. 흥분하고 숨이 차 거친 숨이 입안으로 들어온다.
"재희 씨. 괜찮으신......“
방금 튄 피가 옷에 잔뜩 묻어있는 상태로 돌아온 차인원은 우선 강간을 당할 뻔했던 재희를 걱정하며 입을 열었지만, 민정이와 키스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민정아... 나중에. 나중에 하자.“
"싫어요! 더 할거에요! 더 할 거란 말이에요! 뿌우~!“
나중에 하자는 말에도 민정이는 포기를 모르고 계속 달려들자 결국, 재희는 힘을 써서 밀어내기 시작하자 삐졌는지 입술을 쭉 내밀며 따진다.
"아... 괜찮으신가 보네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키스까지 했으니 걱정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는데 남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동성끼리 키스를 대놓고 하는 모습에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마음 그대로 노출할 수는 없는 노릇. 최대한 미소를 그리기 시작한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그나저나. 그 새끼는 안 왔네?‘
한심하게도 자신을 강간하려고 했던 그 쓰레기는 차인원과 함께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이라고나 할까. 비교적 피가 많이 튄 것처럼 보이는 차인원의 옷, 그리고 너무나 짙은 피 냄새가. 이질적이게만 느껴졌다.
'죽였나?‘
커다란 두 주먹에 피가 잔뜩 묻어있는 것도 모자라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주먹으로 패서 죽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는요?“
"아... 퇴출했습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하고 보냈습니다.“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말하는 게 거짓말이었다. 그 때문에 정말로 주먹으로 패 죽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오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대체 왜? 왜 죽인 걸까 하고. 아까 소년이 말했다시피 예림이를 강간하려 했던 새끼들은 퇴출했다 하던데 알고 보니 그들도 차인원에게 맞아 죽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둘은 정말 퇴출만 시켰지 재희를 강간하려 했던 남자만 패 죽인 걸지.
'뭐... 내 알바 아닌가.‘
그 의문도 잠시. 자신을 범하려고 했던 남자가 죽든 말든 재희가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 * *
"뭐냐 앤... 죽이지 않고 왜 내 앞에 데려온 거야?“
험악한 얼굴의 한 남자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불쾌하다는 어투로 말하자 부하들은 하나같이 겁을 먹고 몸을 움추렸다.
"보, 보스. 그게 이 새끼가 여자가 있는 곳을 안다며 제발 살려달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죽이려고 했는데 자신이 본 여자 중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예쁜 여자라 말하니 솔깃하더라고요. 그래서 보스에게 어떻게 할지 물어보려고 살려서 데려온 겁니다.“
"여자라... 여자.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는 한 번도 못 안았지?“
그야 그럴 것이 머리보단 대체로 몸을 쓰는 게 잦은 이 게임 안에서 여자가 많을 리가 만무했다. 있더라도 정말 극소만 있을 테고, 운도 따라주지 않아 여자를 한 번도 보지 못해 원치 않아도 쌓여만 가던 성욕을 이곳에 온 뒤로 풀지 못하고 계속해서 쌓아두고만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예쁘다고?“
"네, 네. 정말 예쁩니다!“
"그래?“
"네! 제가 본 여자 중에, 아니 그 여자보다 예쁜 여자는 이 세상엔 없을 거라고 제 목숨을 걸고 확신합니다.“
"목숨을 걸고... 어차피 내가 믿지 않으면 죽는 게 기정사실이니 일단 막 뱉어보는 거 아니냐?“
"그럴 리가요!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흐음......“
그는 고민했다. 지금 죽여도 상관없는데 죽인다고 득이 찾아올까. 귀찮더라도 계속 이렇게 있는 것보다는 속는 셈 치고 한 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자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믿어보지. 예쁘든 예쁘지 않든 평타만 치는 여자라면 아무래도 좋아.“
외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쌓여버린 성욕만 채울 수 있는 여자만 있으면 되니까.
"가자. 애들아.“
"네! 보스!"
