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009 튜토리얼 (9/140)



〈 9화 〉009 튜토리얼

"뭐래 병신이."


김유한이 죽게 된 원인은 순전히 재희 때문이라고 말하며 따져 든다 해도 뭐라 변명할 길이 없었을 정도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 어차피 김유한을 버리는 말로 쓰기로 했었고, 치명상을 입기 전에 이미 살인에 익숙한 남자와 싸워 100이면 100으로 이길  있을 거란 확신이 뒤늦게 들어도 재희는 그저, 방관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온 결론. 너무나도 하찮은 싸움. 김유한이 상대인지라 남자도 큰 걱정 없이 모든 힘을 다 쏟아붓지는 않았었겠지만 그래도 재희에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보였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공부만 했던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는지라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이상하게도 둘의 싸움에 어린 애들의 귀여운 싸움을 보는 것처럼 지루함이 극에 달했다.

김유한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남자는 대충 사람을 상대로 칼을 사용할 줄은 아는 것 같았는데 굳이 따지자면 입문자 수준. 몸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고 딱딱했으며 동작도 크고 움직이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도 사용했다. 뭐, 몸 전체를 사용해도  문제는 없는데 만약 1대1의 상황이 아니라 다수와 싸우는 상황에선 쉴 틈이 없게 되니 효율적이지 못한 움직임이다.

그래서 확신할 수가 있었다. 재희가 남자에게 겁을 먹고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이런 확신이 섰더라도 만약을 대비해서 나서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김유한을 계속 살려두어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고 판단해 재희는 마치 이곳에 없었던 사람처럼 김유한에게로 온 신경을 주고 있는 남자의 목덜미를 향해 칼을 빠르고 정밀하게 휘둘렀다.


스걱. 하는 소리와 함께 재희가 휘두른 칼은 아주 미세한 소리만 남긴 채, 남자의 목덜미를 깔끔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 때문에 남자는 순간적으로 목에서 느껴진 이질적인 감각에 뒤를 돌아보며 목을 부여잡았지만 이미 머리와 몸은 분리가  상태. 결국, 남자는 목을 잃어버린 귀신과 같은 기기괴괴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목에는 근육이 많지 않아서 다른 부위에 비해 비교적 약하다지만 굵은 뼈가 자리 잡고 있어 그래도 이리도 쉽게 작은  하나로 절단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이것도 실험의 결과이겠지."

재희의 몸에 이루어진 실험이 어떤 종류의 실험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발달 된 오감과 신경. 그리고 싸움과 살상 능력만으로 전투에 관한 실험이라 대충 추측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증거로 요리를 할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 용도로 칼을 집었을 때는 익숙한 감각이 들었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베어내야  부위가 보이며, 그에 따른 적당한 힘과 기술로 팔을 휘두른 것까지.


"나는 인간이... 아닌가?"

재희는 칼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는 묻어있는  아니었지만 남자의 목덜미를 베느라 어쩔 수 없게 칼날에 살점이 존재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해, 자신의 손이지만 마치, 살인마의 손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 그러나 팔의 굵기나 근육량, 마지막으로 새하얀 피부색으로는 전혀 살인마의 팔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연약한 여자의 손이 우연히 사람을 죽인 칼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후우......"

자기도 모르는 이질적인 자신의 모습에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가득 찬 숨을 길게 내뱉으며 칼을  손을 탈탈 털어보았다. 그런데도 다 떨어지지 않는 살점들. 그렇기에 손을 높이 뻗어 나뭇잎을 하나 떼어서는 그걸로 칼날을 닦자 어느 정도 해결이 된듯싶어 칼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이젠 시체가 되어버린 김유한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 오히려 잘된 일이지.“

자신이 이렇게 살인에 거부감이 없으며, 시체를 처음 보았는데도 구역질은커녕 아무렇지도 않다는 생각에 오히려 이게  잘된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야 그럴 것이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이지 않고선 도저히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굳이 살인에 익숙해지기 위해 차근차근 살인과 시체의 모습에 적응해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하나만으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특전을 받고 게임을 하니 다행이었다.

