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005 튜토리얼
"저... 펴, 편하게 유, 유한 씨라고 불러도 되고요... 되, 되도록이면 오, 오빠나 유한 오빠로......"
끝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그래서 재희는 일부러 뒷말을 못 들은걸로 치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한 씨."
아무리 그래도 한 때는 동성이었던 남자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나마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유한 씨라고, 누가 보더라도 둘의 사이에 선이 그어져 있는 사이처럼 보이도록 부르기로 했다. 어차피 나이도 재한보다 많아 보였기에 형이라고 불러야만 했었으니 유한 씨라고 부르는 건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친근했다.
"아... 네."
보기보다 멍청하지는 않았는지 김유한은 재희의 부름에 오빠로 부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알아차리고 쓸쓸히 웃었다.
"그나저나... 유한 씨. 유한 씨는 이 게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으신가요?"
"네? 아, 그, 그게... 알고는 있긴 하지만... 다, 다 알고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모른다고 해야 하, 하는 게 맞을지도......"
돌아오는 답이 어정쩡하게 머뭇거리는 점이 있는 것을 보아 역시 뭔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재희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잡다한 것인지는 일단은 들어봐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무리 쓸모없는 정보라도 어떨 때는 큰 도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노릇이라 한 번 이 건에 대해 추궁해 보기로 했다.
"그게 뭔가요?"
"제, 제가... 여기서 보, 본 게 있어서요. 아, 아니...! 제가 잘 못 본 거, 걸 수도 있어요."
거짓말이다. 재희는 단번에 김유한은 무슨 이유에선가 어쩌다가 내뱉은 진실을 숨기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야 그럴 것이 노골적으로 재희의 시선을 피하는 두 눈. 삐질삐질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는 땀. 마지막으로 두려움에 물들어 있는 표정까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참고로 멍하니 재희를 바라보았던 처음을 제외하고는 그 뒤로 눈을 못 마주치고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고.
"그래도 알려 주세요."
"......"
반드시 캐내어야 하는 정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기에. 김유한은 끈질기게 추궁을 받을 자신의 앞날을 보고 온 것처럼 포기한 듯.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충격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알았어요. 제가 본 걸 얘기해 드릴게요."
사뭇 진지해진 김유한. 이제는 말에 떨림이 사라지고.
"재희 씨는 여기가... 비쓰온 게임이 무슨 게임을 하는 곳인지 알고 계시는가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단순한 생존게임이지만 생존게임보다는 배틀 로얄로 생각하는 게 현실적으로 이치가 맞았다. 그래서 재희는 비쓰온 게임이 배틀 로얄 장르... 그것도 실제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정신 나간 게임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추측을 그대로 밝혀 보았자 얻는 장점도 없으니 순진무구한 척을 해 보기로 했다.
"아니요. 모르겠어요... 눈을 떠 보니 여기 있었던 것밖에."
"그렇죠? 저도 제대로는 몰라요. 저도 재희 씨랑 마찬가지로 눈을 떠 보니 여기에 있었던 것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 게임에 대해 알 수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이 섬에는 오로지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저희와 비슷한 계기로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그들이나 우리가 이곳에서 해야 하는 건. 한가지라는 것을요."
주먹을 쥔 김유한의 두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며칠 동안 여길 돌아다니면서 제가 안 건데요. 산 짐승도 없고, 식량이 될 만한 것도 물고기밖에 없어서 먹을 게 부족한 상황이에요. 심지어 고기가 잡기 쉬운 것도 아니고, 하지만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걸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고, 빼앗기도 좋은 존재가 있죠. 그건 다름 아닌 우리와 같은 사람들. 비슷한 처지에 놓여 이곳에 오게 된 사람들이요."
