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65화 (65/67)
  • 65화

    의재의 업보와 사영의 협박으로 송도행이 결정된 이후,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장인전 당일 새벽이 되었다.

    의재는 사영이 보내준 감색 정장과 구두를 신고 해장국집 앞에 서 있었다. 문에 달라붙은 A4 용지가 새벽바람을 맞으며 처량하게 흔들렸다.

    장인전 당일 문을 닫습니다.

    사유 : 할머니 모시고 병원에 갑니다.

    └할머니 건강하시길!!

    이사영이 보낸 정장은 넉넉하거나 작은 것 없이 딱 맞아떨어졌다. 대체 옷 사이즈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의재는 괜히 재킷 소매를 만지작댔다.

    잠시 후, 시커먼 인영이 골목 너머에서 나타났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사영이었다. 해장국집까지 천천히 걸어온 사영은 팔짱을 낀 채 차의재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라, 의재도 덩달아 도끼눈을 떴다.

    “왜.”

    “넥타이….”

    “응?”

    “잘 맸네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의재는 내심 뿌듯함에 어깨를 으쓱였다. 우튜브에서 보고 따라 한 보람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영은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툭 건드려 흐트러뜨렸다.

    “못 맬 줄 알았는데.”

    “시비 거냐?”

    “못 매고 있으면 내가 매주려고 했죠.”

    “이게 새벽부터 또 개소리야.”

    의재가 혀를 쯧쯧 찼다. 대답 없이 넥타이만 한참 동안 매만지던 사영은 곧 인벤토리에서 웬 사원증과 방독면을 꺼내 내밀었다. 처음 보는 평범한 남성의 얼굴 사진과 함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파도 길드 비서팀 김승빈.’

    의재는 사원증을 목에 걸며 물었다.

    “진짜 있는 사람이야?”

    “네. 일단 이거 쓰고.”

    방독면을 뒤집어쓰자 검은 장갑이 다가와 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땐 낡은 해장국집 앞에서 방독면이 방독면을 도와주는 이상한 꼴일 게 분명했다. 이른 새벽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사영이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니까… 가서 말할 땐 목소리 최대한 죽여요. 나한테만 들리게.”

    의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손가락이 방독면 필터 부분을 톡 건드렸다.

    “그리고 헌터들 귀 좋은 거 알죠.”

    “…….”

    “지금부터 형은 파도 길드 비서팀이잖아요.”

    낮은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섞였다. 의재는 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 대충 예상이 돼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영은 방독면 너머로도 알겠다 싶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존댓말. 할 수 있죠?”

    의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새끼… 일부러 같이 가자 그랬나? 물론 이사영의 의견이 타당하긴 했다. 비서팀이 상사한테 반말을 찍찍 하면 당연히 눈에 띄겠지.

    의재는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지금까지 다져온 연기 실력을 드러낼 때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호칭은. 길드장님?”

    “이사영 길드장님.”

    “너무 길어.”

    “거기 길드장급이 몇 명이나 올 텐데…. 다른 놈들이 듣고 헷갈리면 어떡해요.”

    “어. 그냥 길드장님이라고 부른다.”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무시하고 대꾸하자, 사영이 인벤토리에서 긴급 탈출 종이를 꺼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든가. 팔 잡아요.”

    “그거 남아돌아? 볼 때마다 쓰는 것 같은데.”

    “송도까지 운전해서 가긴 귀찮잖아요.”

    이게 무슨 부르주아 발언이란 말인가? 의재가 사영의 팔을 잡고 랭커들의 흥청망청 쓰는 금전 감각을 두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 한 순간이었다. 사영이 망설임 없이 긴급 탈출 종이를 찢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처음 보는 거대한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마 장인전이 열리는 송도 컨벤션 센터이리라.

    잘 정돈된 길에 쭉 늘어선 가로등마다 티켓과 동일한 디자인의 장인전 배너가 걸려 있고, 센터 외벽에도 홍예성이 따봉을 한 거대한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2년 만에 돌아온 장인!

    기인 홍예성의 장인전 匠人展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의 기척은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입구 근처에 두툼한 패딩과 담요를 두르고 웅크린 방송국 기자와 팬들이 몇 명 보이긴 했지만, 헌터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의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센터의 널찍한 입구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헌터 네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방독면 둘을 발견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아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둘.”

    사영은 망설임 없이 블랙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허둥지둥하던 헌터가 곧 손바닥만 한 기계로 티켓을 스캔했다. 검은 표면 위에 푸른 빛이 별처럼 떠올라 글자를 만들어냈다.