재희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시간이 지난다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될 게 분명하다고 혼자 납득을 하며 애써 시체 두 구에서 시선을 돌려 마치, 버려진 듯, 외롭게 홀로 있는 한 가방으로 걸어갔다. 우선은 김유한의 가방. 재희는 원래 자신의 거였던 것마냥 거침없이 지퍼를 열어 안을 살핀다.

예상대로 재희의 가방에 들어있는 물품 구성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지금 눈여겨볼 건 다름 아닌 물과 식량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김유한에게 지금 남아있는 물과 식량이 어느 정도 있냐고 물어볼 기회가 없었던 터라 알지 못했었던 것이지만 김유한이 가끔 물을 입에 넣었을 때를 보아선 대충 어림잡아 물  병과 절반 이상이 남은 물병이 가방 안에 자리 잡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한 병이 없네. 그리고 식량도 내일 아침쯤이면 끝이고."


김유한이 어지간히 생각 없이 재희와 만나기 전에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워버린 건지 재희의 가방에는 물병이 두 개가 들어있는 반면에 김유한의 가방 안에는 물이 절반밖에 없는 물병과 오늘이 지나면 내일 당장 먹을 게 없어 보이는 빵의 모습이 반겨주고 있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김유한의 가방 안에서 식량이 얼마 없다고 아쉬워하기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그야 아직 보물창고와도 같은 남자의 가방을 열어보지 않았으니.

"오호라...? 많네? 이놈은 여기서 대체  명이나 죽인 거야?"

가방을 겉으로만 보았을 때도 뭔가가 많이 들어있는 것처럼 빵빵했었는데 안을 열어보니 재희의 기대를 헛되게 하지 않듯 빼곡하게 물과 식량의 모습이 보여오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으로 힐끔 안을 훑어보자 물은 최소 10병 이상. 식량도 물과 비슷할 정도인지라 아끼고  아낀다면 족히 한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재희의 입꼬리는 귀에 걸릴 정도로 길게 늘어졌다.


최소 5명 이상... 아니, 김유한까지 포함하면 6+n이라는 공식이 세워진다. 한순간에 먹을 걸 많이 얻어 마치 부자가 된 기분이었지만 이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기 전에 한 가지 의문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의문은 다름이 아니라 남자는 대체 어떻게 이 짧은 시간 동안 6명 이상의 사람을 죽여온 것일지.

재희가 눈을 뜨고 이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시간은 대충 2시간 남짓이다. 길다고 생각하면  긴 시간일 것이고, 짧게 생각한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런 시간 동안 한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여섯 명이나 죽이는 게 가능이나 할까. 동료도 없이 홀로...? 비쓰온 게임이란 정신 나간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몇 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만난 사람이 김유한과 이 남자라는 사실만으로 사람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가 있는데.

"그럼... 도중에 넣어진 건가?"


두 시간 안에 여섯 이상의 사람을 죽인다는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조건이 따라붙는다. 일단 첫 번째 조건은 천운이 따라주는 것. 두 번째 조건은 동료가 있는 것, 세 번째 조건은 이곳 사람들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 지금 생각해 보아서는 이 세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김유한이 가방 안에 들어있던 물과 식량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이미 답은 도출되어 있었다. 세 가지의 조건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재희는 그저 게임이 시작된 후, 다른 이들보다 뒤늦게 참가하게 된 것. 이 가설이라면 남자가 가지고 있는 물과 식량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이해가 되는 사항이다.


만약 아니라면 배틀 로얄인 장르의 실제 게임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게만 되니, 그럴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해서 투입하는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든, 시작하지 않았던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김유한이 가지고 있던 물과 식량을 남자의 가방에 옮겨 담은 뒤에 어깨에 들쳐 맸다.


여자가 되기 전 남자였다면 보기보다 상당히 무거운 가방의 무게에 골골대었을 텐데 지금은 전혀 무겁지가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가볍다는 생각까지 들어오자 정말로 신체 능력이 말도  되게 좋아진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다만 무겁고 커다란 가슴과 적응이 되지 않는 낮아진 눈높이,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골반의 존재는 신경이 쓰였다.

