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013 튜토리얼
'하아......'
재희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갈색의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미녀 이민정의 현재 마음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민정이조차 지금 자신이 왜 이런 것인지 모를 정도로 처음 느껴보는 모습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자신과 같은 동성이면서 남자에게 범해질 바에는 차라리 여자에게 범해지는 게 더 낫겠다 싶어 동행을 허락받은 것이지만.
재희의 허락이 떨어졌을 때, 민정이는 도저히 말 못 할 기쁨에 가득 차게 되었다. 이 기쁨이 어느 부분에서 찾아온 것일지. 민정이는 의문을 품으며 은발과 적안을 가진 절세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선 다시 또 많은 생각 하듯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자신은 뚱뚱하고 역겨운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던 걸 구원받았다.
이럴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도움을 받은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반해버리던데, 민정이는 도움을 받은 대상이 바로 같은 여자라는 사실에 그런 영화 같은 감정이 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며 소리치듯. 갑작스럽게 이어진 재희의 키스와 노련한 손놀림에 끝내 딱히 지켜온 건 아니었지만 처녀까지 잃게 된 상황에 도달했다.
막상 처녀를 강제로 잃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게 된 민정이, 하지만 이내 재희와의 키스가 끝나고, 자신의 몸을 기쁘게 해 주던 재희의 손이 떨어지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끄러움에 그녀의 두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고, 이제는 재희를 보기만 해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행이라고나 할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갇힌 사람들 사이에서 식량과 물을 빼앗기 위해 싸움은 물론이고 살인까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재희가 민정이를 호되게 대하지 않으며 한 사람으로 존중해줄 것만 같아 안도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풀어지면서 그 마음이 다시금 그 손으로 자신의 몸을 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났다.
'아, 아니야! 민정아! 여, 여태까지 남자 친구는 없었긴 했지만 그래도 여자에게 그러다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원래 여자를 좋아해서 그 많은 고백을 찼던 걸까나.....?'
급기야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성인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좋아했던 자신인지, 남자에서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린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민정이는 뭐가 어찌 되었는 자신의 앞에서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재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누굴까...? 연예인인가? 모델? 배우? 가수? 음... 내 기억 속에는 없는데.'
민정이는 밖에서 예쁘다는 말을 질리도록 들어왔었다. 그래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건만 재희를 본 이후로는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수직으로 하락을 그리고 있었다. 그야 그럴 것이 민정이가 여태까지 본 여자들... 사람 중에서 가장 예뻤으니까. 솔직히 재희와 비교될 만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왔다.
'그나저나 머리카락 색이랑 눈 색이 너무 자연스러운 게... 천연일까?"
무섭지는 않은 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재희의 머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민정이는 생각했다. 민정이가 이곳에 온 지 약 이틀이며 비쓰온 게임이라는 것에 참가하기 위해 자유를 빼앗겼던 것까지 합치면 족히 일주일은 가까이 다가선다. 그 때문에 염색을 했으면 당연히 머리카락의 뿌리 부근 쪽에 가까워질수록 본래의 색이 나타날 것인데 재희의 머리카락은 온통 은색이었다.
그래서 민정이는 재희의 머리카락 색이 자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왔다. 부러웠다. 저렇게 예쁜 은색의 머리카락이 자연이라니, 또한 눈의 색깔까지 적색인 게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오지만,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아름다운 외모가 받쳐주니 그것마저도 조화롭게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백옥과도 같은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원피스 사이로 보이는 몸의 율곡조차.
원래라면 보이질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여신처럼 보이는 재희의 외모와는 다르게 사람인지 나풀거리는 원피스가 땀에 젖어 재희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보이게 된 재희의 커다란 가슴과 여자들이 간절히 바랄 이상적인 엉덩이 크기와 형태, 그리고 허리는 민정이라도 옆에 서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올 정도로 온몸이 아름다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재희의 아름다움은 얼굴에서 나오고 있었다. 얼굴의 크기는 어찌나 저렇게 작은지, 머리카락과 달리 눈이 또 적색이라는 예쁘면서도 살짝 미묘한 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잘 어울린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으며 코의 크기와 모양도 신이 열심히 빚어낸 것처럼, 그리고 개인 물품은 옷조차 반입이 불가한 이곳에 립스틱이나 틴트도 없을 텐데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 새빨간 입술을 어떻게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인......
