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003 튜토리얼
"끄으으윽.....!"
재한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머리를 부여잡으며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의 머리의 통증을 동반한 어지러움이 끊이질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기 시작하자 말 그대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 전체가 재한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그와 동시에 머리의 통증과 어지러움이 점차 수그러질 즈음에 재한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정지되는 것처럼 두 눈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나무와 풀, 그리고 꽃들 사이로 날갯짓을 하며 날아다니는 작은 벌레들의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가 꿈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무슨 꿈과 연관이 되어 있거나 꿈이 아닌 현실에서 어렸을 적의 기억들이 꿈으로 투영된 거라 생각이 들었건만 아무리 그래도 재한에게는 숲과 연관된 기억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오직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도시 소년이기에 오히려 숲이, 산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 어? 뭐야?"
그 때문에 복잡한 현재 상황에 대해 의문을 품고 혼잣말을 하다가 이내, 자신의 목소리가 무척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재한은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전신을 지배하면서도 불구하고 벌벌 떨리는 손을 목으로 가져왔다.
"얇아... 그리고 부드러워."
자신의 목을 만진 소감은 이러했다. 원래부터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고 공부를 하느라 운동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목이 이렇게나 부드럽지는 않았다. 마치, 깨끗한 여자의 목을 만지는 그런 느낌. 이해가 되지 않는 목의 감촉과 그 무엇보다 자신의 입 밖으로 내보내는 목소리의 높낮이가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강조하는 것만 같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가... 너무 스트레스가 쌓였었나?"
뭔가가 많이 달라져 버린 자신의 목을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부드러운 머리카락 또한 현재 재한의 생김새가 어떠할지에 대한 의문이 쉴 새 없이 밀려들게 만들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으며, 갑자기 길어진 머리와 여자처럼 얇고 부드러운 목,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대충 외형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 같은데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현실을 부정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첨단 장비들이 즐비한 미래 세계가 아니라 온전히 21세기의 세상에서 건드리지 못한 성대라는 것을 가늘게 만든다는 게 말도 안 되었으니.
그 때문에 재한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며, 학교에 다니며 꾸준히 공부해 대한민국에서 이름난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곧장 휴학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까지 해대니 결국 스트레스가 한계를 넘어 결국 꿈에서 자신이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트레스와 여자가 되는 게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재한이 의식을 잃기 전에 일어났던 상황과 계약서의 존재 여부 때문에 알고 보니 꿈이 아니라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왔다. 분명 꿈이다. 꿈이 여야만 했다. 그런데 뭔가 미심쩍은 게 한둘이 아니라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방금 만졌던 목에 손을 가져가 얼마 없는 살을 손가락 사이에 넣었다.
"아닐 거야......"
누군가가 그랬다. 꿈에서 통각이 느껴 지면은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분명 꿈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재한은 목에 가져간 손가락에 힘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꿈이 아니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이런 간절한 바람을 비웃듯. 살을 꼬집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통이 밀려온다. 역시... 꿈이 아니었다. 재한은 애써 눈을 돌리고 있었던 자신의 흉부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쉰다.
"분명 행운을 빈다고... 게임을 해야지 않겠냐고 했었지?"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하다가 피곤함에 찌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갑작스럽게 정체도 불투명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거의 반강제로 비쓰온 게임이었나 하는 그런 게임 계약서에 이름을 써넣은 뒤, 누군가에게 머리를 강타당하며 의식을 잃어가던 도중에 들었던 희미하지만 다행히도 기억에 남아있는 남자의 마지막 말. 자신이 여자가 된 이유가 그 남자와 연관되어 있을 게 분명하지만 지금, 이 현실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너무 없었다.
"서바이벌의 배경...? 그리고 내 몸이 이렇게 된 건 가상현실의 게임 속의 세상인가?"
비쓰온 게임이라는 건 재한이 상상할 수도 없는 기술력을 가진 회사의 가상현실 게임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남자였던 몸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도 설명이 되었으니. 그리고 천천히 계약서의 내용과 지금 상황을 추측해 보건대.
"스파이더 마인크래프트 같은 건가?"