"일단... 갈까.“

하늘에 떠 있는 해는 처음 보았을 때와 다르게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재희가 지금 아무리 강해진 몸을 가지고 있다 한들 피로에 찌든 몸을 쉬게  줄 생각으로 잠을 자는 상태에서 언제 어디서 기습을 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여긴 원래 그런 곳일 테니. 그렇기에 먹을 거리는 충분하니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는  급선무다.


무기라곤 자신의 몸과 모두에게 지급되는 초기 물품 중에서 나온 작은 칼뿐이다. 나머지는 직접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현대에서 가장 위험한 무기인 총은 지금 이곳에 없을 거란 추측을 할 수가 있었다. 아직 정보가 적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확률이 무척 높았다. 솔직히 배틀 로얄에서 총이 웬 말일까. 일반인들은 제대로 쏘지도 못할 텐데. 그러니 총은 없다는 전제하여 재희는 조금 무리를 해 볼까 생각한다.


뒤늦게 게임에 참가 되었다면 이점은 확실히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은신처라는 문제점이 발목을 붙잡는다. 얼마나 있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굳이 좋은 자리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치는 멍청한 선택을 할 사람은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 다니느라 옷이 많이 더러워진 남자에 비해 김유한의 옷은 그리 더러워 보이지 않아 지금은 게임 초반의 단계라는 생각을   수가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가방 안에는 여벌 옷은 지급되지 않았으니. 그리고 초반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상적인 생각을 하는 한 사람이 자신이 리더가 되어 사람들을 모아 무리를 지어 하루하루를 생존해 나가고 있다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아직 초반이니까. 식량은 적어도 걱정은  뿐이지 지금 당장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주리지는 않으니까.


"그럼 올라가는 게 낫겠지."


만약 재희가 평범한 그들이었다면 갑작스럽게 이 정신 나간 게임에 갇혀 살인을 독촉당한다면 어떤 행동을 보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준을 낮춰 보니 우선은 아래로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유는  위쪽으로 가면 갈수록 추워지며 며칠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래쪽보다 추운 대신 물이 고여 있을 확률도 있고, 추위에 피해서 내려간 사람이 추위를 견디려는 사람보다 많을 테고.

거기에 더해 초반이란 걸 감안하면 사람의 심리상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아래로 내려갔을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재희라도 먼저 아래로 내려가 상황을 살펴보았겠지만, 김유한이 했던 말. 이곳이 섬이라는 말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위를 향한다는 선택지를 내비친 거다. 그렇기에 법과 질서가 없어 언제라도 순하고 착한 양이 늑대로 변해도 전혀 이상할  없는 이 상황에서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다.

뭐, 기술자가 있으면 어떻게든 나무를 깎아 엮어서 배를 만들 수야 있을 테지만 얼마나 많을지 모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들기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의  배를 만들 수는 없으며, 만든다고 해도 배가 완성하기도 전에 이미 물과 식량의 부족으로 애써 바로 잡아놓은 질서가 무너져 굶주림에 살생이 이루어진다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한 결과다.


"이미 대비는 해 두었겠지. 병신이 아닌 이상에야."


노예 제도나 사람 간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다 잡혔다고 말할  있는 21세기의 세계에서 대놓고 차별이라는 웃음으로 넘길 문제가 아닌 유흥용으로 죽어도 상관없는 말로써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재희를 완벽한 여자로, 그리고 신체 능력도 전과 비교되지, 않게 좋게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자들이 멍청하게 게임 참가자들이 섬을 나와 도망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했다.


재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목표는 없다. 그저 눈으로 보기에는 경사진 곳을 올라가는 것뿐. 그러나 재희의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서게 되었다. 왜일까. 생존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야생 동물이나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아닌데.

"하... 거슬리네. 그냥 벗어?"

재희는 몸 밖으로 빠져나간 땀에 젖어 피부에 찰싹 달라붙은 새하얀 원피스를 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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