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010 튜토리얼
아직 한여름이라는 계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만약의 사태로 식량이 썩어가는 것만 조심히 잘 대처한다면 한동안은 먹을 거 걱정 없이 굶주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만 찾으면 되었는데 은신처를 찾기도 전에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버렸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
남자였던 터라 아래가 뻥 뚫려있는 원피스는 당연히 거부감이 들어오지만 그래도 지금 마땅히 입을 것도 없고, 거부감이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알몸으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여태까지 입고 있는 것이지만... 그랬는데.
"하... 바지까진 바라지 않아도 입힐 거면 제대로 된 거로 입혀 주지. 쯧......“
몸을 움직이면 땀이 나오는 건 불변의 법칙이다. 하지만 그 소량의 땀에 젖어 온몸에 찰싹 달라붙는 옷은 정말 말도 안 되면서도 속살까지도 비춰 보이면 그야말로 벗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오히려 벗은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에 달라붙으니 신경 쓰여 움직임에도 방해가 되었다. 그렇기에 들어온 생각이 그냥 벗을까였다.
여자가 된 터라 죽어있는 김유한이 입고 있는 옷도 꽤 큰 것 같고, 남자는 두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칼에 찔려 뻥 뚫렸거나 피와 흙으로 잔뜩 더러워져 있는 옷을 입고 싶지도 않아 마치, 가질 수 없는 걸 보는 듯, 재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옷이 얼마나 좋지 못하면 땀을 머금고 있던 원피스에서 흰색 색소가 재희의 고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 황당한 모습에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요즘 세상에 이런 옷을 만드는 곳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온다. 잘 못사는 아프리카의 사람들도 이런 옷은 입고 다니지 않을 텐데. 재희는 일부러 이런 옷을 찾아 입힌 것 같다는 생각에 툴툴거렸다. 그러면서 땀에 젖은 옷을 조금이나마 말려보고자 원피스의 옷자락을 붙잡고 탈탈 털었다. 그럴 때마다 인위적인 바람이 생겨나 마르는 느낌이 나면서도 몸에 걸친 거라곤 아래위로 속옷과 원피스 하나뿐이라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그냥 벗어? 춥긴 하겠지만 오히려 그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말도 안 되는 말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과만 본다면 무슨 재미로 이 게임을 주최할까. 이 섬 곳곳에 설치되어 실시간으로 재희를 보고 있게 해주는 카메라의 모습을 찾았는데 부질없는 짓이지만, 피부에 딱 달라붙고, 속살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원피스 때문에 곤란해하는 모습에 낄낄거리고 있을 거라 생각을 하니 스트레스가 해일처럼 밀려온다.
신체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가 우위에 점하고 있다. 또한, 여자보단 남자가 힘을 쓰는 일에, 싸움에 더 익숙하기도 하니 당연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정신 나간 게임에는 여자가 있을지언정 남자보단 많을 리는 없다. 그리고 보는 입장에서도 남자들이 다수 참가하는 게 더 재미있을 거고, 김유한이나 남자의 반응을 보아서는 외모 또한, 아름다운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니 미래가 눈에 훤하다.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가 불편하다고 그냥 속옷만 입은 치녀처럼 하고 다녔다가는 굳이 싸우지 않고 서로 좋게 지나갈 수 있는데 살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걸로 판단한 남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갔다. 아니, 그냥 원피스를 입고 있어도 치녀같아 보이니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아무리 그래도 겉옷을 벗고 다니는 건 아니라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다.
"하아... 스트레스 받어... 짜증나."
실험의 여파로 좋아진 오감과 월등히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들 무적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차라리 싸움에서 져서 죽여주면 좋으련만, 남자에게 범해질 것이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그래도 망할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대한 책임이 있으니 엄마를, 그리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딱 감고 몸을 내줄 생각이지만.
"이렇게 만들 거면 차라리 예쁜 여자보다는 잘생긴 남자로 만들어 주던가."
