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002 튜토리얼
"누구지.....?"
윤재한은 의문이 가득 담긴 어투로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계속 노골적으로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오는 누군가가... 아니 누군가들 때문에 말이다.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실수한 거라도?'
재한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누군가에게 실수한 일이라곤 여태까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기억력이 보기보다 좋은 편인데 남에게 원한까지 사서 사람을 자신에게 보낼 정도의 커다란 짓을 했는데 잊어먹었을 리가 없기에 곰곰이 생각해 본다고 한들 없던 기억이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세상을 살아왔던 재한이었구만, 한두 명도 아니고 지금 느껴지는 바로는 최소 열 명 그 이상이라 문득 겁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열 명 이상이라면 아주 작정을 하고 재한의 뒤를 따르는 것이기에 철저한 방비가 되어 있을 게 분명해 여기서 도망을 쳐 본다고 한들 제대로 된 도망이나 칠 수 있을지. 또한, 재한이 아르바이트를 한 곳부터 따라 왔다고 한다면 이미 재한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 그리고 알바하던 곳부터 졸졸 따라왔다는 그 말인즉슨 저들은 계획적으로 빈틈도 없이 확실하게 재한을 노리고 뒤를 쫓고 있으니 재한을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어차피 도망가기는 이미 글렀다는 생각과 집에 돌아가면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엄마와 여동생의 존재로 인해 재한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선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왜 저를 따라오는 거죠?"
굳이 도망을 쳐 보았다가 잘못해서 저들의 화만 더 돋우고 집에 있을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재한은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당당하게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흐음...?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왜 도망치지 않는 걸까? 기척을 숨기지 않고 대놓고 따라갔는데 이 정도면 꽤 전에 미친 듯이 도망치는 게 정상일 텐데?"
재한의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재한의 뒤에서, 그리고 앞에서 많은 사람이 어둠을 파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 보스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의아함을 이기지 못해 말했다.
"당신들이 저를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죠."
"음... 그건 그렇긴 해. 똑똑하구나? 이제 스물 한 살인 사회초년생인데. 누가 보면 노련한 사회인이라고 생각하겠어."
"그럴 리가요. 저는 엄연한 고등학생이고 노련한 사회인이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면 기겁하고 도망치기는커녕 살려달라고 무릎부터 꿇을 텐데요."
그 말대로 재한을 둘러싸기 시작한 무리라면 아무리 오랫동안 경찰관이나 형사로 근무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치거나 도망이 무리라 싶으면 빠르게 포기하고 살려달라는 애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한에게는 몇 년 전에 존재를 감춘 아버지를 대신하여 지켜야만 하는 가족이 있으니 무서워도 발걸음을 떨어뜨리지 않은 거다.
'누구지...? 처음 보는데?'
지금 같은 상황 속에서도 재한은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눈과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았다. 그랬더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남자의 얼굴은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남자의 부하나 동료로 보이는 남자들의 얼굴에도 익숙함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재한에게 원한을 가진 존재가 여기에 없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가...? 음. 제법 똘똘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일단 도망이라도 쳐 보면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지 않았을까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경찰을 부르는 게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일 것이다. 하지만 재한이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새벽이 다가오는 늦은 밤이라는 이유와 그리고 이곳 주위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것만으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붙잡힐 게 확실하니 굳이 화를 돋을 필요 없이 순순히 잡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저들은 재한을 확실히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 저렇게 대놓고 태연하게 재한의 쫓은 걸 테고.
"제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똘똘하다고 해야 할 겁니다."
재한은 시간을 끌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던지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어차피 도망치기에는 글렀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이렇게 발버둥을 치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에게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집에 있을 가족들까지 무사하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재한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아주 작은 빈틈이라도 발견하면 곧바로 도망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른 명 즈음인가?'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대충 어림잡아 보았을 때 최소 스무 명 후반, 서른 명 초반이니. 앞도 뒤도 옆도... 도망칠 곳은 그 어디에도 전혀 없었다. 그리고 재한을 둘러싼 남자들은 하나같이 몸집이 있으니 힘으로 뚫고 도망치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여 포기한 듯이 몸에 힘을 쭉 뺐다.
"사람이 참 많네요."
"그렇지? 나도 솔직히 너 같이 아무것도 아닌 애 상대로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정말로 필요한지 의문이 들었거든? 근데 무슨 이유인지 위에서 무조건 이 애들을 모조리 데려가서 너를 반드시 잡아 오라고 말하더라? 쯧쯧... 애들 보낼 돈으로 나한테 보너스나 좀 더 얹혀주지."
"......"
'반드시... 반드시라고...? 대체 왜?'
가장 최악인 상황. 재한에게 보복을 하는 것도 아닌 반드시 잡아 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재한은 다시금 기억을 되새겨 높으신 분에게 피해가 갈 만한 짓을 했나 생각을 해 보았지만 재한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저을 수가 있었다. 실수했다고 해도 곧장 사과를 드리는 재한의 성격상 원한을 샀을 이유도 없었다.
그럼 뭘까. 현재 스무 살인 재한이라 현 사회에서 당연히 대학에 입학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 살기만으로도 벅찬데 대학 등록금까지 낼 여유가 없어 입학하고 곧장 휴학을 낸 다음에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그럼 알바를 하는 가게에서 30명이나 고용할 수 있는 어마 무시한 부자에게 찍혀버린 것. 그러나 재한이 일하는 곳은 굳이 부자들이 찾을 만한 곳도 아니었으며,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실수를 한 적도 아예 없기에 이것마저도 아닐 게 분명하다. 그럼 마지막으로 길거리에서 맞붙은 시비. 하지만 기억에 없다.
"제게... 선택권은 없나요?"