"네! 보스!“
"네! 보스!“
남자가 일어서서는 걸음을 옮기며 말하자 부하들은 우렁차게 대답하여 그의 뒤를 따른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말한 여자들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을 남자 또한, 부하들의 손에 강제로 몸이 일으켜져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시발... 하필이면 깡패들에게 걸리다니.‘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예쁜 여자를 발견하여 기쁨에 빠져 있었더만 알고 보니 자신은 상대조차 되지 않는 괴물이었고, 운 좋게 괴물의 손아귀에서 살아 도망치다가 다시 또 다른 괴물에게 붙잡힌 지지리도 운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 한숨만 새어 나왔다.
"어디에 있냐? 아직도 못 찾았냐?“
지나온 길을 어떻게든 기억을 되새겨 돌아와 드디어 여기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은신처로 사용했던 동굴로 돌아왔는데 역시 그녀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있는 거라곤 그때 보았던 시체가 되어버린 녀석들의 모습뿐. 이미 시체에 구더기가 가득하며 새들이 뜯어 먹은 흔적만이 남은 남아 저절로 구역질이 올라오는 역겨움을 차마 감추지 못했다.
"거, 거의 다 찾았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사실상. 여기에 있지 않으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길조차 없는 그저 넓은 무인도의 안에서 몇 시간 사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그 두 명을 찾는 건 말도 안 되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아는 척을 해야만 했다.
"보스. 여기 꽤 넓은데요? 여기면 저희 들이 다 들어가서 잘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냐? 그럼 이 시체들 좀 치워 둬라. 여기서 지내게.“
"네. 보스.“
"애들아.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자꾸나.“
"네. 보스.“
벌레들이 가득한 시체들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치워둔 그들은 넓은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잡아 온 남자가 말한 여자들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시발... 어디야. 제발. 어디에 있냐고!‘
그녀들을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한 지 이제 약 10시간이 더 되어버려 점점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급기야 조직 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게 아니냐며 의혹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여자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보스의 말에 더 따지는 것 없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지우지 않고 허튼 수를 벌이는 순간 곧바로 고통스럽게 죽일 거라는 날카로운 눈빛까진 거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진다. 분명 인간을 초월한 움직임을 보이던 은색의 머리카락을 허리 부근까지 길게 늘어뜨린 은안의 미녀도 무서울 따름이었지만 남자에겐 눈앞에 불어닥친 이들이 더욱더 무섭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무려 13명이라는 조직 폭력배들이라면 아무리 강한 그 여자라도 손수 무책일 게 분명하다. 이들의 삶은 폭력만이 가득했으니 여자인 그녀가 뭘 하려고 해도 혼자서 이들을 상대하긴 불가능할 테니.
그 때문에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애써 피했던 화살이 되돌아와 자신에게 꼽힐 수 있다는 생각에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것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남자들과는 비교되는 작은 사람의 발자국이나 동굴이라는 몸을 숨길 최적의 은신처를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아 어딘가 표시를 해 두었을 수도 있다고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운 좋게 표시를 발견했다.
"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네! 솔직히 그 동굴을 간단히 포기할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러면 무슨 표시를 해 두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표시를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앗! 여기요! 칼자국이 나 있습니다. 저기도요.“
"오호... 거짓은 아니라는 말이네. 다행이네. 목숨은 부지할 수 있어서.“
"하, 하하......“
남자의 말대로 길을 안내하는 듯이 나무에 칼자국이 계속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칼자국을 따라 드디어 여자를 안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이 가득한 걸음을 열심히 옮겨갔다.
"사, 사람.....?“
그리고 발견한 생존자.
"찾았다.“
그리고 발견한 은색의 머리카락과 적색의 눈을 가진 미녀를 찾을 수가 있었다.
"호오. 네 말대로네. 기분이다. 특별히 널 살려주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할 정도네. 저렇게 예쁜 여자. 정말 처음 보니까.“
"그렇죠!“
남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실존했다는 사실에.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이곳에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게 깨끗한 피부와 생얼은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여자는 단순하게 강제로 취하거나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에 이끌려 다가오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남자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걸 이용해서라도 저 여자를 얻어내고 말겠다 다짐했다.
"가자. 애들아.“
"네! 보스!“
"네! 보스!“
"네! 보스!“
그 때문에 차인원의 무리에 절망이 들이닥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