재희는 지금 자신이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을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고 아껴서 먹는다면 일주일은 가겠지만 실제로는 3일조차 간당간당한 물과 식량의 존재를. 그 때문에 이곳에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 몰라 김유한을 죽여서라도 물과 식량을 빼앗아 가야겠다는 도저히 일반인의 머릿속에서 나오면 안 될 법한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런가... 서로 뭉쳐서 무얼 하려고 한다 쳐도 식량의 한계가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죽이고, 뺏는 구도밖에 나오지 않게 만들었네.‘
먹을 걸 대체 할 수단이 있다면 배틀 로얄이라는 게임이란 장르가 무색하게 지루한 상황만 자꾸만 연출될 게 분명한데 이러한 문제점을 간단히 해결해 버린 것이다. 주위에 먹을 수 있는 거를 철저히 지운 뒤에 한 사람당 한 명에게 소량의 물과 식량만을 제공해준 뒤에 게임 참가자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굳이 게임에 대한 룰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솔직히 저는 몰랐어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그저 나무를 이용해 배를 만들어 섬을 탈출하는 것만으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연히 들었어요. 그리고 보았어요. 비명이 난 곳에 가 보니 한 남자가 같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있는걸요. 그리고 죽인 사람의 가방을 들고 돌아서는 것까지요."
이걸로 완전히 확실해진다.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진 추측을 했을 뿐인데 김유한의 말만으로 비쓰온 게임이라는 게임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컴퓨터 게임 장르와 같은 배틀 로얄이란 걸.
"......"
"거, 걱정하지 말아요! 제, 제가 재희 씨를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재희가 말이 없자 송사리 같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걱정하지 말라고, 지켜주겠다고 떵떵 소리치고 있었지만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애초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을 테지만.
"고마워요."
"아,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뭘요. 하하."
"그런데요. 여기서 나갈 방법은 혹시 아시나요?"
"그건... 잘 몰라요. 제 생각으로는 최후의 일인이 되거... 아앗?!"
최후의 일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재희를 배신하고 혼자 살아남을 거라는 생각을 재희가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김유한은 당황하며 소리친다.
"최후의 일인이라는 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만약 그렇다고 해도 제가 어떻게든 배를 만들어 볼 테니. 우리 그걸 타고 바다로 나가 봐요!"
"아... 네. 감사해요.""헤헤... 아무튼! 최후의 일인... 이 아니라면 생존자들이 일정 수에 돌입하게 되면 관계자가 직접 나서서 게임을 끝내지 않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컴퓨터 게임이라면 유일한 생존자를 만드는 게 재밌을 수가 있겠지만 그게 실제가 된다면 수백일 수도 있는 참가자들이 한 게임 안에서 다 죽게 된다는 뜻이니 소모품이 너무나도 빨리 빠져나가기 때문에 가장 가능성이 있을 추측은 생존자의 수가 일정 이하로 떨어지면 게임이 종료되는 규칙을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었다. 재희라면 당연히 이런 방법을 채택할 것이다. 사람은 세상에 많아도 계속 보충할 수 있는 수는 적으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런 거지. 분명 다른 방법도 있을 거예요.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죽지도 않은 채로 살아남을 방법이요."
당연하게도 평범한 도박꾼에 빚쟁이였던 김유한이 아무리 살기 위해서라고 한들 한순간에 변해 사람을 죽이고 다닐 리는 만무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유한은 이곳에 오기 전, 사회에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순수하게 이상적인 생각을 가졌다. 재희가 생각하기로는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보여 이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생각을......
"으아아악!"
갑작스럽게 재희와 김유한의 귀를 강타하는 비명. 그로 인해 재희의 두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재희를 지켜주겠다며 떵떵거렸던 김유한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까와 다르지 않게 몸을 떨었다.
"거, 걱정하지 말아요. 재희 씨... 제,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벌벌 떨리는 손을 뻗어 재희의 손을 잡아 오자 재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잡아 온 김유한의 손을 쳐내었다. 그리곤 두 눈을 무방비한 김유한의 목으로 향했다. 꽤 편한 삶을 살아온 것인지 목은 햇볕에 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하얀 목덜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목덜미에 붉은색 물감을 칠해줄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멋대로 손을 잡은 건 죽어도 마땅할 정도였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가 보죠."
대충 필요한 정보는 얻긴 했어도 오늘 막 처음 본 김유한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것뿐이지 직접 본 게 아니기에 신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 완벽하게 적응을 끝내지 못한 몸 상태와 만약의 사태가 있으니 버림 패로도 사용할 수도 있어 재희는 마음대로 죽이지 못하는 김유한의 존재 때문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에엣?!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재희 씨! 위험하다고요! 비명소리만 들어도 제, 제가 방금 봤던 것처럼 사, 살인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고요!"