"아우.....!"
민정이가 재희의 새빨간 입술을 생각하자마자 입을 맞추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부끄러움을 느끼며 신음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더 그녀와 키스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뭔가... 뭔가가 잘못되어도 상당히 잘 못 되었다고 민정이는 생각했다. 재희를 생각하거나 재희를 보기만 해도 가슴은 미칠 듯이 뛰어왔고 얼굴도 붉어져 달아올랐다는 걸 알려주듯 뜨거워졌다.
자기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지만 민정이는 애써 외면했다. 왜냐하면, 남자도 아닌 처음 만난 동성인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당연하게도 어렸을 적부터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라는 관계일 때에만 성립하는 사랑을 알아 왔기 때문에 믿기지 않을뿐더러 남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무너져 가는 가정과 가족을 대신해서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 몰래 아무 말도 없이 자진해서 비쓰온 게임에 참가했던 장녀이자 외동딸이 운 좋게 살아와서 모습을 드러냈더니 이성인 남자가 아니라 동성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어떻게 받아줄까.
그리고 민정이의 친구들에게도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여태까지 받은 고백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성별이 아닌 전부 남자라서 찬 거라고 도저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자꾸만 민정이의 머릿속에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는 재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만큼 그녀의 입술을 다시 또 느껴보고 싶었다.
그만큼 그녀의 손길을 다시 또 느껴보고 싶었다.
원래 민정이가 여자의 손에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잘 느끼는 음란한 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희에게 잠시 범해질 당시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쾌감을 느껴버렸다. 고작 그 한 번으로 중독이 되어버린 듯.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움츠렸다. 허벅지를 살살 비벼대며 뚱뚱한 남자의 손에 찢어진 가슴 부근의 옷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점차 강하게 들어갔다. 21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쾌락에 중독되어버린 민정이는 앞서 걸어가던 재희의 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나...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계속 몸이 달아오르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민정이가 왜 계속 그녀의 손을 원하는지도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잠깐... 멈춰."
"하읏...! 읍?!"
좀비처럼 터덜터덜 재희의 뒤를 따르고 있던 민정이의 몸에 재희의 손이 닿았다. 재희에게는 그저 민정이를 멈춰 세우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한없이 달아올라 있는 민정이의 몸이 그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며 신음했다. 그래서 민정이는 오히려 자신이 놀라며 입을 틀어막고선 조심스럽게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랬더니 역시 예상대로 재희는 보석같이 아름다운 적색의 눈을 가져와서는 민정이의 이상한 반응에 의문을 품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재희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림이 되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실존해 있어도 되는 게 맞는 건지, 사실은 천사나 여신이 아닌 건지 황당한 생각까지도 든 민정이었다.
어찌나 예쁜 건지 질투라는 감정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먼 거리의 존재라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비교하는 걸 포기한 것처럼. 오히려 질투보다 축축하게 젖어온 자신의 속옷 너머를 손으로 만져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재희는 애석하게도 민정이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곧장 고개를 돌렸다.
"7명이라... 자리도 나쁘지는 않은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재희의 표정을 봐서는 현재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빠르게 알아차리며 조용히 입을 다물자 재희는 민정이를 범하려 했었던 뚱뚱한 남자의 목을 그을 때 사용했던 칼의 손잡이를 꽉 쥐며 말했다. 저렇게 예쁜 입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말이 나오니 너무나도 이질적이게만 느껴졌지만 민정이의 시선이 재희의 시선이 고정 되어 있는 곳을 향하자 불안함이 엄습했다.
"싸, 싸울 거예요?"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농담이 아닐까하는 말. 그야 그럴 것이 민정이의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 두세 명이 한 번에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정도의 커다란 입구를 가진 동굴이 하나와 그 앞에 7명의 남자의 모습이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악을 금치 못하며 조심스럽게 재희에게 물어보았다.
