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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60)화 (60/67)

60화.

사영은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턴 쉽다’는 세계의 법칙을 망각한 죄로, 무한 손가락 놀이의 굴레에 빠지게 되었다.

사영이 한 번 손 모양을 해주면, 하은은 ‘또!’를 외쳤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보여주면, ‘또!’를 한 번 더 외쳤다. TV에서 본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똑같은 짓을 해주니 꽤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렇게 스무 번가량을 해줬는데도 질리는 기색이 없었다.

사영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펼치며 생각했다.

‘독이 무섭지도 않은가.’

사람들은 대부분 제 가까이에 다가오지 않으려고 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방독면을 쓰고, 홍예성에게 특별 주문을 맡긴 방독 장갑을 끼고, 해독제를 늘 챙겨 다니는 데도 그랬다.

사영은 여기에 유감은 없었다. 오히려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숨을 쉴 때조차 잠깐 긴장을 놓으면 옆에 있던 사람은 죽어버릴 테니. 알아서 몸을 사려주면 신경 쓸 게 줄어드니 이쪽도 편했다.

하지만 박하은은, 그리고 차의재는 달랐다.

“또!”

사영은 ‘또’라는 말을 들으면 작동하는 기계처럼 손동작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박하은은 어려서 뭘 모르니 그럴 수 있다. 사영이 왜 방독면을 쓰고 다니는지, 왜 장갑을 벗지 않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혹은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체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린애들은 용감하다 못해 대범한 구석이 있으니까.

하지만 차의재는 이사영의 독에 당해 죽을 뻔했으면서, 거리를 두기는커녕 겁도 없이 사영의 팔을 덥석덥석 잡는다. 박하은처럼 뭘 모르는 나이도 아니고, 이미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위험한지 아는 사람이 그랬다.

사영은 그런 의재를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불가해가 불쾌하냐 하면….

‘죽을 뻔했으면서.’

아니. 썩 나쁘지 않았다. 물론 답답하거나 긴장되는 순간도 있었다. 차의재가 새빨간 피를 토하던 모습이 아직도 이사영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순간, 각성한 후로 처음으로 초조함이라는 감각을 맛봤었다. 어째서 해독제가 듣지 않는 건지. 그런 논리적인 의문은 당장 떠오르지도 않았다.

차의재가 죽어선 안 된다. 그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머릿속에선 적색 종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사영은 1급 던전에서 얻은 감로수를 망설임 없이 의재에게 사용했다. 그것의 금액, 가치,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 중요한 건 오직….

“또, 또!”

박하은이 다시 요구했다. 사영이 다시 한번 손 모양을 보여주는 와중, 흰 가운을 입은 남자아이가 그들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새하얀 백자 도자기로 만들어진 듯 매끈하고 섬세한 외형의 그것은 사실 남자아이가 아니라,

“이사영 님.”

남우진이 이탈리아의 인형사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받은 마리오네트였다. 아이는 표정 없는 얼굴로 사영을 올려다보았다.

“박하은, 이제 진짜로 가서 책 읽어.”

“에이….”

하은이 남자아이와 사영을 번갈아 보다가, 입술을 비죽대며 아동 서적 코너로 돌아갔다. 여태까지 계속 손 모양을 보여달라며 졸라댔던 것과는 대조되는 태도였다.

‘꼭 필요할 때는 눈치가 빠른 것도….’

사영은 의재를 떠올렸으나 곧 고개를 저어 이어지는 생각을 차단했다. 하은이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펼치는 걸 확인하고서야 사영은 고개를 까딱였다.

“말해.”

그러자 마리오네트가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사영 님께서 부탁하신 환자분의 진료가 끝났습니다. 주인께서는 치료 방법을 고르고 계시기에 제가 상황을 대신 전달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영이 간결하게 물었다.

“상태는?”

“주인께서는 류머티즘 관절염이라고 진단하셨습니다. 증상은 손에 먼저 나타났는데, 제때 치료하지 못해 무릎까지 번진 것으로 보입니다.”

“완치는.”

“약물치료와 꾸준한 관리를 병행하면 많이 호전될 거라 하셨습니다. 또한, 완치를 목표로 하기보단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통증을 줄이고 관리하는 쪽으로 갈래를 잡자고도 하셨습니다.”

“능력 사용은 하지 않는군.”

“예. 시스템 법칙이 아닌, 현실 법칙에 따라 발생한 자연적인 질병이기에 주인의 능력으로 치유가 불가능했습니다.”

“…….”

사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두 번째 용건을 꺼냈다.

“얼마 전 대량으로 보내주신 PRO-009는 실험 및 분석에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감사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PRO-009. 차의재가 몸을 던져 배낭째 구해온 마약의 임시 코드 네임이었다.

지금까지 입수해 분석한 마약들은 조금씩 변화하고, 강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마약을 분석한 후, 변동이 생겼을 때마다 숫자를 갱신했다. 이번에 발견된 건 이전에 입수한 마약과 또 차이가 있어 ‘9’라는 숫자가 붙었다. 아홉 차례의 발전이 있었던 만큼 그 위험성과 성능 역시 여태 발견된 마약들 중에서 가장 강력할 것이다.

마리오네트가 넌지시 덧붙였다.

