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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66화 (66/67)
  • 66화

    화장실에서 정보 수집을 하려고 했더니, 바로 옆 칸에 홍예성이 제 발로 굴러들어와 부스럭대는 상황. 그를 쫓아온 수많은 발소리와 화장실 앞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은 그에게 붙은 경호 인력이리라.

    의재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수가 바로 옆 칸에 있건만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은데.’

    홍예성이 알아서 와준 건 좋지만 그가 달고 온 꼬리들은 달갑지 않았다. 지금 홍예성을 무시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가더라도 화장실 출입구가 하나인 이상, 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더 재수 없으면 티켓 검사와 신분증 확인 절차를 밟을 수도 있었다.

    결국 홍예성이 제 발로 여기를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심란한 나머지 의재는 저절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자세를 취했다.

    ‘화장실에 왔으면 빨리 볼일이나 보고 나갈 것이지….’

    그 역시 화장실에서 볼일은 안 보고 다른 짓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괜히 옆 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빠르게 돌아가지 않으면 이사영이 걱정…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은 무슨.’

    의재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늦으면 지랄을 할 테다. 여차하면 화장실로 직접 행차하실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행동 패턴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이사영은 가끔 희한한 데 꽂혀서 이해할 수 없는 지랄을 하곤 했으니까. 조용히 살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니 의재를 굳이 송도에 끌고 온 것도 그렇다. 데이트는 무슨, 그냥 자기 따까리 짓 시키려고 그런 거….

    “악! 미친!”

    “예성 님! 괜찮으십니까?”

    “아아아악!”

    “…그냥 작업이 안 풀리시는 것 같다. 계속 대기.”

    이사영 쪽으로 튄 생각은 홍예성의 처절한 비명에 의해 끊겼다. 의재는 벽을 뚫을 듯한 시선으로 그 너머를 쏘아보았다.

    ‘씨X, 사람이 저런 소리도 내나?’

    홍예성은 이제 부스럭거리다가 간헐적으로 고라니처럼 울부짖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이 정도는 익숙한 일인지 경호원들이 화장실 안으로 들이닥치진 않았다. 고라니보다 더 고라니 같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의재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홍예성과 그가 만든 장비는 이번 장인전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왜 갈 곳 없는 의재처럼 화장실에 콕 박혀서 굼실대고 있단 말인가? 그를 위한 대기실도 따로 존재할 텐데 말이다.

    “으아악!”

    인하트에 달걀 사진을 올려놓고 마석을 찾을 때부터 알아봤다. 홍예성은 제정신이 아니다. 의재는 초조하게, 하지만 소리 없이 다리를 떨다가 결심했다.

    ‘피할 수 없으면 뭐라도 캐내야지.’

    마음 같아선 홍예성의 머리를 때리고 탈출하고 싶지만 도망갈 길이 마땅치 않아 바로 잡힐 게 뻔했다.

    결국 의재는 차선을 선택했다. 그는 옆 칸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들리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좁은 화장실 칸에 스스로를 가둔 사람은 인간의 말 대신 짐승처럼 울기만 했고, 오히려 화장실 밖에 있는 헌터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근데 왜 화장실로 들어가셨답니까? 테스트는 대기실에서 하셔도 될 텐데요.”

    “대기실은 갇힌 느낌이 안 난다나 뭐라나. 더 좁은 곳이 필요하시단다.”

    “그럴 거면 이동용 뒤주를 하나 만드는 게….”

    “이 자식도 뒤주의 쓸모를 오용하네. 니가 영조야? 뒤주는 곡식 넣을 때 쓰는 거라고.”

    “그리고 잘못하면 뭐가 터질 수도 있다고 하셨지 말입니다.”

    의재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여전히 옆 칸에선 뭔가를 부스럭대며 버튼 같은 걸 마구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부스럭대는 소리가 폭발물을 만지는 소리였단 말인가? 얼떨결에 폭탄 옆에 앉은 사람이 된 의재가 경악하는 사이, 질문한 헌터도 놀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희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어도 되는 겁니까? 화장실이 터지면 큰일 아닙니까?”