재희가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다고 갑자기 남자가 좋거나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보자마자 음흉한 눈길을 주거나 범할 생각에 가득 차 있는 남자들의 모습에 더 혐오스러운 감정이 생겨날 뿐이지 여전히 남자보단 여자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데, 겉모습만 보더라면 외도를 걷는 성 정체성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20살을 먹도록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똘똘이가 말이다. 보기보다 꽤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던 재희였는데 가족을 부양할 생각에 받아온 고백들을 전부 다 차버리고 모태솔로의 인생을 걸으며 공부만 주야장천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때 여자를 사귀고 동정 딱지라도 뗐으면 똘똘이를 이렇게까지 그리워하지 않았을 거 같다. 한평생을 함께 살아온 동반자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져 성별을 바꿔버린 모르는 존재에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꺄아아악!“
데자뷔와도 같이 귓가를 강타하는 커다란 비명소리에 재희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왜인지 모른다. 아까 이와 같은 비명을 들었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인가.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나는 거라곤 이 비명의 목소리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몸이 반응하며 다짜고짜 비명이 울려 퍼진 곳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해... 뭔가... 뭔가가 이상해......'
이곳에서의 비명소리는 전혀 이상할 게 아니었다. 그게 여자의 것이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여자의 비명소리가 더 잦을 수도 있었다. 남녀 비율의 차이는 있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수가 더 많더라도 남자는 죽이되 얼마 없는 여자는 죽이지 않고, 데리고 다니며 계속해서 성욕을 풀 테니까. 그래서 남자의 수는 서서히 줄어든 데 비해 여자의 수는 별로 줄지 않고 강간을 당하면서 비명소리는 끊이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재희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 이상함은 오로지 귓가를 파고든 비명소리가 아니라 그 비명소리를 듣고 반응한 재희 자신의 몸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니. 이것을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정말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재희조차 처음 듣고 느껴보는 몸의 반응이다.
"시, 싫어어엇!"
"가만히 있어! 가만히...! 키헤헤헷! 죽기 싫어서 도망만 치던 내게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아직 신은 나를 버리지 않은 건가? 아니면 내 영웅의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되는 건가?!"
탐욕으로 가득 찬 뚱뚱한 남자 한 명이 기기괴괴한 얼굴로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밑에 깔린 한 여자의 상의를 거칠게 잡아 뜯으면서 말했다. 여자는 그런 뚱뚱한 남자의 밑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 발버둥을 쳐 보고는 있었는데 여자와 남자의 신체 구조적인 힘의 차이에 더해 남자의 어마 무시한 몸무게, 그리고 운동이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여자의 가냘픈 두 팔로는 자신의 몸을 깔아뭉개 앉아있는 남자를 쳐내기란 무리가 있었다.
"나, 나는 처음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널 기분 좋게 하려고 노력해 볼게! 미카짱은 분명... 이, 이렇게 만져주면 좋아했어!"
"싫어! 싫어엇! 난 그런 거 바라지 않는단 말이야!"
"그래도 상관없어! 미카짱도 처음에 이렇게 격렬히 저항해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 얌전해졌어."
"꺄아아악!"
"그리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것이 없으면 살 수 없게 된 몸이 되어버렸지! 푸히히히! 곧 너도 그렇게 만들어 줄게.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줄게!"
상의를 거칠게 잡아 뜯어서 모습을 드러낸 여자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쥔 뚱뚱한 남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어 자신의 아래에 깔려 비명만 내지를 뿐,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 여자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천천히 가져갔다. 그러자 여자는 다시 비명을 내지르며 원치 않는 입맞춤을 피하고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뚱뚱한 남자의 손에 의해 다시 정면을 향했다. 이대로만 있으면 얼마 안 가 둘의 입술이 맞닿아 남자의 혀가 여자의 입안으로 침투했을 테지만.
"저리 꺼져.....!"
불쾌하다는 듯, 재희는 자비를 가지지 않은 온 힘을 다한 발차기로 뚱뚱한 남자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때문에 뚱뚱한 남자는 거대한 몸집이 살짝 공중에 뜨며 옆으로 엎어졌다. 처음으로 여자를 범할 생각에 행복해 보이던 바로 전의 표정과는 다르게 고통에 잔뜩 일그러져 재희의 발에 차인 옆구리를 움켜쥔 뚱뚱한 남자.
"끄아아악!"
갑작스럽게 이상해진 몸 상태라 제대로 자세를 잡고 발을 휘두른 게 아니었고, 남자의 지방이 쿠션 역할도 하여 큰 피해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뚱뚱한 남자는 멀쩡한 모습으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맞은 적이 없던 옆구리를 움켜쥐며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비명을 내질렀다.
