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008 튜토리얼
힘겹게 고개를 쳐올린 김유한의 눈에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재희에게 다가가서는 바지와 속옷을 내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흉측하고 더러운 좆을 정성껏 빨라고 말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말로만 다치게 하기 싫다고 하지만 강간을 당한다면 몸은 상처가 없을지언정 정신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외모에 의해 첫눈에 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랑이라 생각하는 김유한은 잠시 뒤, 저 아름다운 육체가 더러운 남자의 손에 때가 타서 더러워진다고 생각하니 생전 처음으로 커다란 분노를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빚을 지고 빚쟁이들에게 맞을 때도,
도박에 중독이 되어버린 김유한을 버리고 떠나간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도, 돈을 따자 다가왔던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돈을 잃게 되자마자 그 직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 취급하듯 떠나갔을 때도 이 정도의 상심하지는 않았었다. 어차피 이곳이 그런 곳이니까.
"움직여...! 제발 좀 움직여 달라고!"
김유하는 분풀이를 하듯 분노가 가득하면서도 애타는 목소리로 외쳐 보았다. 이 말을 누구에게 하는 말인 걸까. 어서 자신의 것을 빨라고 재촉을 당하고 있는 재희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바닥에 엎어져서는 고통에, 공포에 떨기만 할 뿐이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자신의 망할 두 다리에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학...! 하악.....!"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고통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으면서 피를 꽤 많이 흘려 머리도 어지럽고, 공포와 고통에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 있는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래도 지금은 자신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재희가 끔찍한 일을 당하기 전에......
"꺼져어엇!"
"하아... 더럽게 끈질기네. 너 대체 밖에서 뭘 하고 왔었기에 칼에 찔렸는데 자꾸 그러냐?"
"하아... 하아... 꺼져...! 재희 씨에게서 꺼져. 꺼지란 말이야!"
"시발... 존나 귀찮네."
남자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지금 김유한에게는 전혀 들려 오지가 않았다. 단지 재희를 지키기 위해서 무슨 말이라도 하며, 부질없는 짓이지만 유일하게 남자에게 위협이 될 만한 칼을 집어 들고선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김유한의 모습에 남자는 인상을 한없이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박박 긁었다.
"좀 즐기려고 해도 계속 지랄이네. 아... 맘 바뀌었다. 그냥 죽일란다. 그리고 재미를 천천히 보지 뭐."
임자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사랑하는 남편, 애인, 가족의 앞에서 무참히 강간해 단란한 가정을 짓밟으며 그에 따른 반응을 즐기는 것에 더 큰 쾌락을 느끼는 남자였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남자가 보기에는 이 섬에 꽤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으며, 자신과 비슷하게 살인이 익숙한 인간들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없기에 재희라는 여자를 김유한의 앞에서 강간한 뒤에 재희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뜰 생각이었으며, 재희라는 여자를 맛보고, 가지게 된 이상. 다른 여자들은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게 분명할 것이라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김유한이 보는 앞에서 재희를 강간해 기분 좋은 절망을 느낄 생각이었는데 끈질기게 저항하는 이 새끼 때문에 보기보다 많은 시간이 잡아먹혀 버렸다.
"시끄럽게. 계속 지랄이야."
둘의 사이는 그리 깊어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이나마 함께 지낸 시간이 있어서 만족할 정도의 절망을 뽑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김유한의 반격. 포기하지 않고 자꾸만 소리를 내지르며 덤벼들어 남자의 짜증을 돋우고 있었다.
"그래. 덤벼 봐. 더는 일어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 줄 테니까."
기쁨을 만끽할 시간을 근본도 없는 새끼 때문에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남자도 적잖이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아까 전과는 다르게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지 처음으로 이 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의 피가 여전히 묻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칼을 뽑아 들었다.
"마침. 이것도 바꿀 때가 된 것 같은데."
"......"
김유한은 이를 강하게 깨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재희에게 완전히 홀릴 대로 홀려버린지라 김유한은 움직임을 거부하는 자신의 몸에 채찍질해대며 천천히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아아아악!"
칼을 내려치면 남자의 몸에 닿아 살갗을 찢을 사정거리에 도달하리라 생각하며 김유한은 큰 괴성과 함께 남아있는 모든 힘을 쥐어 짜내어 팔을 내렸다.
"끝이야?"
"끄윽...! 끅!"
