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004 튜토리얼 (4/140)



〈 4화 〉004 튜토리얼

"저기요."
"히, 히이이익! 사, 살려주세요!"

무언가로 인해 잔뜩 겁을 먹은 상태로 몸을 움츠리며 조심히 움직이고 있던 한 남자의 모습만으로 재한에게 이 남자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곤 오직 정보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재한은 마음 편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걸어 보았지만 남자는 누가 자신을 불렀던 것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빠르게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 이마를 붙이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냥... 죽일까?'

너무나도 나약하고 쓸모가 없어 보이는 모습. 그래서인지 차라리 그냥 죽이고 다른 사람을  찾아볼까 하는 정상적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판단을 할 뻔했지만, 다음에 만날 사람이 선으로 가득 찼을지. 아니면 악으로 가득 찼을지 모르기에 하는  없이 이 남자에게서 최대한 정보가 될 것들을 캐내 보기로 하며 손에 쥔 칼을 조심스레 가방의 옆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언제라도 빠르게 꺼낼 수 있도록.


"죽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일어나 주시겠어요?"
"아.....?"

여전히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선 빠르게 손을 마찰시키는 남자의 모습에 한심함을 느끼면서 최대한 아무 감정을 담아내지 않은 어투로 다시 한번 더 남자를 부르자 그제야 남자는 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남자가 아닌 연약한 여자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상태로 경직되었다.

남자라고 불러 주기에는 너무도 한심한 모습. 이마에는 흙과 작은 돌들이 붙어 있었으며 눈가에는 이미 마구 흘려버린 눈물에 장악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한에게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만이 찾아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래도 자신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에 예민해져 있는 상황에서 남자가 고개를 든 상태로 그대로 재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직되자 호감이 더더욱 떨어지다 못해 마이너스를 넘어 치솟았다.


"여신님.....?"


'뭐...? 여, 여신님? 누가...? 내가......?‘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재한은 자신이 여자가 되었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거울 같은 게 없으니 지금 어떤 얼굴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자신을 여신이라고 부르는  보니 꽤 예쁘장하게 변했는지 그래도 못생긴  아니라는 사실에 살짝 안도가 되면서도 배틀 로얄에선 오히려 발정 난 짐승들에게 노려지게 되는 약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앞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저기요?!"

여신님이라는 말을  밖으로 내보내고 다시 재한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던 터라 이제 더는 기다려주지 못해 날이 가득 선 어투로 불러보았다. 하지만 이  번으로는 정신을 차리게  수가 없었는지 두 번. 세 번을 더 불러서야 날아갔던 정신이 되돌아오게 만들 수가 있었다.

"저... 괜찮으신가요?"
"아, 아 네넵! 괜찮씁! 악!"

'혀 깨물었네.'

남자의 외모 수준은 평균이라 생각되고 나이도  들어 보이니 여자 경험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마치 동경했던 여자라는 생물과 처음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게 처음이라 몹시 긴장이라도 한 것마냥 혀를 깨무는 황당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붉게 물든 얼굴. 재한은 일단 일어나라는 뜻에서 손을 내밀자 남자는 순간 머뭇거리더니 기쁜 표정으로 자신에게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힐끔... 힐끔......

남자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를 제외하고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한심하지만 남자긴 남자인 모양인지 재한이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힐끔 하고 시선을 가져오자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왈칵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야 그럴 것이 시선이 얼굴만 향한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새로운 존재, 굴곡을 지닌 자신의 가슴을 보고 있었으니까.

'하아... 그냥 혼자 다닐까.'

재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생각했다. 그냥 혼자 다닐까 하고. 하지만 아직 모르는  많은 백지인 상태라 끌어 올랐던 화를 어떻게든 다스리며 아직은 아니라고. 죽이거나 혼자 다니더라도 뜯어낼 정보를 모조리 뜯어낸 뒤에 선택을 해도 전혀 늦지 않는다며 말을 되새겼다.


"저기요?"
"아앗?! 네, 네네!"


지금 당장이라도 이 더러운 눈을 가진 남자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든 억제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미 몸과 마음은 지금 당장이라도 저 남자가 가진 물과 식량을 자신의 가방으로 옮겨 담고 싶었다. 처음부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여자라는 사실에 자신이 만만하게만 느껴지는지 거의 대놓고 가슴에 눈길을 가져가니 아까 전의 꼴사납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던 것은 이미 잊어먹은 걸까?

'쯧... 기분 나쁘네.'


안 그래도 현재 자신의 모습이 달라졌을 거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수 있었기에 재한의 얼굴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모습이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이제는 대놓고 가슴에 시선을 가져오니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호, 혼자이신가요?"


남자의 행동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던 와중에 남자가 먼저 말을 더듬으며 물음을 던져오자 재한은 재빨리 일그러져 있을 얼굴을 바로 펴고 가식적인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네. 안타깝게도 함께 다니는 사람은 없어요."

어차피 금방 들킬 거. 굳이 혼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도 없기에 거짓을 포함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 어차피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욕망을 이겨내지 못해 재한을 덮쳐온다고 할지라도 간단히 덮쳐줄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손쉽게 이기는 게 가능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왔다.


참으로 이상하다. 남자의 인상이 싸움을 잘할  같지도 않으면서 신체도 왜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남자보다는 확실히 힘의 차이가 나는 여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한은 남자였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니 이게 실험의 여파  하나인가 했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 남자가 아니라 무술을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면 편하게 이길 수 있어 보이며 제압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이 들었다.