"그렇다고 겁먹은 채로 이렇게 가만히 있을 생각이신 가요? 방금 추측하신 대로 최후의 일인이 남거나 이 섬에 있을 사람들의 수가 일정 이하로 떨어져야만 해결이 될 가능성이 크잖아요. 그러니 언젠가는 봐야 할 거 오히려 지금 당장 봐서 대비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위험해요!"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마음을 바로 먹고 달라질 생각해야 할 텐데. 이런 마음가짐을 전혀 가지지 않는 김유한의 모습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지금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짐승처럼 말이다.
"부탁드려요."
상대가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그 무엇보다 여자가 되어 몸의 적응이 끝나지 않아서 홀로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여 어떻게든 김유한을 끌어들여 방패막이로 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재희는 애써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 위험한 상황이라면 머뭇거림 없이 바로 방패로 사용하고, 사용할 기회가 없게 된다면 몸의 적응이 끝마치는 대로 버려질 말로서 보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속셈으로.
"아......"
재희가 고개를 숙이니 살짝 헐렁했던 원피스 때문에 가슴골이 모습을 드러내자 안 그래도 재희의 가슴에 큰 관심을 두고 있던 남자인 김유한은 이젠 노골적인 시선으로 눈을 가져왔다. 그런 시선에 불쾌함을 느낀 재희. 슬그머니 목 부분을 잡고 끌어 올려 가슴을 못 보게 만들자 아쉬움의 숨을 내뱉었다.
"아, 알겠습니다. 재희 씨. 딱 하, 한 번만 보러 가도록 하죠. 그 대신에 재희 씨는 반드시 제, 제 뒤에 있으셔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와아......"
존재하지 않던 용기라는 걸 억지로 만들어내 보인 김유한의 모습에 미소를 살짝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의 미소를 본 김유한은 잔뜩 붉어진 얼굴을 애써 돌리며 황급히 가방에서 칼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 그럼 가요!"
고작 미소 한 번 가지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지금은 생각해 보지 않기로 했던 재희 자신의 외형이 어떻게 변했는지 의문을 품게 만들고 있었다. 단순히 꽤나 예쁘장한 외모라고 생각했건만. 미소를 짓던, 짓지 않던 재희를 상관하지 않고 재희의 얼굴만 바라보니 보기보다 상당히 예쁜 것 같았다. 그것도 큰 가슴에서 시선을 잠시 떨어뜨릴 정도로.
'쯧... 귀찮게.'
남자라는 생물이 가장 원하는 건 재력과 권력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다름 아닌 여자였다. 재희에게 강제로 비쓰온 게임 계약서를 내밀었던 남자가 했던 말처럼 어머니와 여동생이 참가하면 한순간의 재미만 있을 뿐. 그 후로는 재미가 없어 남자인 재희가 참가하는 게 좋을 거라 했으니 이 섬에서의 남녀 비율은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을 게 분명했다.
당연히 남자보다 여자의 비율이 낮으니. 김유한의 반응을 보아서는 상당히 미인이 되어버린 재희가 이곳에서 죽을 확률이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기뻐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죽지만 않을 뿐이지 여자로서의 온갖 능욕을 당할 게 뻔하기에 기쁜 마음은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다. 바라지 않았던 여자로 변한 것도 모자라서 동성이었던 남자에게 범해진다고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그것 보다... 소리가 없어졌다.'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숲 전체로 울려 퍼졌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재희는 가방에서 칼을 꺼내 손에 쥐었다. 언제라도 위험인물이 나타나면 김유한을 믿는 게 아닌 혼자서 대처하기 위해.
"조, 조심히 걸어요."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까 봐 김유한은 작게 말했다.
"네."
호의는 좋다. 호의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근데 그 호의가 너무나도 과분하여 고작 작은 돌덩이들이 두세 개 모여 있는 거로 조심하라고 말하니 오히려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몸의 적응이 이제는 뛰는 것까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진행이 되었으니 굳이 이런 사소한 거로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몸을 낮게 숙이며 얼마나 걸어왔을까. 김유한의 발걸음이 멈춰 서고 눈에 띄게 한 차례 떨린 김유한의 몸이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춰졌을 때, 재희 또한 몸을 웅크렸다. 그런 뒤에 공포에 물들어 김유한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을 가져가자 김유한이 말했다. 경악하면서.
"저, 저 남자예요! 사람을 죽이고 가방을 가져갔다던 사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