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019 튜토리얼
"설마......?“
불안한 생각이 갑작스럽게 밀려와 민정이를 초조하게 만든다. 예림이가 그랬다. 재희처럼 예쁜 여자라면 여자조차도 반할 거라던 그 말. 그리고 동성애에 긍정적이던 그 말. 마지막으로 남자들이 너무 꼬여 짜증 나다 못해 남자들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경험담인 것처럼 말하며 내내 밝았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던 모습에. 민정이의 두 눈은 빠르게 예림이의 얼굴로 향한다.
"아,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왜인지 모르게 재희의 앞을 막아서서는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서 가식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해 보인다. 마치, 민정이의 앞에서 짓던 웃음은 거짓인 것마냥.
"앗?!“
예림이가 손을 뻗어 재희의 손을 붙잡아 양손으로 포갠다.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질투하는지 주먹이 쥐어지고 걸음을 옮긴다.
"재희야~ 얘기 다 했어요?“
"아... 응. 대충은.“
"그럼 가요.“
예림이의 양손에 포개진 재희의 손을 빼내어 그 손을 잡아끌고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왜 그래? 갑자기?“
"흥! 아니에요. 아무것도.“
경계해야 하는 적은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자신도 재희에게 강간을 당했음에도 사랑에 빠진 것을 보면 어지간히 얼굴이 예쁘다고, 여자라고 못 꼬시기는커녕 꼬시고도 남는 외모라고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민정이는 강하게만 나가야만 했다. 이 무리에 처음 왔을 때처럼 재희의 손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의 시선이 둘을 따른다.
"민정아?“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팔을 이끌고 걷는 것도 모자라서 나무에 등이 닿도록 밀친 다음 얼굴 옆에 팔을 가져오니 재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순하디순한 백지 같은 소녀의 모습을 간직하던 민정이의 달라진 모습에 무슨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역시나 달라지지 않았는지.
"아우......“
일명 벽쿵이라는 걸 하며 재희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민정이는 이내,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왜. 나한테 뭘 하려고 했던 거야?“
"......“
거리를 조금 벌렸다고 해도 이렇게 다 보이는 탁 트인 곳에서 무얼 하려고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 재희지만 모르는 척, 물음을 던졌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은 침묵밖에 없었다.
"알려줄 수 없을까? 그리고 이런 짓을 하려 했던 이유도.“
"몰라요... 묻지 말아줘요.“
"왜?“
"그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질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잘나서 자신 이외의 사람들이 계속 다가오는 게 싫었다는 말을 부끄러운 나머지 차마 하지 못했다.
"말 안 해줄 거야? 나 궁금한데?“
"우으... 그냥. 모르는 척 해 줘요.“
부끄러움을 각오하긴 했었어도 막상 직접 해보니 용기가 나지 않아 민정이는 투덜거리듯 말하며 나무를 짚고 있던 손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왜. 내가 놓아 준데?“
재희의 얼굴을 뒤로하고 멀어져만 가는 민정이의 손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민정이의 팔을 잡았다.
"네, 네에....?!“
내가 놓아 준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콩닥콩닥. 민정이의 가슴이 미치도록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원한 거잖아?“
"꺅?!“
잡았던 민정이의 손을 강하게 잡아당기자 그대로 재희의 품에 안긴다.
"그럼 하자.“
품에 안긴 민정이의 턱을 잡아 위로 들린 후 입을 맞춘다. 차인원을 포함한 이곳 무리의 스물한 명이 전부 보는 앞에서 재희는 민정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간 것도 모자라 혀를 깊게 찔러 넣는다.
"우으...! 읍.....!“
전부 보는 앞에서 남자와 키스도 부끄러울 텐데 동성인 여자와 키스를 하다니. 창피해 죽을 노릇이었는데 잠시 뒤, 재희의 혀가 자신의 혀를 감싸 안아오자 그 창피함마저 사라져갔다.