그러나 남자가 막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행동과 눈에 띄는 한심한 공격. 그래서인지 김유한의 팔은 생각한 것처럼 다 내려가지 못하고 도중에 팔을 붙잡혀 움직임이 봉쇄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유한은 유효한 타격을 먹이기 위해 없던 힘을 모두 끌어모았는데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으아아악!"
뒤이어 들려오는 비명소리. 김유한은 붙잡힌 팔이 괴물 같은 악력에 의해 짓뭉개자는 고통에 그만 칼을 놓쳐버렸다. 그렇게 또다시 주인을 잃고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칼.
"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결과가 너무 뻔한 결과이지 않냐?"
너무나도 뻔한 결과에 남자는 황당함을 느꼈다. 그만큼 김유한이 굳이 멀쩡한 상태도 아니었고 설령 컨디션이 아주 좋은 상태였어도 승산은 전무 할 터인데 끝까지 덤비는 모습에.
"커헉!"
남자는 김유한의 팔을 놓아주자마자 반대편 손에 들려 있던 칼을 이용해 김유한의 배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고통에 물든 표정으로 김유한은 남아있던 힘까지 거덜이 나 다시 무릎을 꿇으며 이마를 흙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학...! 하악!"
비명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것이라곤 바람이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아파? 많이 아픈가 봐?"
"하아악!"
"나는 느껴보지는 못했는데 내가 들은 말로는 엄청나게 아프데. 근데 그거 알아? 사람은 보기보다 생명력이 끈질겨서 겨우 그 정도로는 잘 안 죽어. 그러니까 그러고 있어. 네가 고통을 쉴 새 없이 느끼다가 그러고 있던 널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죽여줄 때까지 말이야."
상상은 하기 싫고 말로만 들어도 끔찍한 결말을 내뱉으며 남자는 미소 지었다.
"원래라면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지 않고 묶어두고선 남의 것이었던 여자들을 범하며 반응을 즐기는 나였거든? 지금도 그러려고 했고, 하지만 넌 선을 너무 넘었어."
"끄으윽!"
"그러게 왜 덤벼들었어? 어차피 아는 사이도 아닌데.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목숨을 버릴 필요까지 있나?"
"으아아악!"
"쯧... 병신이."
그렇다. 김유한은 병신이었다. 김유한 자신도 자기가 병신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여자... 재희를 위해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목숨을 버린다는 것에. 이런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에 병신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김유한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이 정신 나간 게임에서 김유한이 살아남을 확률은 지극히 0에 수렴하고 있었다. 그러니 말을 돌려서 말하자면 죽음을 코앞에 둔 김유한이 재희를 통해서 그 죽음이 앞당겨 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럼에도 김유한은 고통에 몸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어도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나... 남자... 다웠으려나?'
그 이유는 바로. 도박에 빠져서 돈을 많이 벌었을 때만 돈을 목적으로 여자가 다가왔던 자신의 인생 속에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진정한 남자의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사실은 죽기 싫었다. 하찮은 인생이라도 더더욱 살고 싶은 마음으로 굴뚝같았지만 이미 늦었는지 의사가 아닌 김유한이 보기에도 지금 자신의 몸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말했듯이 인간이 보기보다 생명력이 질긴 게 사실인 것처럼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원망스럽게도 지금 당장은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고통을 죽기 직전까지 느끼며 어서 죽기를 기다리는 미래가 남았겠지. 팔과 다리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지라 자살이라는 선택지도 어려워 보였다.
"아니야... 안 죽어... 난 안 죽는다고!"
김유한은 생각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바로 앞에 있어서 그런지 왜인지 모르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물로 씻은 듯 사라졌다. 그리고 칼에 찔린 고통? 그따위쯤은 죽음보다 너무나도 가벼운 존재라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힘없이 바닥을 기고 있는 김유한을 내버려 두고 다시 재희에게로 걸어가고 있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신은 정말 있었는지 전혀 움직일 수 없을 거라 생각되던 김유한의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초인의 힘까지는 내려주지 않았는지 여전히 없던 힘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들고 남자의 몸에 칼을 박아 넣었다. 힘이 없었지만, 칼날이 아주 날카로워서 남자의 살갗을 부드럽게 파고들어 칼날의 모습이 완전히 감춰졌다.
"크아악! 이, 이 씨발 새끼가아아아!"