"도, 도망가면 안 돼요? 너무 무모해요!"
재희가 강하다고 한들, 민정이를 범하려고 했던 뚱뚱한 남자와는 다르게 체계적으로 운동을 했던 사람처럼 보이는 남자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얼마나 있을지는 여기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이젠 나 혼자가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너도 있으니까.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몸을 숨기고 피로를 풀 곳을 찾아야만 해."
"......"
간단하게 말하자면 민정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민정이는 그렇게 해석하며 그녀가 준 가방에 같이 들어 있던 칼을 꺼내 손을 쥐었다. 재희 혼자라면 몰라도 민정이라는 짐이 있어서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도 도움을 주어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칼을 쥐었지만 한심하게도 칼을 쥔 민정이의 손은 쉴 새 없이 떨려왔다.
곧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손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 반대편 손으로 칼을 쥔 손의 손목을 꽉 붙잡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빠르게 끝내면 돼. 겉으로 보기에는 남자답지 못하게 비명이나 내지를 놈들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빠르고, 피가 튀지, 않게 처리하면 될 거야. 그러니 넌 여기에 있어. 나 혼자라도 충분해."
"......"
재희의 말에 민정이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면서 설득을 해 본다 한들 어쨌거나 민정이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면서 슬슬 날이 어두워지는 것이 잠을 잘 곳을 어서 찾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나...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자고로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한 짓을 하는 걸 보게 된다면 당연히 말려야 하지 않을까. 말리지도 않는데 이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재희가 저 남자들과 싸우다가 크게 다쳐 죽는 미래나 재희가 남자들에게 사로잡혀 자비 없이 범해지는 모습을 상상하니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기다리고 있어.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올 테니까."
민정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제 흘렸는지도 모를 눈물이 떨어져 흙바닥을 적셨다. 재희는 자상하게 말하면서 민정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재희가 무슨 짓을 할 것인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재희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소리가 들리고, 재희를 발견한 듯 남자들의 감탄과 욕망에 가득한 혐오스러운 말들이 민정이의 귓가를 강타했다.
그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하여 애꿎은 흙에다가 칼을 내리꽂았다. 그리곤 흙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아다가 다시 내리꽂기를 반복했다. 민정이는 그저 재희에게 빌붙어서는 식량과 물을 뺏어가는 짐 덩어리에 불과했으며, 민정이의 귓가에 남자들의 다급함과 고통에 젖은 비명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재희가 위험한 상황은 아닌지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재희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휴.. 일행이 있어서 천만다행이군.“
민정이의 눈에 재희의 모습이 담기기도 전에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민정이는 땅에 꽂혀 있는 칼을 빠르게 뽑아다가 휘둘렀는데 그 칼은 남자에게 닿질 않았다.
"큭...! 꺅?!"
남자는 민정이의 손목을 붙잡고 힘을 주자 손에 쥐어진 칼은 주인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고, 목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면서 팔이 높이 들려 강제로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어이. 거기까지. 더이상 움직이면 나도 이 여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어."
"......"
잠시 정찰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아름다운 미녀 한 명에게 유린당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조마조마하던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크게 소리쳤다. 여차하면 이 명당과 스스로 찾아온 미녀를 포기할 생각으로 소리를 크게 쳐 봐야 하나 생각했는데 일행이 있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러자 재희는 볼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고운 미간을 찌푸림과 동시에 날카로운 눈으로 민정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재희의 시선에 민정이는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미안해......'
마음속으로 끊임없는 사과를 하며 외쳤다. 같이 다녀줄 수 있냐는 말을 한 건 민정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을 구하려 들지 않으면서 가차 없이 버려달라며 말이다. 굳이 이미 붙잡혀 있는 민정이 하나만 희생하면 충분할 것을 재희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재희가 없었으면 남자에게 범해져 더럽혀졌을 몸. 하지만... 하지만 민정이는 왜 그런 말들을 속으로만 하고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의지하려고 드는 자신이 원망스럽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