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사영은 의재가 설거지와 청소를 다 끝내고, 내일 장사 준비까지 끝마친 시간에 맞춰 문을 똑똑 두드렸다. 어디선가 지켜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의재는 주방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어 문을 확인했다가, 유리 위에 둥둥 뜬 시커먼 방독면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할 말이 있어서.”
속삭이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또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걸까? 의재는 단단히 묶었던 앞치마 끈을 풀며 문가로 향했다. 사영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듯 얌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어주니 검은 인영은 그제야 한걸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앉지도 않고 한다는 말이…
“송도 가봤어요?”
이거였다.
의재는 떨떠름한 얼굴로 반질반질한 블랙 티켓과 그것을 쥔 검은 장갑, 검은 방독면을 차례로 번갈아 보았다. 이 자식은 그간 쌓인 정으로 조금 반겨줘볼까 하면 매번 주머니에서 폭탄을 꺼내니 어떻게 반겨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블랙 티켓이 왜 이렇게 흔해?’
이거 분명 매물이 씨가 마르고,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몇십억짜리 티켓 아니었던가? 해장국집 단골들은 이 종이 쪼가리 하나를 구하고 싶어서 별 난리를 다 치던데, 왜 가만히 있는 자신에게는 세 장씩이나 넝쿨째 굴러들어온 건지 모를 노릇이다.
의재는 일반인은 보기조차 부담스러운 티켓으로부터 슬쩍 시선을 돌리고 말도 돌렸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응?”
사영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더니 성실하게 대답했다.
“장사 중에 오면 장사 안된다고 노려볼 거잖아요.”
‘씨X, 말을 왜 그렇게 해.’
말을 돌리려다 냅다 정곡을 찔린 의재가 슬그머니 천장을 보았다.
사실 이사영의 말이 맞긴 했다. 이 녀석이 저녁 장사 시간에 왔으면 또 이사영 ZONE이 생겼을 테고, 저녁 장사는 시원하게 밥 말아 먹었을 테고, 의재도 떨떠름한 얼굴로 사영을 봤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사영이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지들이 지레 겁먹고 내 옆에 안 오는 건데 별수 있나.”
어쩐지 블랙 티켓을 든 방독면이 시무룩해 보였다. 방독면에는 표정이 없는데도!
머릿속에 남우진의 말이 뭉게뭉게 안개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골목길에서 사람을 걷어차던 방독면과 검은 혀를 보여주던 이사영, 뻔뻔하게 공익 광고에 얼굴을 들이민 방독면, 프로메테우스의 실험체, 이불과 베개를 잔뜩 들고 온 이사영, 독으로 전부 녹아내린 폐허에 홀로 앉아 있었을 이사영, 균열의 주인을 단숨에 녹여버린 후 괜찮냐고 묻던 이사영, 깨진 편린 속 J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중얼대던 이사영, 그리고….
J가 구했으나 자신은 더 이상 J가 아니라,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는 아이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얼마 전까지, 의재의 눈에 비친 이사영은 싸가지 없고, 귀찮고, 이상하고, 존재만으로도 의재의 작고 조용한 삶을 걷어차버리는 또라이였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으니까. 손님 많은 걸 제외하면 나름 조용하던 해장국집이 박 터지기 시작한 것도 이사영 덕분이고.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이사영과 의도치 않게 부대끼면서 의재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아버렸다.
“음, 일종의 족쇄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족쇄를 걸었다는 게 이거였나. 양심의 족쇄? 나한테 걸 게 없어서 이사영에 대한 족쇄를 걸어놨단 말이냐? 의재는 최근 들어 있는 놈들이 더 한다는 말을 절절히 체감하고 있었다.
‘랭커들 정신 교육 한번 깔끔하게 해야 된다…. 애들이 욕심만 많아서….’
의재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영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목소리도 조금 컸다.
“내가 형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좀 알려나.”
“어어, 알지.”
의재가 영혼 없이 대답하며 소리 죽여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사영은 그 작은 움직임을 용케 귀신같이 알아챘다. 방독면 너머 눈이 번뜩였다.
“어디 가요.”
“응? 주방.”
“내 질문엔 대답도 안 하고?”
“아니… 시간 많잖아.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해. 너 커피 마셔?”
대충 둘러대는 말이었음에도 날카로운 기세가 순간 확 가라앉았다. 사영이 눈을 굴렸다. 마치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시선이 왼쪽 위에 한참 머물렀다. 꽤 오랜 시간 침묵하던 그가 중얼거렸다.
“…글쎄요?”
이 애매한 대답은 뭐란 말인가? 덩달아 심각해진 의재는 팔짱을 끼고 고심하다 손짓했다.
“…잠깐 앉아서 기다려봐.”
사영은 의외로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방독면을 벗는 것까지 확인한 후, 의재는 주방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이 늦은 시간에 커피를 줘도 되나?’
물론 카페인이 S급 각성자의 몸에 영향을 끼치진 못하겠지만, 이사영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만… 기분이란 게 있다. 해장국집 단골 헌터들이 소주를 마신다고 취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두 병 넘게 마시려 드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게다가 이사영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사영도 잠을 잘 자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예민한 S급 각성자가 으레 다 그렇듯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입맛 까다로운 9세 초등학생의 입맛도 사로잡은 필살 레시피를 보여주는 수밖엔. 의재는 냉장고에서 검은 봉다리와 소백산 아카시아꿀을 꺼냈다. 비장하게 숟가락을 쥔 그의 등 뒤로 황금빛 후광이 비쳤다.