초등학생 때 얼마 없던 친구네 집에 가서 했던 샌드박스 장르의 게임처럼 생존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여긴 현실이고 나는......"
그게 아니라면 계약서에 적힌 대로 몸의 소유권을 넘겨 생체실험을 당해 신체가 완전히 바뀌게 되어버린 걸까. 지금 생각하기로는 가장 가능성이 있게 보이는 건 바로 후자였다. 당연히 후자도 말도 안 되는 망상 같았지만 그래도 가상현실 세계라 치부하기에는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몸으로부터 느껴지는 감각들이 현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노예 계약서와도 같은 게임 계약서를 쓸 때 당시에는 당연히 가혹한 현장의 노동력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 것과 정반대로 재한은 어떤 실험의 실험체로 사용되어 그들의 뜻대로 남자에서 여자가 되는 실험에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그 실험 도중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펼쳐진 것인지 모르게 재한의 몸의 모습이 바뀐 것만 같았다.
"흐음......."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 둘 중의 하나라고는 생각하긴 하는데 너무 말도 안 되는 망상 같아 순간 자신이 미친 게 아닐지 의심이 들어왔지만,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으로 인해 현실이 아니라면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의문이 드는 눈앞의 모습들. 그리고 아래를 보면 보이는 가방의 모습에 둘 중에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재한은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 같았다. 여기가 허구인 세상인지, 진실인 세상인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재한은 가방에서 눈을 떼어 숲속을 유심 깊게 둘러보았다. 자신을 찍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카메라의 존재를 찾아서. 그러나 예전보다 눈의 시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아진 재한의 눈으로도 카메라의 모습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꼼꼼히 잘 숨겨놓았나 보다. 그래서 카메라를 찾는 것을 포기하곤 일단 주어진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부터 하기로 했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거침없이 가방을 열어 속을 뒤져본 재한은 황당함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작은 칼과 절반 정도의 알코올이 들어있는 라이터와 밧줄, 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생수 두 병과 빵, 간식거리들이 조금 들어있었고, 마지막으로 무언가가 적혀있을 거라 생각되는 접혀있는 쪽지까지. 정말로 여기서 생존하라고 말하는 듯한 내용물이다.
"그 남자인가?
생존게임에서 가장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는 쪽지에 눈길을 가져간 재한은 불쾌함을 느끼며 접힌 쪽지를 펴 안에 적힌 글을 읽어 보았다.
"축하한다... 수많은 실험체가 죽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아 실험에도 성공한 것에. 너를 대신해 죽어 나가면서 네가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다른 실험체들을 위해서라도 내 실험이 헛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비쓰온 게임의 정점에 올라서길 바란다......"
길었던 재한의 생각에 종지부를 찍는 말이다. 이 말인즉슨, 가상현실이라는 미래의 기술을 도입한 세계가 아닌, 그저, 실험체로서 성별이 뒤바뀌었고, 뒤바뀐 몸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도 않으며 곧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생존게임에 강제로 집어 넣어졌다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된 사실. 완전히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가랑이 사이로 넣어본다.
"후우... 역시인가?“
역시일까. 눈에 보이는 새하얀 원피스를 꾹꾹 눌러 음부 사이를 매만지자 만져졌어야 하는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 생존게임이 확실한 건가?"
지금은 한가롭게 이미 있어야 할 게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절망에 빠진다거나 분노할 여유는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생존게임이라 생각했던 비쓰온 게임에서 정점에 올라서길 바란다는 글이 유독 재한의 눈에 들어왔으니까.
"배틀 로얄......"
