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이사영이… 뭐라고? 의재가 굳은 얼굴로 남우진을 보았으나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것들은,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J의 사망이 공표된 후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온 나라가 시끄러웠거든요. 정부가 제 역할을 가장 못해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나라의 전력을 잃고 혼란스러웠던 시기. 당연히 윗선에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많은 사건을 덮었으리라. 의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8년 속에 묻힌 것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어느새 정원을 지나 고요한 숲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짙은 초록 사이에서 남우진은 희게 빛났다.
“이사영은 한 연구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아니, 연구소…였던 곳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군요. 모든 것이 독에 녹아내렸거든요. 검은 폐허 한가운데에, 그는 헐렁한 환자복을 입은 채 홀로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자연히 균열에서 보았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저 사영의 손이 닿았을 뿐인데, 찬란한 정원은 한순간에 시커멓게 녹아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독 늪이 되어버렸다. 이곳만큼이나 푸르렀던 거대한 숲이 그의 손끝에서부터 부식되어가는 것을 의재는 코앞에서 목격했다.
A급 헌터인 밍기적조차 가까이 오지 않을 정도의 맹독. 자신도 바실리스크의 독 특성이 없었다면 이사영의 곁에서 온전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죠. 함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자칫하다간 죽을 게 뻔했으니까요.”
남우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보호 장구를 갖춘 정빈만이 그의 곁에 간신히 다가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마저도 독에 중독되어 따로 해독제를 마셔야 했지만요.”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드는 프로메테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연구소를 엉망으로 녹여버린 뒤 발견된 이사영. 그리고 지금의 사영은 그들을 쫓고 있다.
맞물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단서들이 하나하나 맞춰지고 있었다. 의재는 작은 불쾌감을 느끼곤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사영이 첫 번째 성공작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실험에 의해 각성한 건지, 혹은 시스템이 이사영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각성시켜준 건지.”
“…….”
“뭐, 저는 후자일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남우진은 꽤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도 여상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는 그쪽의 연구가 진척이 얼마 안 됐을 때라, 조금 더 특이점이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실험체로 썼습니다.”
“특이점이요?”
“예. 균열에 휘말린 적이 있다든가, 몬스터에게 공격받은 상처가 있다거나. 어쨌든 균열과 관련된 특별한 점이요. 거짓말 좀 보태서 아나키 상태나 다름없었으니 실험체를 구하기 위한 납치도 어렵지 않았을 거고.”
균열과 관련된 특별한 점이 있다, 라. 일순 의재의 귓가에 환청처럼 작은 속삭임이 맴돌았다.
“살려…주세요.”
맹독이 모든 것을 덮쳐 끔찍한 꼴이 되었던 균열 속, 독에 녹아버린 두 사람에게 끌어안긴 채 죽어가던 한 소년. 미약한 생존자의 기척을 쫓아 그다지도 헤매던 J는, 무너져내린 한 건물의 외벽을 뜯어낸 뒤에야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년은 독을 뒤집어써 전신이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용케 J를 바라보았다. 힘없는 입술이 달싹였다. 독 때문에 성대가 상했는지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세요.”
그 모습은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던, 17살의 차의재와 같아서… 의재는 소년의 손을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족을 모두 잃고 해독을 장담할 수 없는 비극 속이더라도. 앞으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게 되더라도. 그래서 모든 원망을 자신이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간절함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의재는 새하얀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쩌면 그 애도 이사영처럼 프로메테우스의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때 구해주는 바람에. 남우진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의재를 관찰하고 있었다.
문득 의재는 아까부터 자신이 느끼던 불쾌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새하얗게 타버린 눈을 피하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그걸 왜 제게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
사영이 그의 배경을 말하지 않은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도 숨기는 게 있듯이, 이사영도 숨기는 게 있겠지.
저와 사영의 거래는 서로가 깊은 속사정까지 파헤치지 않는 관계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그놈이 제 뒷조사를 하긴 했지만, 자신이 왜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자신 또한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사영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직접 말해주는 거라면 모를까.
“제가 이사영의 조력자라고 해서 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의재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남우진은 오히려 흡족한 얼굴이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런 반응을 하지 않았으면 더 곤란했을 테죠.”
“예?”
“음, 일종의 족쇄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더 따져 묻기도 전에 등 뒤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 웬 남자아이가 정원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말간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의재를 그대로 비췄다. 아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환자분의 치료가 끝나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주인, 그리고 손님.”
“그러면 슬슬 산책은 끝낼까요? 일행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정원은 사라지고 주변 풍경은 책이 빽빽하게 들어찬 도서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남우진이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며 앞서 나갔다.
언젠가 무너지고 삭을 수많은 책들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알까? 종말이 찾아오면, 그가 소중히 꾸린 이 도서관도 무너진다는 것을.
그때, 의재의 상념을 가르고 남우진이 질문했다.
“참. 혹시 홍예성이라고 아십니까?”
“네, 압니다.”
단순히 아는 걸 넘어서 그 빌어먹을 자식의 머리통을 한 대 때려주겠다고 일방적으로 다짐한 사이지. 의재는 인하트 마석 앵무새인 그를 향한 원한을 가슴속에 품은 이래로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중앙 홀에 도착하자 남우진이 뒤를 돌더니 의사 가운 안주머니에서 빳빳한 티켓 두 장을 꺼내 건넸다. 전시회 입장권처럼 생긴 검은 티켓에는 흰 붓글씨로 한글과 한자가 함께 쓰여 있었다.