[특성 생활 속에 녹아든 전투(S)가 활성화됩니다.]
잠시 후, 자신 있게 걸어온 의재는 종이컵 하나를 사영의 앞에 탁 내려놓았다.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론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던 사영이 멈칫하더니 물었다.
“이게 뭐예요?”
“미숫가루.”
그냥 미숫가루도 아니고, 미숫가루와 꿀은 물론 하은이 간식으로 주려고 사둔 흰 우유까지 써서 만든 비장의 미숫가루였다. 일회용 종이컵에다 줬으니 식기값 걱정도 덜었다. 이사영도 챙기고, 돈도 아끼고. 일석이조다.
그러나 눈앞에 내민 컵을 보던 사영의 얼굴에는 의심스러운 기색이 깃들었다.
“커피는?”
“너 잠 잘 못 자잖아.
“…….”
사영이 묘한 얼굴로 의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재가 혀를 쯧쯧 찼다.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놈이 무슨 커피야, 커피는. 미숫가루나 마셔.”
핸드폰을 내려놓고 종이컵을 쥔 사영이 중얼거렸다.
“잠 못 자는 건 형도 마찬가지인 것 같던데.”
“그래서 난 물 마시잖아.”
“…….”
사영은 더 대꾸하지 않고 순순히 방독면을 벗어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곤 다시 한번 종이컵과 안에 담긴 액체를 살피더니, 미숫가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의재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그 얼굴을 관찰했다. 검은 혀로 입술을 핥은 사영이 눈을 깜빡였다. 움직임을 따라 긴 속눈썹이 팔랑였다.
“어쨌든. 송도는 가봤어요?”
의재는 이불 속에 고이 모셔둔 티켓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J로 활동할 때 전국 곳곳을 가봤지만, 의외로 송도에는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갈 생각이 없다. 텅 빈 종이컵을 내려놓은 사영이 턱을 괴었다.
“잘됐네. 이번 기회에 가봐요.”
“송도를? 왜?”
“여기저기서 시끄러울 텐데, 요즘.”
그가 턱짓으로 벽에 다닥다닥 붙은 사인지와 포스터를 가리켰다. 여기선 못 들었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할 터. 의재는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장인전인가 뭔가 하는 그거?”
“응, 그거요.”
“거길 내가 왜 가?”
“데이트하러.”
“미숫가루가 상했나, 씨X….”
의재의 표정이 구겨지든 말든, 사영은 뻔뻔히 말을 이었다.
“몇십억짜리 데이트 신청인데, 이거.”
사영이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티켓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이미 이불 속에 대충 백억 어치 티켓을 고이 재워둔 의재에게는 그리 와닿지 않는 데이트 신청이었다.
가야 할 이유는 없고, 가지 않을 이유는 많다. 의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제일 크고 튼튼한 방패를 들었다.
“송도 갈 시간 없어. 장사해야 돼.”
“할머니 병원 모시고 간다고 하고 하루 문 닫아요. 장인전 당일에만 가면 되니까.”
사영에게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마치 이런 문답이 오갈 거라 예상하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다 예습해온 사람처럼! 사영이 느긋하게 웃었다.
“주인 할머니 아프시다는데 어쩔 거야.”
“야, 할머니를 핑계로 쓰는 건….”
“정 걱정되면 최고요 붙여서 병원 모시고 가라고 할게요. 다음은?”
다행히 최고요는 잘 깨어난 모양이었다. 하긴, 인천항 사태부터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의재는 두 번째 방패를 들었다.
“D급짜리 헌터가 장인전을 어떻게 가? 티켓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면 어쩔 건데.”
“그것도 괜찮아요.”
이사영이 인벤토리를 뒤적이더니 새것처럼 보이는 방독면을 티켓 옆에 턱 내려놓았다. 낡고 촌스러운 초록색 테이블 위에 몇십억짜리 티켓과 방독면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
‘이게… 인지 부조화라는 건가?’
의재는 이사영의 공익 광고를 TV에서 처음 본 날처럼 혼란에 휩싸였다. 정작 남의 속을 잔뜩 헤집은 당사자인 사영은 여상히 말했다.
“이거 쓰고 파도 길드 비서팀이라고 소개하면 되거든.”
“…나보고 이걸 쓰라고?”
“나랑 외근 나가는 비서팀은 필수 착용이라 별로 특이하지도 않아요. 다들 그러려니 할걸.”
아니, 방독면 둘이 나란히 돌아다니면 존나 눈에 띌 것 같은데. 의재부터도 길거리에 방독면 둘이 지나가면 한 번쯤 돌아볼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의재는 이사영을 그냥 욕을 하며 쫓아낼지, 완곡한 거절의 말로 쫓아낼지 고민하던 차였다. 양손으로 턱을 괴고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던 사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형.”
“응.”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서원 길드 갔을 때.”
사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남우진 그 새끼가 뭐라고 했어요?”
“…….”
“오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