    藝星

    “그, 예, 티켓 확인되셨습니다. 파도 길드장 이사영님과, 옆에 계신 분은….”

    “비서.”

    헌터의 시선이 의재의 목에 건 사원증에 닿았다. 헌터는 방독면 안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댔지만, 사영의 차가운 시선을 받자 냅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두 분 입장하십시오.”

    이사영 프리패스는 위대했다. 방독면을 벗는 인증 절차도 없이 센터에 들어오다니. 역시 권력의 맛이 이런 건가 싶었다. 의재는 센터 안을 둘러보다 구석에 보이는 화장실 표시를 확인하곤 사영의 등을 쿡 찔렀다.

    “길드장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앞서 걷던 사영이 홱 의재를 돌아보았다. 대놓고 마음에 안 든다는 아우라가 넘실거렸다.

    “…오자마자 날 혼자 두겠다고?”

    “하루 종일 존댓말을 하려면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아하….”

    팔짱을 낀 이사영이 빈정대기 시작했다.

    “김승빈 씨가 준비성이 철저한 타입은 아닌 것 같던데?”

    “마음의 준비를 안 하면 도중에 욕설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

    “…….”

    두 방독면 사이로 침묵의 스파크가 튀었다. 뭐. 내가 화장실 가겠다는데 어쩔 거야.

    결국 사영이 먼저 손을 까딱였다. 허락의 의미인 것 같았다. 의재는 슬그머니 뒷걸음질로 사영의 옆에서 물러나 아까 봐둔 화장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움직이는 내내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안 따라오는 게 어디인가!

    다행히 화장실에서도 별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의재는 가장 안쪽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근 후, 변기 뚜껑 위에 걸터앉아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장을 받은 날부터 오늘까지, 넥스비의 도움을 받아 유명한 헌터들의 인적 사항을 달달 외우고 정신을 바짝 집중했더니 벌써 진이 다 빠졌다. 게다가 방독면 때문에 시야가 한정되니 더 예민했다.

    ‘이사영은 어떻게 이걸 맨날 쓰고 사는 거야?’

    J일 때 쓰고 다녔던 가면은 목소리 변조까지 알아서 해주는 귀한 물건이었다. 답답한 방독면을 쓰고 있으려니 제 가면이 새삼 그리워졌다. 이곳으로 튕겨 나오기 직전에 서해 균열에서 깨져버려 다시 쓸 수도 없지만.

    의재는 슬그머니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해장국집 단골들에게 선물 받은 포션과 넉넉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바실리스크의 송곳니, 만악의 근원인 마석 그리고 블랙 티켓 두 장.

    포션을 제외하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컨벤션 센터가 뒤집힐 만한 놈들이 인벤토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문제아 반에 배정받은 담임 선생님의 마음이 이런 걸까? 의재는 되어보지도 않은 교사의 마음을 일부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문제인 건… 마석과 블랙 티켓이다. 마석이야 그렇다고 치고, 이 망할 티켓은 마음 같아선 이불 속에 그대로 쑤셔 박아두고 싶었지만.

    ‘존나 불안하다….’

    대충 잡아도 두 개 합쳐 백억쯤 되는 티켓을 이불 사이에 넣어놓고 외출하기엔 의재의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해장국 집에서 일할 때야 그 근방이 전부 자신의 시야 아래에 있으니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가게와 한참 떨어진 송도에 온 지금은 가게에 갑자기 웬 도둑이 들어와도 모를 수 있는 거다.

    ‘차라리 내 손안에 두는 게 마음 편해.’

    불을 켜놓고 나갔다가 해장국집이 타버릴 뻔한 상황이라든가, 뒷일 생각 안 하고 각성자들을 후드려팼던 상황 등…. 의재는 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들을 몇 차례 겪고 나니 만약이라는 경우를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놈의 인생은 뜻대로 굴러가질 않으니까.

    자, 그럼…. 이사영이 없는 공간에 들어왔으니 빠르게 할 일을 마쳐야 했다. 의재는 강제로 입장 당한 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랭커 채팅을 오랜만에 켰다. 지뢰투성이인 송도에서는 정보가 가장 중요하니까.

    1번 랭커 채널은 가장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장인전에 왔는지, 뭘 노리고 있는지, 현재 위치는 어디인지. 이사영이 옆에 있긴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위험은 의재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피해야 했다.