"하아... 하아......“
"됐어?“
"......“
둘의 입술이 떨어지고, 흥분 때문에 거친 숨을 몰아쉬던 민정이에게 재희가 묻자 동성과의 키스, 사랑으로부터 나오던 부끄러움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되었지 않았다. 재희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다시금 머릿속에 각인시켜 남자들이 재희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만들고, 재희를 노리던 예림이에게도 임자 있는 사람이란 걸 확실히 알려줘야만 했다. 그러나 말만 이럴 뿐이지 사실은 부족했다. 재희와의 키스가 더 하고 싶었던 민정이는.
"그럼 더 하지 뭐.“
재희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미소를 띠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고, 그 모습에 두 눈을 감는다.
'사랑해. 재희야.‘
* *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직 동성애에 거부감이 있는지 재희와 민아가 서로 몸을 섞는 사이는 물론이고, 신체접촉까지 하는 것조차 남들에게 밝히기 꺼렸었는데 잠시 차인원이랑 현 무리의 상황과 비쓰온 게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난 뒤에 돌아오니 민정이가 이상해져 있었다.
다짐한 듯한 표정으로 재희를 끌고 가 나무에 등을 기대도록 밀쳐놓고, 재희에게 벽쿵을 한 것도 모자라서 키스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까지는 차마 하지 못해 멀어지려던 걸 오히려 재희가 민정이에게 키스를 했었다. 그랬더니 고민이라는 게 다 풀렸는지 실실 웃으며 자꾸만 키스를 원하는 것도 모자라서 옷가지를 풀어헤치려는 모습에 당황하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옷가지가 찢어져 브래지어가 그대로 노출된 상황인데 이젠 옷을 추슬러 속옷을 감추는 걸 포기한 듯, 이젠 더 옷을 늘려 가리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나 할까. 민정이는 현재 남들의 시선 따윈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재희의 팔을 끌어안은 상태로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뭐... 자기가 좋다는데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나저나. 저 애는 왜 저래?‘
아까까지 민정이와 서로 웃으며 잘만 대화하던 것 같던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민정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아름다운 은색을 가진 재희의 눈이 자신을 향해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곤,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재희야. 저 애 말고 나만 봐야 해요. 알았어요?“
"어...? 아, 알았어.“
"히힛...! 그럼 됐어요!“
뭐지. 대체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지? 어떤 대화를 했기에 순하던 민정이가 이렇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어왔다.
"자... 여러분. 이제 날도 깜깜해지는 것 같으니 지금 저녁을 먹도록 할까요?“
"아...! 밥! 드디어 밥인가?“
"하아... 배고파 미치는 줄 알았네.“
"아싸! 밥이다!“
아낄 수 있으면 무조건 아껴야 하는 식량 사정 때문에 모두가 굶주려 있었다. 그래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완전히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저녁을 먹자는 말에 사람들은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차인원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게 뭐야. 오늘 아침보다 더 적잖아?“
한 남자가 따지듯이 차인원을 쏘아보며 말한다.
"식량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러면 조만간 바닥을 칠 게 분명하니 양을 줄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 이해해 주세요.“
"뭐...? 이해? 시발. 지금 이해라고 했냐? 내가 모를 줄 알아? 저년들 때문에 줄인 거잖아? 안 그래도 없는 식량인데 사람은 줄지 않고 늘어나니까 우리 몫까지 준 거잖아!“
"그래! 그래! 그 말이 맞다!“
남자들은 동조하기 시작한다.
'우리 얘기인가.....?‘
재희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자신과 민정이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는지 남자들을 따라 차인원의 앞으로 가지 않은 노인과 애들, 여자들은 몸을 움츠리며 남자들의 말에 몸을 벌벌 떨었다.
'그런가.‘
이해가 되었다. 급조된 무리는 완벽할 리가 없었다. 그 무엇보다 무리를 형성하고, 생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식량과 물이 사람들에 비해 이렇게나 적은데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무리의 리더에게 대들 수 없을 상황일 때만 해당된다. 그러나 차인원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데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아서는 모두가 행복해질 방법만 찾는 이상적인 생각만 가진 착해빠진 답답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상황도 좋지 않은데 재희와 민정이를 무리로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기존 무리의 사람들에게 주는 식량을 떼서 둘에게 나눈 것이다. 그에 반발해 남자들은 결국 폭발한 거고. 그럼에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재희였다. 민정이가 기질을 발휘해서 식량과 물이 가득 든 가방을 숨겨 놓았으니 들키지만 않는다면 굶주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언니... 무서워요.“
이름이 예림이라고 했었나 민정이와 다르게 귀여운 외모를 지닌 고등학교 3학년인 소녀는 민정이가 이미 차지하고 있는 반대편 팔을 끌어안아 온다. 그리고 말과 동일하게 몸이 떨리는 걸 보면 정말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했는데 민정이가 팔을 풀어주지 않는다.