뺨에 고통이 찾아오고 고개가 돌아간 김유한은 나무에 몸이 강하게 부딪쳤다. 하필 상처 난 곳으로 부딪쳐 이젠 정말로 힘이 다 빠져 주르륵하고 나무에 기댄 상태로 쓰러졌다.
"씨발... 씨발!"
남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마구 표출하며 등에 박힌 칼을 빼내었다. 등에 박힌 칼날에 잔뜩 묻어있는 새빨간 피. 그리고 그 피와 같은 색의 얼굴을 짓고 있는 남잔 성큼성큼 김유한에게 다가왔다.
'하하. 그냥 혼자 도망갈 걸 그랬나 봐......'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이렇게나 남자의 시선을 끌었음에도 아까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재희의 모습에 김유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의미 없는 죽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으로 인해서 말이다. 하지만 원망은 없었다. 오히려 재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적어도 병신, 호구 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사람으로서 죽는 것 같았으니. 그래서 김유한은 성큼성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부디 빠르게 끝내주기를.
"별거 아니었네. 괜히 걱정했어."
모든 걸 받아들이고 한순간의 고통과 함께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김유한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상처가 나 있는 몸에서 고통이 느껴졌지만 새로운 고통은 추가되지 않았으며 제3자의 목소리가 귀를 강타한 후에 김유한의 앞에서 무언가 털썩 쓰러졌다는 걸 느꼈다. 그 때문에 당혹스러운 마음에 황급히 눈을 떠 보자 도저히 믿기지 않은 광경이 펼쳐져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김유한을 완전히 죽이려고 다가오던 남자의 거대한 몸이 중심을 잃고 김유한의 바로 앞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물론이며, 영화나 비현실적인 만화에서만 볼법한 몸과 머리가 떨어져 있는 모습에 경악했다. 얼핏 보아도 반듯하게 잘려나간 머리의 모습에 김유한은 제3자의 목소리. 남자의 것으로 생각될 수 없고 기억에 남아있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면서 지금 김유한을 내려 다 보고 있는 그녀에게 눈을 가져갔다.
"아...? 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잠시 뒤에 상황을 이해한 김유한은 그저 헛웃음을 내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애초에 자신이 나서지 않았어도 되었다. 겁을 먹고 재희를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도망을 쳐 보아도 될 문제였다.
"크, 크큭! 쿨럭쿨럭! 푸하하하!"
마치 실성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리다가 마지막에 피가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런 김유한의 모습이 너무도 잔인했던 것인지 아니면 더러웠던 것인지 알게 모르게 재희는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김유한은 자신을 바라보며 짓는 그런 재희의 모습조차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죽음이 바로 앞까지 닥쳐오던 그때. 왜 재희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분노나 원망,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들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오직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밖에 존재하지 있지 않다는 진실에, 정말이지 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호구 같은 병신 그 자체가 아닐까 했다.
그리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처럼. 김유한도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한 번 호구는 영원한 호구이기 때문에, 그리고 피를 많이 흘려버렸기에 이미 살 가능성은 희박했다. 점점 몸의 감각도 이상해지는 것이 이제 정말로 죽음이 코앞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전신을 장악해 나가자 용기를 내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두렵지도 않았고 죽기 직전이니 겁도 먹을 필요도 없어서.
"재, 재희 씨. 정말 조, 좋아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쿨럭...! 하아... 하아... 그때부터 좋아했습니다."
호구였다.
병신이었다.
김유한이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이유가 호구와 병신이 공존하는 자신의 탓이기도 했는데 실질적으로는 재희의 탓이 상당히 큰 것도 사실이었는데도 김유한은 원망은커녕 고백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단지... 김유한은 재희를 위해 이 한 몸을 내다 바친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뭐래 병신이."
'아... 역시인가? 그렇지. 나 같은 놈을 대체 왜 좋아하겠어? 그것도 재희 씨가.'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오히려 이게 더 낫다는 생각하는 김유한이었다. 아무 능력도 없었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남자를 여태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재희가 대체 왜 김유한에게 사랑에 빠지겠는가. 함께 있었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는데. 설령 재희가 김유한을 좋아하게 되었어도 곁을 지켜줄 수 없으니 차라리 이게 다행이었다. 같은 마음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헤헤......"
김유한은 쑥스럽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재희의 아름다운 얼굴을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은 뒤에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서 그녀를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신께 기도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