재한이 생각하기로는 단순한 생존게임에 재미를 느낄지언정 계속해서 재미가 지속될 리가 없을 게 분명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익숙해진 참가자들의 모습에서 긴장감은 사라지고 보는 사람으로선 지루함만 찾아올 테니. 그리고 그런 생존게임에서 순위를 결정하기도 그리 쉽지가 않았다. 순위를 만든다면 어떻게든 만들 수는 있겠지만 차라리 순위를 매기는 게임을 만들 바에는 아예 다른 장르. 재한이라면 생존게임에서 업그레이드가 된 장르. 배틀 로얄의 게임 방식을 원할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생존하는 서바이벌이 아니라 여러 명의 경쟁자를 상대로 전투 불능으로 만들거나... 죽이거나. 이 두 가지의 방법으로 인원을 줄여나가며 최종 1인이 되라고 쪽지에 적힌 글이 하는 말일 게 분명할 거란 생각이 들어오자.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인기가 줄었지만, 여전히 말뚝을 박고서 플레이하는 사람이 많은 그 게임이 갑자기 생각났다.
"일단 다른 사람부터 찾아보자."
쪽지에 나온 대로면 재한이 유일한 실험체로서의 생존자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비쓰온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재한의 몸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박사가 아니라 다른 박사의 손에 실험체로 개조되어 이 게임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도 여자가 되었을까?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고민만 하다가는 도저히 답이 도출되지 않을 테니. 일단은 주위에 있을지도 모를 사람을 찾아보기 위해 가방에서 꺼내 놓았던 것들을 전부 가방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고, 오직 칼만을 손에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메고 흙이 잔뜩 묻었을 엉덩이에 손을 가져가 툭툭 털었다.
재한이 알고 있는 시야와 다르게 낮아져 있었으며, 가방끈이 걸쳐진 어깨의 크기조차 줄어들어 아슬아슬하게 가방끈이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그래서 재한은 가방끈을 끌어 올리고선 가방끈에 짓눌려 아픔을 만들어 내고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빼내자. 다시금 실험의 여파로 완전히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참 이질적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여성들이 입을 만한 하늘하늘한 새하얀 원피스였으며, 머리카락 색은 염색이 아니라면 보지 못할 은색. 그리고 운동을 하지 않아 안 그래도 얇았던 게 더더욱 얇아져 있는 팔과 다리의 모습은 정말로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익숙하지 않은 몸이기 때문에 잠시 서 있는 것도 불편함이 찾아온다.
푸석... 푸석... 바스락......
모니터 안에서 펼쳐지는 게임이라면 몰라도 현실의 배틀 로얄에서 가장 약하고 위험성이 큰 존재는 바로 여자가 아닐까 싶다. 신체적으로 남자보다 약하기 때문에 쉬운 먹잇감으로 인식이 되며, 그 무엇보다 상해와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텐데 여자라고 강간이라는 걸 당하지 않을 리도 만무했으니, 그래서 그 남자가 어머니나 여동생이 대신 가도 좋다면 한순간의 재미만 있을 뿐이니 재한 보고 가라고 했던 것 같다. 그는 비쓰온 게임이 이런 부류의 게임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곳에 얼마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먼저 사람을 찾을 겸.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을 찾을 겸 해서 무작정 걸어가기로 했다. 그야 그럴 것이 사람이라면 재미를 위해서 잔인해질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므로 야생동물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배틀 로얄이 확실하다면 야생동물들보다 더욱더 위험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곳을 다른 이들보다 몸을 숨길 은신처를 선점해 놓을 생각으로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재한은 어느 한 인기척에 의해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이 인기척의 주인이 착하거나 나쁘거나 하는 걸 지금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기에 조심에 또 조심을 거듭하는 거다. 그래서 재한은 인기척이 가까워질수록 언제라도 손에 쥔 칼로 사람의 온몸을 난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마쳐 두었다.
현재 선택지는 총 세 개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사람을 죽여 얼마나 필요할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물과 식량을 얻는 것. 두 번째로는 죽이지는 않고 살려주되 이 게임에 대한 정보와 식량만을 빼내 모습을 감추는 것. 하지만 두 가지의 방법은 문제가 많았다. 그것은 바로 물과 식량을 얻을 수야 있겠지만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이 말고도 더 있겠지만.
그래서 세 번째의 선택지. 여자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유혹하거나 친분을 쌓는 것. 이렇게 한다면 단순히 비쓰온 게임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재한이 생각지도 못했던 그 사람만의 추측과 생각을 전부 들을 수가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 현재 물과 식량이 부족하지 않은 지금은 마지막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라 판단한 재한은.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