"어린 불여시 같은 게.....!“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데 애써 무시하고 차인원과 남자들의 대화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한다.
"도움도 안 되는 것들. 싸움은커녕 뭣도 못 하는 늙은이들은 방출하자니까? 죽이자는 것도 아니잖아? 식량만 앗아가는 해충들인데.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대가 없이 보호만 해 줘야 해? 솔직히 이 정도 했으면 우리한테 시발. 따먹어 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상황 아니야? 어?!“
"그 말... 진심으로 하시는 겁니까?“
"진심? 허?! 시발. 돌아버리겠네. 우리가 여자들을 지켜줄 이유가 있냐? 그저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켜줘야 해? 병신 같은 말은 개나 줘버려. 우리도 대가가 있어야지. 지켜주고 받는 대가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힐끔. 재희를 바라본다.
'역겹네.‘
그는 민정이도, 예림이도 아닌, 재희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재희의 인상을 찌푸려졌다. 차인원도 마찬가지였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왜? 치게? 나 치려고? 쳐봐. 시발 누가 이기는지 보자. 어?!“
주먹을 들어 올린 그 모습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자신의 편이 더 많다고, 자신이 하는 말이 맞는 말이라고 혼자 납득하며 당당히 소리친다. 그 때문에 참는 데 한계가 찾아오자 차인원은 주먹을 뻗었다.
"끄악!"
그래도 함께 협력하고 살아온 정이 있어 얼굴이 아니라 팔뚝을 강타한다.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지 않아 일부러 팔뚝을 쳤으니 힘도 많이 뺀 상태일 텐데 남자는 고작 그 주먹을 맞고 쓰러지며 요란하게 비명을 내지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또 있으십니까?“
누구 하나를 지금 당장 죽일 수 있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는 차인원. 아까까진 남자의 말에 동조하며 한마디 거들었던 남자들이었는데 지금은 할 말이 아예 없는 듯 차인원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다.
"이해합니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흰 사람입니다. 최대한 짐승이 되지 말도록 합시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요? 그럼 저희처럼 사람이 아닙니까? 저희와 같은 사람입니다. 숨을 쉬고! 말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뭐요? 내치자고? 스스로 몸을 바쳐야 한다고요?!“
차인원은 제대로 화가 났는지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만약, 지금 차인원에게 반발하는 남자가 또 있었더라면 이미 저 거대한 두 주먹에 맞아 빌빌거리고 있었겠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발... 죽어도 짐승이 될 바에는 그냥 사람인 상태에서 죽자고요. 네?“
"그래... 그 말이 맞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인원아. 진정하거라. 저들도 너무 굶주린 나머지 생각에도 없는 말을 한 게 아닐까? 그러니까 진정해.“
"......“
처음부터 차인원의 편이었던 아저씨들이 잔뜩 화가 난 차인원을 진정시켜보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일... 제가 뭐라도 구해오죠.“
그 말을 하며 가방에서 소량의 물과 식량을 양손에 들고선 돌아선다. 그리곤 여자들과 애들, 노인들이 있는 곳에 가서 물과 식량을 나눠주고 재희에게로 다가온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사과의 말.
"원래 안 그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쁜 길로 들어서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가 잘 타일러 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흥.....!“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는데 애초에 차인원을 좋게 보지도 않고, 남자들이 재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날이 잔뜩 선 민정이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듯이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
"죄송합니다......“
더는 길게 말하지 않고 차인원은 재희와 민정이, 그리고 예림이가 먹을 식량과 물을 두고 떠나갔다.
"민정아.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은......“
"싫어요! 제가 왜요? 그리고 재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요!“
"그래... 그래라.“
여자의 마음은 참 모르겠다. 이제 여자가 되어버린 재희가 그 마음을 언제 알게 될지. 알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