    그래, 빨리 막아. 끌고 나가라고. 건물 터지게 둘 거야? 의재도 속으로 맞장구를 쳤으나, 돌아온 건 냉정한 대답이었다.

    “장비 제작 중이 아닐 때는 경호 인력을 따돌리려는 시도나 본인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행동만 아니면 뭘 하든 자유롭게 놔두라는 게 국장님 지시다.”

    “지금 하고 계신 게 안전에 위협이 되는 행동 아닙니까?”

    “S급이시니까 뭐 하나 터져도 멀쩡하시겠지….”

    “애초에 말려봤자 듣지도 않으실 거고.”

    “건물 화장실이 터지는 데도요?”

    “돈 많은 제작자님인데 화장실쯤이야 뚝딱 고쳐주실 거야.”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 밖에 있는 헌터들은 여상한 태도였다. 하여간 헌터란 놈들은 하나같이 자기 힘만 믿고 심각한 안전 불감증에 걸려 있어서 문제다. 그러다 큰 사고 한번 터져봐야 정신을 차리지.

    의재는 옆 칸에서 나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한참 무언가를 만지작대던 홍예성은 아,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딸깍, 그 전과는 확연히 다른 맑은 버튼음이 들렸다.

    “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

    불길한 경보음이 귀를 찢을 듯 울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경보음도 모자라 칸막이 너머로 붉은빛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화장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의 기척도 달라졌다. 여러 사람이 우르르 달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터지냐?’

    칸의 반대쪽으로 다급히 몸을 물린 의재가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제 몸이 다치진 않겠지만 이사영이 사준 정장이 찢어질 수 있으니까. 이 비싼 옷을 물어줄 돈 따윈 없단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이 사태를 만들어낸 장본인, 홍예성은 큰 위기감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어우, 시끄러. 왜 이래? 오작동인가?”

    “예성 님, 괜찮으십니까!”

    한적했던 화장실이 꺼지지 않는 경보음과 헌터들의 기척으로 가득 찼다. 여전히 옆 칸은 붉게 번쩍대고 있었다. 홍예성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아, 괜찮아요! 뭘 좀 잘못 건드렸나 봐. 별일 아닙니다.”

    “그래도 안전 확인을 위해 문밖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에이, 잠깐만요.”

    투덜대던 홍예성이 문의 잠금을 풀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도 들고 간 건지 이젠 옆 칸뿐만 아니라 화장실 전체가 붉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의재는 현란하게 반짝이는 붉은 조명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홍예성은 너스레를 떨었다.

    “아, 진짜 별거 아님! 이거 그거예요. 저번에 다른 헌터 티켓 훔쳐서 팔았던 미친놈들 있었잖아. 그런 애들 걸러내려고 만든 미등록 티켓 감지기인데 갑자기 울리네.”

    “혹시 안 꺼집니까?”

    “예에. 안 꺼져, 이게…. 마석을 분리해야 꺼지려나?”

    홍예성의 안전이 확인되자 바짝 날이 섰던 헌터들의 긴장도 조금 풀린 것 같았다. 한 헌터가 농담을 던졌다.

    “혹시 이 중에 티켓 등록 안 한 사람 있는 거 아닙니까?”

    “에이, 티켓에 파란 글씨 뜨는 거면 다들 했지 말입니다.”

    ‘…잠깐.’

    의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파란 글씨? 컨벤션 센터 입구에서 보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손바닥만 한 기계로 티켓을 스캔하자, 검은 표면 위에 푸른 빛이 별처럼 떠올라 글자를 만들어내던 신기한 광경.

    藝星

    그 기계가 단순히 정품 티켓임을 확인하는 용도가 아니라, 티켓을 등록하는 역할도 같이 수행한 거라면? 절로 뒷목이 서늘해졌다. 의재는 뜨악, 입을 벌린 채 급하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홍예성이 만든 장비는 본인의 각성 스킬로 만들어진 것일 테고, 시스템의 법칙을 따라 작동할 것이다. 그리고 인벤토리도 시스템의 법칙대로 작동한다. 어찌 된 게 불길한 직감이 착착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입장할 때 사용한 티켓은 두 장 모두 이사영이 가지고 있으니 제 티켓은 현재 순정 상태, 즉 미등록 티켓이다. 그렇다면.