‘장인전 匠人展’
“…장인전?”
“홍예성의 장비 경매를 장인전이라고 부릅니다. 며칠 뒤에 송도에서 열릴 예정이고, 티켓이 있는 사람만 입장이 가능하죠.”
티켓을 얼떨결에 받아 든 의재에게 남우진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홍예성의 제작한 장비를 경매하는 자리라면 S급 장비도 수두룩할 테다. 장비 욕심이 있는 헌터들은 눈이 돌아 반드시 참여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 티켓값도 무진장 비쌀 게 분명했다.
물론 의재는 장비 욕심이라곤 주방 도구 욕심뿐이었기에 웬 돌덩이를 받은 기분이었지만.
“이걸 왜 저한테…?”
“몸을 던져 PRO-009를 구해주신 보답입니다.”
남우진이 빙그레 웃었다. 의재의 머릿속은 혼돈의 카오스로 가득 찼다.
‘존나 처치 곤란인데. 이 쪼가리가 만악의 근원이 될 미래가 훤하다.’
이걸 어디서 구했다고 해야 한단 말이냐. 남우진이 줬다고 곧이곧대로 말해도 수상하고, 길 가다 주웠다고 하는 건 더 수상하다. 토마토 마켓에 올렸다간 마석 사태보다 더 큰 후폭풍이 찾아올 게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의재는 슬슬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저는 D급이라 이런 게 필요가 없는데요. 돈도 없는데 경매를 어떻게….”
“그럼 다른 헌터들에게 파십시오. 아마 이거 못 구해서 미쳐 있을 겁니다.”
아니, 그 미친 헌터들한테 미끼를 던져주고 싶지 않다고요. 이 티켓의 판매자가 자신이라는 꼬리가 밟히는 순간 그날로 해장국집이 터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결국 그의 손에는 장인전의 티켓이 다소곳하게 들리고야 말았다. 의재는 조금 울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서원 길드에서 차량을 준비해주었다. 할머니와 하은이가 나란히 타고, 의재와 사영은 그 뒤쪽에 나란히 앉았다. 하은은 지치지도 않았는지 종알종알 말을 걸었다.
“삼초온, 저기 진짜 재밌었어. 책도 많고, 지나다니는 아저씨 언니들도 친절하고. 만화책도 엄청 많아. 어떤 남자애가 나랑 색칠 공부도 같이 해줬어.”
“그랬어?”
“응! 아, 그리고…”
하은이 꾸물꾸물 뒤를 돌더니 손바닥을 쫙 펼치고, 다른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손바닥에 겹쳤다.
눈에 익은 손짓이다. 그야 저건 의재가 챙겨보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과 연속극이 끝날 때마다 방독면이 나타나 하는 짓거리였으니까! 의재의 표정이 떨떠름히 변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은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삼촌 옆에 있는 오빠가 이거 해줬다.”
“응?”
“이거 해달라고 하니까 스무 번도 넘게 해줬어!”
의재가 눈을 부릅뜨고 사영을 돌아보았다. 사영은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시선을 느꼈는지 의재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너….”
저걸… 실시간으로 해줬다고? 그것도 스무 번이나 넘게? 의재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의재를 지켜보던 사영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왜요. 너무 고마워서 미쳐버리겠어요?”
“…….”
“나도 몰랐는데 내가 애 돌보는 데에 재주가 있나 봐. 누구 덕에 알았지 뭐예요.”
“…….”
싸가지…. 네가 그 해괴한 짓을 잘도 해줬겠다.
아무래도 하은이 헛것을 본 게 분명했다. 의재는 사영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아프게 푹 찔렀다. 옆에 앉은 탄탄한 몸이 움찔했다.
* * *
“흐으억…. 허억….”
지리산 초입, 컬러풀한 등산복과 등산 모자, 선글라스까지 야무지게 챙겨 쓴 한 청년이 비척비척 산을 내려왔다. 어찌나 헥헥대는지 지리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한 번씩 흘끔 볼 정도였다. 게다가 웬 정장 입은 덩치들이 그의 뒤를 우르르 쫓아가니 더 그랬다.
한마음 산악회 총무, 정영숙 씨가 쫓기듯 산에서 내려가는 청년을 보며 혀를 찼다.
“어머머… 저 총각 신고해야 하는 거 아녀?”
“그러게요. 무슨 요원 같은 사람들이 산에 있네.”
“냅둡시다. 뭐 영화 찍는 거겠지.”
“워메, 나 영화 나오는 겨?”
한마음 산악회 회원들의 소곤거림이 멀어지고, 등산복을 입은 청년의 발이 비로소 평지에 닿았다. 청년이 털썩, 소리가 나도록 땅에 주저앉더니, 두 팔을 쭉 뻗어 만세를 했다.
“씨이X! 드디어! 드디어 탈출이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모자가 슬쩍 벗겨져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맑은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정장이 무전기를 꺼내 보고했다.
“예, 팀장님. 방금 홍예성 님 하산 완료하셨습니다. 바로 송도로 이동하겠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아!”
“예? 아뇨, 고라니 소리 아닙니다. 홍예성 님이 울부짖는 소리십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평지를 밟고 행복해하는 청년의 이름은 홍예성. 현존하는 유일한 S급 제작자. 지리산 반야봉에서의 기나긴 감금 생활을 마치고 속세로 돌아오다.
“끼야호오오옷!”
송도에서 열릴 경매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고 지금은― 장인전까지 일주일이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