    의재는 스크롤을 쭉 올려 오늘 자정 근방의 채팅부터 차근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채팅의 시작은 인하트 중독, 채팅 중독 홍예성이었다.

    [8] 나는장인이다 : 장인전의 날이 밝았스빈다^^

    [8] 나는장인이다 : 1번 채널 분들 다들 오실 거죠?

    [6] 허니비 : 예성아

    [6] 허니비 : 레이피어 구워놨니?

    [8] 나는장인이다 : 저는 토종 한국인이라 양놈 무기는 취급 안 합니다.

    [6] 허니비 : 저 ****

    [6] 허니비 : 송도에서 목 닦고 기다려

    [11] 방패가이 : 오ㅋㅋㅋ 허니비 티켓 구함?

    [6] 허니비 : ㅇㅇ

    [6] 허니비 : 마태복음이 구해옴

    [8] 나는장인이다 : 마태복음 아니었으면

    [8] 나는장인이다 : 송도에서 티켓 삥뜯고 있었을듯

    [6] 허니비 : 진짜 디졌다 니는

    [11] 방패가이 : 애가 철이 없어서 그래

    [11] 방패가이 : 니가 한번만 봐줘라;;

    [6] 허니비 : ㅡㅡ

    [6] 허니비 : HB길드에선 나랑 마태복음이 가는데

    [6] 허니비 : 방패가이도 옴?

    [11] 방패가이 : ㅇㅇ

    [6] 허니비 : 이사영은?

    [11] 방패가이 : 간다고는 하던데…

    [11] 방패가이 : 따로 움직여서 나도 몰르겠다;;

    [6] 허니비 : 아니 먼 니들은 몇명이나 된다고 따로움직이니?

    [11] 방패가이 : 몰라 그래도 법카는 받음 --v

    [4] 정빈 : 1번 채널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2년 만에 장인전이 또! 찾아왔군요^^

    [4] 정빈 : 장인전 참석 시 꼭 숙지해야 하는 내용! 리마인드를 위해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8] 나는장인이다 : 시작됐다……

    [4] 정빈 : 부디 사고 치지 마시고^^

    [4] 정빈 : 남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마시고^^

    [4] 정빈 : 아예 그냥 타인과 말을 섞지 않으시는 걸 강력히 추천드리며^^

    [4] 정빈 : 다른 헌터와 부딪히지 않게 안전거리 항상 유지하시고^^

    [4] 정빈 : 어깨 부딪혔다고 건물이 부서지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주시고^^

    [4] 정빈 : 정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기자들의 눈이 없는 은밀한 곳에서 처리한 후 각관국 현장대응1팀에 연락 주시길 바라고^^

    [4] 정빈 : 기자들 협박하지 않으시길 바라며^^

    [4] 정빈 : 이상 장인전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많은 협조 부탁드리면서 절 1:1로 만나는 일이 없도록 잘해주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50] 낭만오프너 : 한마디가 아닌디..

    [34] 아주작은기적밍기적 : 읽어보면 일단 한마디가 맞긴 합니다.

    [50] 낭만오프너 : 안 궁금한디..

    정빈이 적어놓은 고봉밥을 읽어 내리다 보니 저절로 숙연해졌다. 자존심 세고 성질머리 더럽고 예민한 헌터들이 한곳에 모이니 사고가 안 날 수가 없겠지….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 웬 가벼운 인기척 하나가 거의 뛰다시피 바쁜 걸음으로 화장실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의재는 다 읽지 못한 채팅을 닫아버리고 다급히 기척을 숨겼다.

    <소리 없는 발걸음!>

    우두머리 들소를 뒤따르듯 다른 인기척들도 우르르 몰려왔으나, 다행히 그들은 화장실 안에는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멈췄다.

    끼이익, 쾅.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은 하필 자리를 잡아도 의재의 바로 옆 칸에 자리를 잡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부스럭대는 소리만 들리는 걸 보니 볼일을 보러 온 건 아니고, 홀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 온 것 같았다.

    “에이씨, 이거 왜 이렇게 안 돼.”

    궁시렁대는 목소리가 낯익었다.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음성이었다. 의재는 뜨악한 심정으로 옆 칸과 맞닿은 벽면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옆에서 들려온 그것은…

    ‘미친.’

    재방송에 재방송에 재방송을 거듭한 위퀴즈에서 계속 흘러나온…

    ‘홍예성이다.’

    홍예성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