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006 튜토리얼
"저, 저 남자예요! 사람을 죽이고 가방을 가져갔다던 그 사람이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경악하며 소리치는 김유한.
'흠... 호구가 기겁할 만하네.'
재희가 들은 비명소리의 주인으로 생각되는 비리비리한 남자의 시체를 곁에 두고 가방을 뒤지고 있는 짐승과도 같은 남자의 모습이란. 김유한이 보기에는 겁을 먹을 수밖에 없는 비주얼이었다. 아니, 평범한 대학생이었다가 여자로 변한 재희에게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이상하게도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가 된 이 신체로 싸워보고 싶다고나 할까나.
아무튼. 비명소리를 듣고 왔을 때는 이미 늦었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온몸이 난도질을 당해 죽어있는 남자의 잔인한 모습에 김유한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야 그럴 것이 실제로 배 속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핑크빛 장기를 보면 경악보다는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속을 게워내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으로서 당연하겠지만 재희는 그 모습을 보아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재희는 시체에 짓궂은 장난까지 쳐 놓은 남자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지가 괴물이라도 되는 줄 아나?'
사람의 피부 중에 꽤 부드러운 팔뚝과 허벅지에 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과 가방을 뒤지고 있는 남자의 입가 주위에 피가 튄 거라고 보기엔 어려워 묻혀 있다고 해야 맞을 것만 같은 모습에 재희의 고운 미간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지기 시작한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건가?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르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량이 줄어들 거고, 그렇다면 나중에 원치 않아도 살려면 인육을 해야 할 사태를 대비해 미리 맛본 걸 수도.'
재희의 가방 안에 있는 식량은 얼마 없고 아껴 먹는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드는 건 분명하기에 무조건 빼앗아 먹는다는 전제만을 깔았다가는 나중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소지품에서 식량이 다 떨어져 빼앗을 것도 없어진 나머지 무얼 해도 굶주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재희는 숲을 걸으면서 좋아진 눈썰미로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건만 먹을 만한 건 전혀 없었고 그 대신 본능이 먹으면 위험하다 아우성치는 열매나 버섯들은 종종 발견되었다.
즉, 이곳엔 먹을 거란 오직 물에서만 나온다는 뜻이 되었다. 그것도 제대로 확인을 해 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추측해 볼 수 있는 게 고작 이것뿐이었다. 아니면 먹질 못할 독이 있는 열매를 맺는 식물이 많게 분포해 있고 먹을 수 있는 열매는 맺는 식물은 그와 반비례하게 아주 극소수의 식물만 이 섬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어 보인다. 그래도 지금은 그런 식물들이 없다는 전제하에 생각을 가지며 생존에 임해야 했다. 저 남자처럼 인육을 고려하듯.
"도, 도망쳐요. 재, 재희 씨. 이길 수 없을 거예요!"
재희는 이런 김유한의 말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한눈에 보아도 사람을 죽이는 게 익숙해 보이며 김유한과는 다르게 근육이 즐비한 진정 남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저 사람을 비실비실한 체격의 김유한과 남자도 아닌, 여자가 된 재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말이다. 아직 몸에 익숙하지 않아 싸움은커녕 제대로 움직이기도 벅차오르는 몸 상태임에도 왠지 저 남자를 쉽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선다. 그 때문에 재희는 보란 듯이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어주며 일부러 바삭바삭한 나뭇가지를 힘차게 짓밟았다.
파직!
"응? 누구냐?"
"이, 이런...! 들켰어요. 재희 씨! 도망쳐야 해요!"
재희가 밟은 나뭇가지는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소리를 내며 고요한 숲 전체로 울려 퍼지자 남자는 가방을 곧장 가방을 내려놓은 손에 칼을 쥐며 소리가 난 곳, 재희와 김유한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가져왔다, 그냥 이대로 없는 척. 몸을 그대로 숨긴 채로 침묵을 유지하거나 다짜고짜 도망을 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다면 남자는 우리가 자신을 일부러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라 생각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멍청하게 졸졸 따라오지는 않겠지.
이것이 머리가 살짝 돌아간다는 사람이 내릴 판단이었다. 누군지도, 몇 명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자신만만하게 숨을 곳이 많은 곳으로 유인당해 줄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김유한처럼 진정으로 당황하며 소리치는 모습은 남자가 안심하고 둘의 뒤를 쫓아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증거로 남자는 경계하는 태도를 싹 지운 채, 피라미들이라 생각하고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자?"
