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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64화 (64/67)
  • 64화

    “오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지?”

    고개를 든 의재는 그대로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살풋 말린 입꼬리와는 달리 서늘한 기색이 감돌았다.

    [특성 포커페이스(B)가 활성화됩니다.]

    ‘미친놈. 눈치 존나 빠르네.’

    다행히 포커페이스 특성이 알아서 활성화되었다. 의재는 무표정 아래로 남우진에 대한 의심을 떠올렸다. 설마 전부 알고 꺼낸 이야기인가? 남우진이 이사영에게 뭐라고 언질이라도 준 걸까? 둘은 협력 관계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곧 의심을 지워냈다. 그때의 남우진은… 정말 순수하게 이사영의 과거사를 듣는 의재를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이사영의 조력자가 수상할 만도 한데, 그의 정체도, 그에 대한 의문도, 어디선가 나타난 실력자에 대한 일말의 의문도 없이. 그저 차의재의 존재 자체를 꿰뚫어 보는 듯했던 그 시선은 마치….

    ‘가치를 확인하는 것처럼….’

    의재는 소리 없이 침을 삼켰다. 마약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지만, 굳이 블랙 티켓을 두 장이나 준 건 그의 기준 혹은 시험을 통과했다는 증명일지도 모른다.

    남우진은 새로운 지식과 진리를 찾아내는 것에 목마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 새롭게 나타난 존재인 차의재를 분석하려 했을 테다. 하지만 잠깐 관찰한 게 전부이니 수집한 정보는 지식이라 부르기엔 완벽하지 못했겠지.

    타고나길 학자인 그가 완성되지 않은 책을 자신의 도서관에 꽂아둘 리는 없고. 이 예상대로라면 남우진은 이사영에게 단둘이 나눈 대화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이사영의 눈치가 짐승처럼 빠른 게 맞다.

    결국 자신의 바뀐 태도만 보고 저런 반응이라는 건데, 조금 켕기는 게 있어 무르게 굴었다고 이렇게 경계할 일인가 싶었다. 어느새 가늘게 뜬 눈은 ‘형이 언제부터 이런 걸 주는 사람이었어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이거…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다느니 한 것 치고 본인도 너무 신뢰가 없지 않나? 의재는 어이가 없었지만 우선 성실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잘해주긴 무슨. 내가 뭘 했다고.”

    “이거.”

    사영이 장갑을 낀 손으로 종이컵을 툭 건드렸다.

    ‘이거?’

    의재는 종이컵을 한 번, 사영을 한 번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미숫가루 하나 타줬다고 잘해준 거면 이사영의 잘해줌의 역치는 얼마나 낮은 걸까. 의재는 바로 대꾸하려다 문득 사영의 얼굴을 보았다. 섬세한 얼굴에는 의심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이놈은 그냥… 어린애가 아닐까? 하은이보다는 기분이 덜 자주 바뀌는.

    “이 짧은 시간 사이에 태도가 바뀔 만한 일이….”

    슬쩍 고개를 기울인 사영이 중얼거렸다.

    “남우진을 만난 것밖에 없어서.”

    “…….”

    “그 새끼가 입을 좀 잘 털긴 하거든요….”

    그건… 그랬다. 잠깐 말을 섞어본 정도지만, 상대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본인 할 말만 휘몰아치듯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영이 종이컵의 윗부분을 문지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형이 사람 말을 잘 듣는 인간도 아니라… 더더욱 의심스럽지.”

    ‘갑자기 말로 공격하네.’

    “그 새끼가 뭔데 우리 사이에 끼어드나 싶기도 하고.”

    우리 사이가 뭔데. 계약 관계? 의재는 바로 받아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하는 사영의 기세가 생각보다 흉흉했던 탓이다.

    그사이, 사영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뭐…. 이 정도면 내 추리는 다 말한 것 같은데.”

    어디 대답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모양새에 의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남우진이 이사영의 과거에 대해 말한 건 우선 숨기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이놈 없는 자리에서 뒷이야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남우진이 없는 데서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의재는 변명거리를 생각하다… 포기했다. 그는 머리를 벅벅 헤집으며 솔직하게 대꾸했다.

    “넌… 잘해줘도 지랄이냐? 미숫가루 하나 타준 거 가지고 잘해줬다 하는 것도 웃기네.”

    “…….”

    “아, 그래. 고마워서 그런다, 왜.”