"아파아! 아프다고오옷!"
재희가 보기에는 그리 아파 보이지는 않아 엄살이라 생각이 되었다. 만약 재희였다면 맞았다고 쳐도 아픔을 꾹 참고선 자신을 향해 발로 찬 상대의 이어지는 공격에 대비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뚱뚱한 남자는 마치, 아이가 마트에서 우연히 발견한 장난감을 어머니에게 사달라고 떼를 쓰는 것과 같이 흙바닥을 뒹굴었다.
"누, 누구야?! 누가 감히 주인공이 될 나를 발로 찬 거... 어.....?"
이곳에 오기 전에 모든 사람을 피해갈 정도로 겁이 많은 한심한 뚱뚱한 남자였지만 자신이 주인공이라 착각한 뒤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 될 여자를 범하기 직전에 누군가에게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어졌다. 그래서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은 이곳에서 분노가 가득한 어투로 당당하게 소리를 쳤다.
하지만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치며 여자를 범하기 직전에 나타나 자신을 발로 찬 사람인 재희의 얼굴로 시선이 올라가게 되자 뚱뚱한 남자는 순간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뭔가 상당히 익숙한 패턴에 재희의 인상은 여기서 더더욱 찌푸려졌다. 당연하게도 남자의 눈이 재희의 얼굴에서 멈춰 서서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오, 오오! 히로인! 메인 히로인! 메인 히로인이 확실할 정도로 엄청 예쁘다! 그리고 은발! 적안의 미녀다! 오오오옷! 저 여자보다도 예쁘다!"
사이비 종교에라도 빠져버려 광신도라도 된 그것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자 재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대 맞고 나니 결국 미쳐버린 것인지 추잡스러운 얼굴에서 역겹게 미소까지 띠며 재희에게 달려들었다.
"역겨워......"
원래 남자였던 재희가 같은 남자에게 탐욕에 물든 눈빛으로 얼굴과 몸매를 훑어 보이게 되니 불쾌함이 끝을 모르고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을 수가 없는 노릇, 거기에 더해 재희에게서는 이제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사타구니의 어느 것이 힘껏 부풀어 올라와 있다는 게 바지 위로 율곡이 지자 결국 재희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커, 커헉?!"
뚱뚱한 남자가 눈으로 보고 머리로 판단을 내리지도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가방에서 칼을 뽑아내 곧장 뚱뚱한 남자의 목에 일자로 그어버렸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두 눈이 크게 떠진 뚱뚱한 남자의 다리가 서서히 멈춰 섰다. 뚱뚱한 남자는 몸과 다를 바 없이 살이 가득 찬 손으로 재희가 그어버린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아, 아아.....?"
손을 가져가기 무섭게 반응하듯 목에는 일자로 붉은 선이 생겨나며 피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내려 보아도 목에 난 상처를 거울이 없으면 볼 수 없었지만 뚱뚱한 남자는 자신의 목을 만져본 자신의 손에 피가 묻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재희가 칼로 목을 그어버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믿기지 않는 얼굴로 원망이라기보다는 대체 왜 그랬냐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히로인도 아니고 자신의 메인 히로인일 게 분명한 재희가 주인공인 자신에게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자신의 목을 칼로 그어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은 뚱뚱한 남자는 그제서야 목에서 엄청난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새 된 소리를 내며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뒷걸음도 얼마 가지 않아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쌔액쌔액 하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뚱뚱한 남자. 그러다가 얼마 후, 숨이 멈춰 버렸다. 아직 죽기에는 이른 시간. 아마도 과다출혈로 죽기 전 쇼크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
"쯧......"
동정? 불쌍함? 그런 건 재희에겐 없었다. 재희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탓에 피가 조금만 튀어도 확실하게 티가 나 버리는데 잠시 이성을 잃고 목을 베어버렸으니 그대로 목에서 나온 피의 상당수가 재희의 백옥 같은 피부와 원피스에 튀어버렸다. 이것마저도 더럽다고 생각한 재희는 가방 안에서 물을 꺼내 조금씩 부어가면서 박박 닦아 보았지만, 부질없이 피의 흔적은 번질 뿐이었다. 그럴 때.
"가, 감사합니다."
여자의 고운 목소리가 재희의 귓가를 살랑살랑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