그러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허리 부근까지 늘어뜨린 여자인 재희의 모습을 발견하자 남자의 두 눈이 커져만 갔다. 왜냐하면, 남자가 이곳에 와서 죽여 버린 많은 사람 중에 여자라는 성별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오랜만에 뒤탈 걱정 없이 법이 없는 이곳에서 여자를 안아볼 생각에 기쁨으로 가득 찰 무렵. 재희의 얼굴을 본 남자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
대체로 예쁜 여자나 남자를 보게 된다면 속으로 엄청 예쁘다는 말을 하거나 사귀고 싶다. 안고 싶다 등. 온갖 욕망이 생겨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재희를 본 남자는 김유한이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운 나머지 그 어떠한 생각도 가지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만약 재희가 움직이지도 않고 누군가가 남자의 사고를 되돌려주지 않았더라면 움직이지 못했을 상황.
"재희 씨! 지금 당장 일어나셔야 해요!"
나뭇가지를 짓밟고 잔뜩 겁을 먹은 듯. 움직이지 않는 재희를 향해 김유한이 소리치지 않았으면 남자는 다음 행동을 이어나가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이거... 대박인데?"
"큭...! 죄송해요 재희 씨!"
감탄을 내뱉으며 남자가 다가옴에 따라 김유한은 다급하게 도망쳐야 한다고 소리를 쳐 보았는데도 재희의 몸은 움직일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실례가 된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남자에게 능욕을 당하는 재희의 모습을 두고 볼 수도 없기에 김유한은 재희의 손목을 낚아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도망치려고 했다.
"크악!"
그러나 이런 상황까지 이미 예상을 끝마쳐둔 재희는 남자에게 시선이 팔렸을 김유한 몰래 그의 바로 뒤편 흙에다가 물을 조금 부어 축축하게 만들고선 그 위에 나뭇잎을 여러 개를 올려두었다. 그로 인해 그걸 밟아버린 김유한은 마치 만화에서나 볼 법한 자세로 미끄러져 넘어졌으며, 넘어지기 직전에 재희는 김유한의 손에서 자신의 팔목을 슬며시 빼내었다.
누가 본다면 혼자 당황해서 넘어진 꼴. 웃길 법한데도 불구하고 남자의 눈은 오로지 재희에게로 가 있었다. 음흉한 시선을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전신이 훑어지자 재희는 씻을 수 없는 불쾌감에 몸서리를 쳤다. 마음 같아서는 칼을 빼내어 저 더러운 눈알에 꽂아 넣고 싶은 상황. 그러나 아직 재희가 나설 때는 아닌가 보다.
"으윽...! 재, 재희 씨...! 도, 도망가요! 제가...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볼 테니까요!"
넘어진 충격으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오늘 처음 본 재희를 버리고 김유한은 혼자 도망갈 생각을 대체 왜 하지 않는지. 의미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여자인 재희를 능욕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역겨운 저 남자에게서 지켜내기 위해.
'흐응...? 그 말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네?'
재희는 김유한을 다시 보게 되었다. 계획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요소가 돌변했으니까. 원래라면 김유한이 살기 위해서 재희를 버리고 홀로 도망칠 거라 생각했건만. 꽤 남자답게 여자의 앞이라고 맞서 싸울 생각을 하니 기특했다. 그런데... 그러면 뭐가 달라지기나 할까. 재희는 슬금슬금 꺼내기 쉬운 곳에 있던 칼로 향하던 손을 멈추고는 이내,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두었다.
"여자 앞이라고 남자인 척은. 그냥 혼자 도망가지? 어차피 네가 날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냐? 그리고 여긴 나만 있는 게 아니야. 저년 혼자서 도망쳐 봤자 조금 시간을 번 것뿐이지 나랑 마찬가지인 인간쓰레기들에게 덮쳐질 게 분명한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거지?"
아직 재희와 김유한과의 거리가 있는 상황. 그래서인지 남자는 지금 당장 도망가지 말라는 듯이 말로 잘 구슬리면서 서서히 거기를 좁혀왔다.