"여, 여성분 혼자서는 위, 위험해요...! 그, 그래서 저라도 가, 같이 다녀줄 수... 있어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말을 지껄일까. 아직도 재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뒤늦게나마 남자처럼 행동하는 모습이란 정말로 역겹기만 한데. 차라리 위급한 상황일  재한을 버리고 도망이나 치지. 쓸데없이 방해되게 나섰다가 일만 키우는 게 아닐지. 불안함 느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도 정보라는 귀중한 게 있었으니 달리 방법은 없어서.

"정말요.....?"
"네...! 저, 정말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제가 좋아요."
"하, 하하.....!"


만약 과거의 자신이 미래에서 남자에게 아양을 떨게 될 거라는  알았다면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의문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려고 솟구치고 있는 구역질을 어떻게든 참아내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남자는... 호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이내, 호구는 문득 들어온 생각이 있어 다짜고짜 재한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 그런데요. 그쪽은 어떻게 여길 오, 오시게  건가요?"
"어... 그 쪽은요?"


갑작스러운 질문. 망할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실험체로서의 삶을 끝내고 이 비쓰온 게임이라는 것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 주저가 생겼다.

'이 호구도 실험체인가?'

왜냐하면 자신과 같이 호구도 실험체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으니. 그래서  좋게 살아남아 재한과 마찬가지로 일어나보니 이곳에 있었는지에.


"하하...! 저, 저는요. 부끄럽게도 도, 도박에 중독이 되어 버려서 마, 말이지요. 그래서 감당할  없을 정도의 비, 빚을  버렸거든요."
"빚?"
"네. 비, 빚이요. 한... 5천만 원이었나? 하하.....!"

이곳에 오게 된 계기가 달랐다. 또한, 한심하다고 생각되었는데 고작 빚 5천만 원 때문에 목숨이 이승과 저승을 오고 가는 이곳에 왔다는 걸 뭐가 그리 잘난 듯이 웃으면서 가볍게 말하니 더더욱 상조하기 싫어졌다.

"저도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뒤로 빚쟁이들이 찾아왔었어요."
"그, 그래요? 아, 아주 무서웠겠어요. 혹시... 그들이 무, 무슨 짓이라도?"
"아니요.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어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마, 많이 원망스러우시겠어요."


호구의 존재만으로 정말로 재한이 유일한 실험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실을 숨기기로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재한의 말과 행동에 호구는 호구가 확실한지 의심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재한의 아버지와 재한을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들에게 이유도 없이 혼자 분노하고 있었다.

'원망... 원망이라......'

이게 원망이라는 감정이려나. 어렸을 적에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매일 집에 들어오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보냈다. 거기에 더해 재한과 여동생, 그리고 엄마하고도 즐겁게 지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년 전에 갑작스럽게도 아무런 말도 없이 모습을 감추고 가족들을 강제로 이사시킨 후로는 원망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겠지. 가족들에게조차 차마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간이 길어지고 있음에도 사정이 있으니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일부러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지 자신이 가진 아버지라는 직책을 가볍게 저버릴 만큼의 무책임한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게 사실은 원망이지 않았을까.


"그러네요."


불투명했던 아버지를 향한 감정이 지금에서야 확실해졌다. 원망의 대상이라고. 아니, 원망을 받아야만 한다고. 재한을 여기 이 정신 나간 곳으로 오게 만든 것도 모자라서 까딱 잘못했다가는 재한이 아니라 여동생과 엄마가 여길 오게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는 이상해요... 무슨 게임이라고 하는데 단순한 게임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화제를 돌려 재한은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초석이 되는 말을 던져 보았다. 그러자 호구는 재한이 미끼를 던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 맞아요! 이상해요! 정, 정신 나갔어요!"


하지만 호구는 재한의 마음도 몰라준 채로 눈치 없게 무언가 때문에 단단히 겁에 질렸다는 표정으로 크게 소리치자 재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한은 무슨 이유 때문이냐고 따져 들고 싶었지만, 호구가 재한에게 이상함을 느껴서 입을 꾹 다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없이 그저 다음 말만을 기다리며 호구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으... 시, 실례지만... 서, 성함을 여쭈어 보아도?"
"......"

시선을 느낀 호구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원하는 답이 아니라 이로 입술을 살짝 깨문 재한이었지만 호구의 말처럼 아직 둘은 통성명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그런 상태. 그러나 굳이 호구의 이름이나 나이를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정보라는  자꾸만 발목을 붙잡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어... 본명은 조금 그렇지?'


그리곤 곧장 도로 입을 닫았다. 이런 재한의 모습에 호구는 알려주기 싫은가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윤재한이라는 이름 자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쓸법한 이름이기에 순간적으로 고민에 빠져버린 거다.

"윤재희... 제 이름은 윤재희라고 해요."
"와...! 저, 정말 예쁘고 재희 씨랑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그런가요?"

즉석에서 지어낸 이름을 듣자 호구는 미안해질 정도로 기뻐했다. 고작 이름을 들은  가지고.


"제,  이름은 김유한이고요. 느, 늦었지만 자, 잘 부탁드려요. 재, 재희 씨."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대체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붉어진 얼굴로 말하자 재희는 김유한에게 이런 반응을 만들어 내는 자신의 현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도 대놓고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 정보를 캐내기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으니 재희는 활짝 웃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토사구팽. 필요한 만큼 마음껏 써먹은 다음에 필요가 없어지면 곧장 버리는 소모  의미로서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입에 담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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