    ‘감지기 성능이 뭐 이렇게 좋냐고….’

    지금 저 기계는 제 인벤토리에 있는 블랙 티켓을 감지하고 이 유난을 떠는 게 분명했다. 이 미친 제작 실력은 대체 뭐란 말인가? 홍예성의 이름값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확인받고 싶진 않았다.

    ‘저런 거 만들 시간에 장비나 하나 더 만들지.’

    의재가 문밖의 홍예성을 향해 마지막으로 눈을 부릅뜬 순간이었다.

    “…잠깐.”

    한 헌터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홍예성 님 계셨던 칸 옆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요? 문이 닫혀 있는 게….”

    “엉? 사람 기척은 안 느껴지는데?”

    “청소 도구함이라 닫아 놓은 것 아닌가.”

    “원래 청소 도구함 문을 안에서 잠그나요?”

    의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소리 없는 발걸음’을 믿고 안에서 뻐기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인 척 연기하거나. 헌터 한 명이 문 앞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의재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눈을 질끈 감고서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아, 안에 사람 있습니다….”

    조금 느슨해졌던 헌터들의 기세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헌터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밖으로 나와주시겠습니까?”

    의재는 해장국집에서 본 좀비들을 떠올렸다. 세상 풍파를 정면으로 맞아 사람 같지 않은 흐트러진 몰골. 반듯하게 맨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하고 셔츠 단추도 하나 푼 후, 단정히 여몄던 재킷까지 풀어 흐트러진 차림을 훌륭히 연출해냈다.

    목에 건 사원증까지 일부러 잘 보이게 고쳐 맨 그는 문을 연 최고요마냥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잠금을 풀고 나섰다. 의재는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을 위해 연기 컨셉을 몇 개 정해 놓았더랬다. 이번에 써먹을 콘셉트는 다음과 같았다.

    간신히 파도 길드 비서팀에 입사했는데 이사영 길드장과 단둘이 외부에 나오게 되어 존나게 긴장한 나머지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해버리고 만 비서팀의 신입 직원.

    “…….”

    “…….”

    삐삐대는 경보음이 울리고 시뻘건 조명이 번쩍이는 와중, 화장실 맨 안쪽 칸에서 기척 없이 기어 나온 정장을 입은 방독면. 심지어 후들대는 다리와 팔을 보아하니 몸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간장게장마카롱만두 같은 인간을 실제로 목격한 헌터들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방독면은 화장실 문고리를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게, 제가, 너무 긴장을 해서.”

    “혹시 어디 소속이신지….”

    “파, 파도 길드 비서팀…입니다.”

    “파도 길드요?”

    “예, 장인전에 이사영 길드장님을 보좌하러… 왔는데, 우웁.”

    의재가 방독면의 필터 부분을 붙잡고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파도 길드의 이사영. 그를 혼자 보좌하러 온 거라면… 긴장할 만도 했다. 헌터들의 시선이 애잔한 빛으로 물들었다. 목에서 달랑대는 파도 길드 사원증이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그때였다. 소리 없이 지척으로 다가온 익숙하고도 흉흉한 기운을 깨닫기가 무섭게, 검은 인영이 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곧이어 낮게 빈정대는 목소리도 들렸다.

    “경호원들끼리 꽤 사이가 좋은가 봐….”

    의재에게 향해 있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쏠렸다. 이사영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다른 쪽엔 시선도 주지 않고 의재를 향해 올곧게 걸어오고 있었다.

    “다 같이 화장실도 다니고.”

    탁. 검은 워커가 차의재의 앞에 멈췄다. 깜빡대는 붉은 조명 아래, 찢어질 듯 울리는 경보음을 뒤로하고 위압적인 그림자가 의재 위에 드리워졌다. 그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비서님 마음의 준비는. 끝나셨고?”

    저 빈정대는 말투가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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