"있을 리가? 미쳤다고 너를 잡아오라는데 선택권을 주고 집에 보내줄 거라 생각해?"
"아니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던져본 질문이지만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을 원하지 어머니나 여동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 그래서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다시 재한은 도망칠 방법을 물색했다.
'방법은 없는 것 같네.'
누군가가 재한과 재한을 둘러싼 남자들을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으로 쓸쓸히 웃었다.
"뭐. 너한테는 선택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씨익 웃으며 말하는 남자의 말이 마치 천사의 속삭임이라도 되는 것마냥 희망의 끈이 되어 재한의 귀를 간질였다. 때문에 재한은 헛된 희망을 가지고 되묻자 남자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남자의 말이 이어지자 그 속삭임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 대신에 네 여동생이나 어미가 우리를 따라간다면 말이야."
낄낄거리며 말이 이어나가자 재한의 표정은 빠르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가 있다는 건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표정에 씻을 수 없는 분노가 몰아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얼굴에 주먹을 내찌르고 싶지만...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의 존재 때문에 꽉 진 주먹을 차마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를 어떻게든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거부권은 없습니까?"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를 하는데 그냥 내 마음대로 결정해? 누가 갈지 룰렛이라도 돌릴까?"
"... 알겠습니다. 제가 가죠."
이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여자인 여동생과 어머니를 보낼 수 없는 노릇. 그럴 거면 차라리 남자인 자신이 이들을 따라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재한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따라가겠다는 선택지밖에 선택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잘 생각했어. 솔직히 네 어미나 여동생이 예쁘고 귀엽긴 해도 우리한테는 일시적인 재미일 뿐이거든? 그럴 거면 차라리 남자인 너를 데려가지."
남자는 그대로 미소를 머금으며 품에서 꺼낸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알았으면 적어."
"이게 뭔가요?"
"참가 계약서야. 그 나이라면 계약서가 뭔질 알 거고 이름이나 사인을 넣을 곳도 어딘지 대충 알겠지? 그리고 어차피 가면 다 알게 될 거 귀찮게 질문을 하지 마."
약간의 따뜻함이 남아 있던 계약서와 펜을 받아든 재한은 이게 대체 무엇인지 묻자. 남자는 담배를 입에 넣으며 빨리 끝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래서 재한은 질문을 하지 못하고 일단은 계약서를 천천히 꼼꼼하게 읽어 보았다.
'비쓰온 게임 참가 계약서?'
비쓰온 게임이라... 무슨 게임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게임의 이름. 아무리 게임에 별 관심이 없고 공부만 하는 공붓벌레인 재한이라도 어느 정도 게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비쓰온 게임이라는 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의 게임 이름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한은 눈을 내려 다시 글을 읽어갔다. 그렇게 계약서에 조항이 있는 부분에 도달했을 때.
"......"
재한은 생각하는 걸 포기하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입 밖으로 뿜어내고 있던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뭔가요?"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도저히 여기에 관해 물어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몸과 목숨의 소유권은 넘긴다. 그리고 지금 이 생활을 포기하고 제약된 생활을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니. 무슨 소리인지......"
이건... 게임 참가 계약서가 아니라 단순히 노예 계약서가 아닐까? 몸과 목숨의 소유권을 넘기는 것도 모자라 현재 생활을 포기하다는 것만으로 어딘가로 끌려가 노동력으로 착취당하는 모습이 재한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때문에 더더욱 재한은 여동생과 어머니에게 이 계약서가 가면 안 된다고 본능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살짝 황당하지? 후우......"
남자의 입안에서 나온 담배연기가 재한의 얼굴을 가득 메웠다.
"이해는 돼. 나라도 황당할 테니까. 그런데 뭐 어쩌겠어? 네 애비를 탓해야지."
"아버지?"
몇 년 전에 무슨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춘 아버지가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오는지 재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궁금하나 본데? 네 애비가 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녔기에 아들인 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이름을 써 넣어야 하는지?"
남자의 말에 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이 게임을 하다보면 차차 알아갈 수 있을 거야. 운 좋으면 직접 만날 수 있을 수도?"
하지만 재한의 궁금증을 남자가 해소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증을 부풀린 듯한 발언을 끝으로 고개를 까딱거려 어서 빨리 계약서에 재한의 이름이나 사인을 넣으라고 재촉하기 시작하자 재한은 이제 기억 속에 저장된 얼굴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강하게 깨물었다.
'망할... 아버지.'
아버지가 없는 것만으로 고생해서 살아온 재한의 가족인데 여기서 더 큰 짐 덩어리를 등 위로 얹혀주자 재한은 여기 있는 남자보다 더 큰 분노가 심어졌다.
"여기요."
그래도 뭘 어쩌겠는가.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아 그래? 하면서 돌아갈 사람들이 아닐 것 같기에 재한은 이를 갈며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고 계약서와 펜을 다시 남자에게 내밀었다.
"흐음... 빠진 곳은 하나 없고. 그래. 잘했어. 약속대로 네 가족을 건드리지 않지. 내 모든 걸 걸고 말이야."
남자가 꼼꼼하게 계약서를 바라보다가 이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만난 애들중에 가장 똘똘하고 신중한 애라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내가 바쁘고 너를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어서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네? 헤어지다... 크악?!"
그냥 이대로 재한을 집에 돌려보내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목의 통증에 의해 재한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땅바닥에 몸이 닿기도 전에 남자가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몸에 큰 상처가 났을 상황.
"행운을 빌어. 반드시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나자고? 일단 게임을 해 봐야지 않겠어?"
시야가 기울어지고, 눈도 마찬가지로 서서히 풀려가던 와중에 재한은 남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살아서 만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