    사영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고마워요? 뭐가?”

    “할머니 병원 모시고 가줬잖아.”

    “그건 애초에 계약 조건이었고, 내가 먼저 제시한 건데요.”

    “아니… 하은이도 봐줬고.”

    “…….”

    여전히 공익 광고의 그 손동작을 해줬다는 말은 믿을 수 없지만, 어쨌든 하은이가 도서관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옆에 있어주긴 한 것 아닌가. 의재가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균열에 휩쓸렸을 때도… 네가 와줬고, 그것도 따지자면 계약이긴 한데.”

    생각해보면 J로 활동할 때는 누군가 도와주러 온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도우러 가면 갔지. J니까. 오롯이 그의 힘만으로 모든 걸 헤쳐나가야 했었다. 그게 당연했다.

    “…….”

    짧은 침묵이 찾아왔으나 머릿속이 복잡해 침묵을 인지할 겨를도 없었다. 말하고 나니 의재의 생각보다 이사영과 엮인 일도, 도움을 받은 것도 은근히 많았다. 한번 말하기 시작하자 이사영의 미담은 둑이 뚫리듯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의재는 입가를 문지르다 슬쩍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하필이면 또 김치 및 밑반찬 자동 셀프바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운데에 떡하니 박혀 영롱하게 빛나는 마석도 함께.

    “마석 지원은 이사영 파도 길드장님이 해주셨습니다.”

    미친, 저것도 이사영이야? 의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급하게 덧붙였다.

    “뭐… 그때 너 없었으면… 가게에 불이 났을 수도 있고. 구급차 절도범으로 수배범에 올랐을지도… 모르지.”

    “설마… 구급차 훔치려던 거 진짜였어요?”

    “…….”

    킥, 짧은 웃음이 터졌다. 사영이 입가를 슬쩍 가리고 웃고 있었다.

    “면허는 왜 물어보나 했더니.”

    “…….”

    “진짜 또라이네.”

    닥쳐, 네가 뭘 알아. 가게가 불탈 뻔했는데.

    또라이에게서 또라이로 인정받은 의재가 인상을 팍 구겼지만, 반대로 사영의 얼굴에선 의심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게다가 오히려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그가 은근하게 채근했다.

    “그리고요.”

    “그리고는 무슨, 또 뭐.”

    “고마운 거 더 없어요?”

    “더는 무슨, 말할 것도 없어, 이제.”

    그냥 남우진한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할 걸 그랬나? 쥐뿔도 없는 남우진과의 의리를 지켜보려다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사영의 추궁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분위기는 어느새 녹진히 풀린 채였다. 날카롭던 사영의 기세도 어쩐지 뭉글뭉글했다.

    의재가 차오르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슬그머니 한 손으로 눈가를 짚은 때였다.

    “참… 사람에 대한 신뢰는 없는데 또 허들은 낮아.”

    빈정대는 말투였지만 비웃는 기색은 아니었다. 사영이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렇게 고마우면 내 데이트 신청 받죠.”

    젠장,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의재가 이를 악문 채 대꾸했다.

    “싫어.”

    “왜요?”

    “그냥 가기 존나 싫어.”

    1위에서 밀려났어도 어쨌든 국내 2위는 2위다. 이사영은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것이 뻔했다. 그 옆에 붙어 이동하는 비서에게도 한 번쯤 시선이 닿겠지. 심지어 방독면도 꼈으니까.

    “너도 나보고 조용히 살라며. 여기서 해장국이나 팔게.”

    “조용히 다녀올 수 있다니까요.”

    의재는 이 안락하고 조금 시끄러운 해장국 집에서 나가 제 발로 전쟁터에 발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사고가 많아도 너무 많았기에 자숙 기간을 가질 셈이었다. 그러나 이사영은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날 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건데?”

    “데이트.”

    “데이트 같은 개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음, 혼자 가기 외로워서?”

    이사영은 가끔 멀쩡한 얼굴로 씨알도 안 먹힐 말을 던졌다. 의재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배원우 씨는 안 가? 너네 부길드장.”

    “뭐… 가겠죠.”

    “그럼 배원우 씨랑 움직이면 되잖아.”

    “내 이름은 자주 안 불러주면서 배원우는 풀네임으로 잘만 불러주네.”