“주인께서는 이사영 님이 잠시 실험실에 들러 분석 결과를 확인하시는 게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사서들이 돌보고 있겠습니다.”

“…….”

마리오네트의 말에 사영은 서늘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논리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제안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꼭 필요한 절차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분석 경과쯤은 추후 차근차근 보고받아도 될 일이다. 그럼 남우진은 왜 굳이 자신을 실험실로 쫓아내는가….

“…그러지.”

그 꿍꿍이가 무엇이든 남우진이 자신과 차의재를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신뢰가 아닌 합리에 기반하여 판단한 사영은 천천히 실험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완치가 불가능한 병은 아니지만,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병입니다. 당뇨처럼 평생 주의하셔야 한다고 보면 되겠군요.”

남우진의 진료실은 미로 같은 도서관에서도 가장 심부에 존재했다. 책에 질식할 것처럼 어둑한 도서관 복도를 지나 철제문을 열면, 여느 병원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의사의 진료실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길드원의 부축을 받아 물리 치료를 받으러 물리치료실로 향했고, 진료실에는 남우진과 차의재, 둘만이 남아 있었다. 남우진이 볼펜을 딸깍 누르며 말을 이었다.

“제 능력으로 치료할 수 있는 건 시스템의 법칙 아래에서 발생한 상처뿐이라… 말끔하게 치료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진료를 봐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요.”

의재는 조심스레 물었다.

“앞으로 병원은 어디로 가면 될까요? 항상 여기서 진료받을 수는 없을 텐데요.”

“그렇죠. 제 스케줄이 유동적이라 매번 봐드리긴 어렵습니다. 대신…”

남우진이 키보드로 무언가를 입력한 후, 노란 메모지에 병원 이름을 적어주었다. 서울 중심부에 있는 대학 병원이었다.

“병원에 연락해둘 테니, 앞으론 이쪽으로 다니시면 될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진료 및 약제비를 수납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서원 길드에서 전액 부담할 테니까요.”

“예? 왜요?”

의재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남우진과는 오늘 처음 보는 사이다. 그런데 생판 남인 사람의 병원비를 왜 그가 대신 내준단 말인가? 관절염이 희귀 질환도 아닐 텐데. 남우진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투명한 백안으로 의재를 바라보았다.

“의사로서 일은 마무리됐으니, 헌터 대 헌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는 흰색 눈동자를 느리게 깜빡인 후 말을 이어 나갔다.

“대한민국 랭킹 7위, 남우진이라고 합니다. 서원 길드의 길드장을 맡고 있고, 이 도서관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차의재 님 되시죠?”

“아, 네.”

“이사영의 ‘조력자’시고요.”

“…….”

의재의 눈꼬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남우진은 할머니에게 지어 보였던 예의 그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게 그 대답이기도 하니까요.”

그는 완전히 단정 짓고 있었다. 의재는 그의 말을 곱씹다 물었다.

“왜 제가 이곳에 있는 게 그 대답이 되는 겁니까?”

“…이사영은 이곳에 다른 사람을 데려온 적이 없거든요. 이사영의 소개로 이곳에 발을 들인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재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의재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우진이 한 발 내딛자, 새하얀 진료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푸른 정원이 나타났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풀 향도, 부드러운 공기의 흐름도 진짜 정원과 흡사했다. 남우진의 스킬인 걸까? 앞서 걷던 남우진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균열의 날 이후, 뒤바뀐 이 세계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시스템은 무엇인가? 균열은 또 무엇인가? 몬스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건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재를 포함해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의 누구도 그의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남우진은 대답을 바라지 않은 듯 느리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지식을 닥치는 대로 모으고 있지요. 이사영과도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그런가요.”

이슬 젖은 풀이 푹신하게 밟힐 때마다 향긋한 풀 내음이 났다. 남우진이 걸음을 멈췄다.

“얼마 전, 이사영이 엄청난 양의 마약을 전달해주더군요. 조력자가 구해왔다며 말입니다.”

“…….”

“그 마약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아마 자신이 배낭째로 가져왔던 마약을 말하는 것이리라. 의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마약이라고만 들었습니다.”

“마약의 이름은 PRO-009.”

“…….”

“프로메테우스라는 조직이 실험체를 모으기 위해 아홉 번째로 만든 마약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균열의 날 이전, 대한민국 아이들의 기본 지식이나 다름없었기에 의재도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라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아닙니까?”

“맞습니다. 인간에게 불과 지식을 전해준 대가로 고문을 당하는 인물이죠. 그들은 본인 스스로를 예지자라고 자청합니다. 꿈속에서 미래를 보고, 미래에 올 종말을 막기 위해 인간의 힘을 기른다고 주장하거든요.”

실험체를 모으기 위해 마약을 뿌리고, 모인 실험체로 인공 각성자를 만드는 실험을 진행하는 조직, 프로메테우스. 그들의 주장은 윤가을이 보여준 편린 속 이야기와 많은 부분이 흡사했다.

남우진이 슬쩍 뒤를 돌았다.

“꽤 흥미로우신가 보군요.”

“…….”

“그럼… 이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새하얗게 타버린 눈동자 안에 의재의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남우진은 그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까지 유심히 살피며 한마디를 뱉었다.

“이사영은 프로메테우스의 실험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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