"오히려 내 여자가 되는 게 좋을 텐데? 솔직히 내가 착한 새끼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여자가... 아니, 저 여자. 재희에게는 잘 대해줄 자신이 있다고? 그리고 난 남에게 빼앗기는 걸 정말 싫어해서 공유도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냥 저 찌질한 병신을 버리고 내 여자가 돼라. 여자도 많이 안아 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느끼게 해 줄 테니까."
"안 돼...! 그것만은 절대 안 돼! 그런다고 달라질 게 없잖아?! 네 곁에 있어도 지옥일 텐데!"
"아니지. 나는 정말 잘해 줄 거라고? 지금 혼자 도망쳐 봤자 여자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게? 한두 명에게 덮쳐지는 게 다행이지. 여러 명에게 쉴 새 없이 덮쳐져 봐. 그제야 그때 내게 안겼어야 했다고 늦게나마 후회를 안 하지. 안 그래?"
남자가 재희를 향해 눈을 가져가며 미소 지었다.
"닥쳐...! 닥쳐! 재희 씨! 도망가요! 도망가라고 윤재희!"
설마 저 헛소리에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진 김유한은 반말까지 섞어가며 소리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왜...! 도대체 왜 도망가지 않아......"
무슨 말을 해 보아도 도망치지 않는 재희의 모습에 김유한은 두 다리와 칼을 쥔 손이 공포에 벌벌 떨려 와도 두려움보다는 원망이 생겨났다. 처음부터 도망을 쳤으면 둘 다 살 가능성이 커 보였는데 이러면 둘 다 죽는 게 확정 된... 아니, 김유한 혼자 죽고 재희는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남자에게 능욕을 당할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김유한은 남자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자고.'
재희가 도망가지 않는 이유. 그것은 아주 간단했다. 싸움이란 걸 멀리하고 공부만 했던 재희였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저 남자와 싸워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실험... 그 망할 실험으로 인해 여자가 되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 몸도 다른 사람의 걸 억지로 조종하는 듯, 많이 어색함이 느껴지긴 하는데 그래도 얼마나 강해졌을까.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충동이 전신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굳이 스스로가 위험에 빠질 필요가 없었다.
내 몸이면서도 내 몸 같지 않은 몸 상태. 이길 확신이 들어도 불안함이 엄습해 오지만 재희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 김유한은 벌벌 떨리는 손에 칼을 쥐며 내 앞에 서서는 남자를 막아섰다. 재희가 만약 진짜 여자였다면 순간 호감도가 미친 듯이 상승했을 수도 있겠는데 재희는 원래 남자였으며, 여자가 되었다고 한들 남자가 좋아지진 않았다. 지금까지는. 아무튼, 이 상황을 잘 이용하기로 하고, 김유한과 곧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게 될 남자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기로 한다.
"저리 꺼져어어엇!"
김유한은 서서히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아무렇게나 칼을 마구 휘둘렀다. 아무리 나약한 인간일지라도 칼을 든 상태라면 무술을 배운 사람이라고 방심은 금물이다. 당연히 조심해야 하는 게 인지상정. 그걸 남자가 모르고 있는 무식한 사람이 아닌 건지. 김유한이 내 뻗고 휘두르고 있는 칼의 사거리의 한 발자국 밖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만하는 게 어때? 재희도 내 여자가 되고 싶어서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닥쳐! 닥치라고!”
“뭐... 너 같은 새끼라도 저렇게 예쁜 여자라면 지키고 싶겠지. 아니 가지고 싶겠지. 그래서 이러는 건 잘 알아. 근데 이걸 어쩌나? 나는 여자를 공유하는 병신이 아닌데. 그것도 엄청 예쁜 여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인심 써서 네가 보는 앞에서 따먹어 주지. 으흐흐.”
이미 김유한은 없는 존재인 것처럼 칼을 마구 휘두르고 있어도 남자는 여유로움을 잊지 않았다. 언제든 김유한을 제압할 수 있다는 듯이. 재희를 바라보며 백태가 잔뜩 낀 혓바닥으로 입술을 훑었다.
“꺼져...! 꺼지란 말이야! 재희 씨에게 털끝 하나라도 손대기만 해봐! 죽여 버릴 거야아앗!”
김유한은 자신의 앞에서 재희를 따먹어 주겠다는 남자의 말이 방아쇠가 되어 힘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었는데 곧 남자의 도발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