    “하…. 이사영 너 존나 까다로운 거 알지.”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이름이 불리고서야 만족스럽게 대답한 사영이 음, 하고 말꼬리를 늘렸다.

    “배원우는 다른 길드원들이랑 다닐 거라….”

    “거기 껴.”

    “그러면 안 되죠. 상사랑 다니면 불편하잖아요.”

    이사영이 가르치듯 말했다. 아니 네가 언제부터 아래 직원 배려를 그렇게 했다고. 의재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다시 두 손으로 턱을 괸 사영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거 말하면 형이 고마워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날 텐데.”

    목소리에 웃음이 섞인 걸 보니 이쪽이 불안해하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형이 굴비처럼 엮어온 놈들. 기억해요?”

    굴비라…. 아마 인천항에서 잡아온 놈들을 말하는 것일 테다. 의재는 여전히 눈가를 짚은 채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형이 좀… 무식하게 몸부터 들이댔잖아요. 내 문자도 씹고.”

    문자 하나 안 읽은 걸로 뒤끝은 또 엄청나게 길었다.

    “수송차에 태우기 전에 좀 건드려봤는데… 그놈들이 형을 꽤 자세히 기억하고 있더라고.”

    ‘씨X.’

    아뿔싸, 그 점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의재는 손바닥을 꾸욱 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낭만오프너에게는 기억 삭제술을 시전했지만, 굴비들에게는 물리적인 타격만 가했지 기억 삭제술을 빙자한 협박은 깜빡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가면을 쓰고 활동한 탓인지, 의재는 얼굴 가린 것만 믿고 몸부터 나가는 버릇을 영 고치질 못했다. 눈을 짚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사영이 느긋하게 말했다.

    “각관국에 연락해서 수송차도 불러놨는데…. 그대로 보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각관국이라니. 의재는 자신이 눈이 돌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속으로 참회하기 시작했다.

    정빈은 차의재가 D급 각성자인 줄 안다. 그런데 D급 각성자가 20명의 깡패 무리를 홀로 상대해 묵사발을 냈다? 심지어 B급 각성자까지? 그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자신은 각성자 관리국에 잡혀들어가, 정빈과 1:1 면담을 하게 될 게 뻔했다. 등에 식은땀이 죽 흘렀다.

    “다행히 우리 길드 지하에 있어요, 아직. 언제 각관국에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걔네가 나에 대해 말하면 너도 불리해지는 거 아냐?”

    “뭐, 그래봤자 형보다는 타격이 덜하겠죠. 난 빠져나갈 구석도 있고.”

    이사영은 한 문장으로 끝날 말을 엄청나게 돌려 말하고 있었다.

    같이 죽을래, 송도 갈래.

    “원래… 거절하면 억지로는 데려가지 않으려고 했는데요.”

    “…….”

    “형이 작은 걸로도 이렇게 고마워하니까….”

    눈을 짚은 손등 위로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닿았다. 사영이 눈가를 짚은 손을 잡아 부드럽게 떼어냈다. 가까운 곳에서 시선이 얽혔다. 아까 마주했던 서늘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예쁜 얼굴에는 미소만 남아 있었다.

    “더 해주고 싶네요, 이것저것.”

    ‘필요 없어, 개자식아….’

    의재는 솔직한 게 항상 좋은 것은 아님을, 28년 만에 새롭게 배웠다.

    * * *

    이튿날, 오전 5시 30분. 의재는 가게 오픈 전 따개비들이 붙을 자리를 정리하고자 빗자루를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한 외투를 입은 낯선 남자가, 웬 커다란 상자와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싸늘하다….

    ‘분명 화환도 이런 식으로 배송 왔던 것 같은데.’

    차의재의 불길한 예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고 맞아떨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배달원이 미닫이문에 붙은 해장국 글씨를 보고 아, 소리를 냈다.

    “여기서 일하는 분이세요?”

    “…….”

    “택배 왔습니다.”

    무슨 택배가 이렇게 이른 아침에 온단 말인가. 택배 및 등기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의재의 표정이 싹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달원은 의재에게 상자를 턱 건네주고 훌훌 떠나가버렸다.

    의재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해장국집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송장에 적힌 품목부터 확인했다. 명품 브랜드의 남성 정장과 구두였다.

    보낸 사람은… 이사영.

    의재는 직감했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음을.

    “씨X….”

    아련한 욕설이 새벽 공기를 타고 흩어졌다.

    차의재, 장인전행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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