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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59)화 (59/67)
  • 59화.

    남우진은 머리뿐만 아니라 눈동자까지 새하얀 색이었다. 그는 사영과 눈짓으로 인사한 다음, 뒤에 선 의재와 할머니, 하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테 안경 너머의 백안이 관찰하듯 세 사람을 훑더니, 곧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진료 보러 오신 최필순 환자분과 보호자 차의재 님. 맞으십니까?”

    “아, 네. 맞습니다.”

    덩달아 의재도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다. 사영과 제법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긴장했는데 남우진은 그래도 상식선의 인물인 것 같아 안심이 됐다. 백발의 남자는 허리를 편 후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우선 진료부터 보도록 할까요?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진료실로 안내하겠습니다.”

    “하은이도 데려가도 되나요?”

    “예, 상관없습니다.”

    기껏 의재가 걱정해서 양해를 구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어른들의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은은 작은 머리를 온갖 방향으로 돌려가며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이렇게까지 책이 많은 도서관은 난생처음 봐서 그런지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의재에게도 이곳의 풍경은 조금 놀라울 정도였으니까.

    하은은 잔뜩 꽂혀 있는 책들에서 이제 북카트를 밀면서 어딘가로 다급히 달려가는 사서의 뒷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저걸 타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혹시라도 북카트를 타겠다고 뛰쳐나가면 어느 방향에서 언제 붙잡아야 할까 생각할 때였다. 의재와 우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우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은 양…은 진료실에 오는 것보다 도서관을 구경하는 걸 좋아할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그럼 하은 양은 저희 도서관을 조금 더 구경하시는 걸로 하고, 보호자분과 환자분만 모시겠습니다. 환자분은 저희 길드원이 부축해드릴 거고요.”

    “하이고, 내 괘않은데….”

    노인이 됐다며 손을 가볍게 저어 보였지만, 남우진은 능숙하면서도 단호히 응대했다.

    “잘 걸을 수 있으시겠지만, 진료실까지는 거리가 좀 돼서요. 부축을 받으시는 게 다리에도 무리가 덜 가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일반 병원에서 근무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상대한 짬이 나오는 건가. 의재가 내심 감탄하는 동안 남우진이 짧은 웃음을 흘리며 따라오라는 듯 몸을 돌렸다. 노란 완장을 찬 사서 하나가 할머니의 곁에 붙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

    의재의 시선이 한발 물러서 있는 이사영에게 닿았다.

    “이사영 너는?”

    “굳이 따라갈 필욘 없겠죠, 내가.”

    “그건 그런데….”

    할머니의 뒤를 따라 복도로 발을 옮기기 전, 의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하은을 잠시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책장 사이로 뛰어갈 것 같은데, 저거….

    의재가 사영의 팔을 붙잡고 슬쩍 옆으로 가까이 붙었다.

    “야, 사영아.”

    “…….”

    방독면이 물끄러미 의재를 보았다. 머무는 시선이 어쩐지 조금 미묘했지만, 의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사영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하은이 좀 봐주고 있으면 안 되겠냐?”

    “…….”

    방독면 렌즈 너머 보랏빛 눈이 순간 어이없다는 빛으로 물들었다.

    “지금 날 베이비 시터로 쓰겠다는 거예요?”

    “아니, 나도 너한테 이런 부탁 하고 싶진 않거든? 근데 지금 봐봐.”

    의재가 하은이를 가리켰다. 박하은의 관심사는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20초 동안 고개가 책장, 사서, 북카트, 사서, 책,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차라리 재밌는 책 한 권을 독파하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놓이련만, 이곳엔 책보다 더 흥미로운 게 너무 많았다. 의재가 중얼거렸다.

    “내 생각에는 할머니 진료 보는 동안… 하은이가 미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

    “그냥 길 안 잃게 옆에만 있어줘. 딱 그것만 부탁하자.”

    “…….”

    사영은 말없이 의재를 내려다보았다. 의재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방독면 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잠시 후, 사영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의재가 활짝 웃으며 사영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고마워. 나 다녀올게!”

    그러고는 홀랑 달려가버렸다.

    ‘…등을 맞으면 원래 이렇게 아픈가?’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알싸한 통증이었다. 이사영은 의재가 두드린 등을 괜히 문지르다가, 그새 어느 책장 사이로 사라진 하은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하은은 책장 맨 아래 칸 앞에 쪼그려 앉아 제 팔뚝만 한 두께의 양장본을 뽑아내는 중이었다. 사영은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T-0783 육체 실험 보고서』

    아무래도 9살짜리가 읽기에 적절한 내용은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뽑아도 저런 책을 뽑는 거지? 차의재네 조카라서 그런가 이쪽도 범상치가 않았다. 사영은 빠르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꼬마야.”

    “…….”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귀는 멀쩡할 텐데. 사영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가 호칭을 고쳐 불렀다.

    “…박하은?”

    “왜요?”

    그제야 하은이 동그란 눈으로 이사영을 올려다보았다. 아하, 꼬마라는 호칭이 싫었나 보다. 아예 대답조차 안 하고 무시한 걸 보면. 사영은 하은이 든 양장본을 가리켰다.

    “그걸 읽으면 삼촌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내용인데요?”

    “너희 삼촌이 싫어할 내용.”

    아무래도 눈앞의 아이는 어린애 취급 받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사영은 어린애가 읽으면 안 되는 내용, 이라고 말하려다 삼촌이 싫어할 거라고 고쳐 말했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하은의 동그란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깃들었다. 사영은 지나가는 사서를 향해 손짓했다.

    “거기.”

    “네? 아, 이사영 길드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 애가 읽을만한 책이 있나?”

    사영이 저보다 한참 작은 꼬마를 턱짓하자 사서가 친절하게 안내했다.

    “아, 저쪽에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코너가 있습니다. 학습 만화 코너도 있고요.”

    사영은 이 도서관에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그림책과 학습 만화 코너가 있는 건 정말 처음 알았다. 이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전부 남우진이 읽은 책들일 텐데. 오늘만큼은 그의 지식욕에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사영은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볼 때, 삼촌은 네가 학습 만화를 읽는 걸 좋아할 것 같은데.”

    “으음….”

    “그 책엔 그림도 없을걸.”

    “…….”

    실험당한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모를 것의 해부 사진은 있겠지만. 사영은 뒷말을 삼켰다. 고민하던 하은은 끙, 소리를 내며 결국 양장본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학습 만화 코너 어디예요?”

    좋아. 사영은 슬쩍 만족스럽게 웃으며 사서의 뒤를 따라갔다. 사서가 안내한 곳은 비교적 낮은 높이의 책장에, 컬러풀한 책들이 꽂힌 아동 서적 코너였다. 바닥에는 부드럽고 폭신한 매트가 깔려있고, 커다란 인형들도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여기에 놔두면 괜찮겠군.’

    하은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사영은 사서에게 의자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후, 아동 코너가 한눈에 보이는 책장 옆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책에 정신이 팔려 이제 좀 조용해졌나 싶을 때였다. 작고 익숙한 인기척이 그를 향해 꾸물꾸물 다가왔다. 박하은이다. 사영은 슬쩍 눈을 떠 하은을 내려다봤다.

    “…….”

    “저기, 있잖아요.”

    천진난만한 눈은 아까 전 도서관의 풍경을 처음 봤을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사영은 그 시선을 마주치자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하은은 다섯 손가락을 쫙 편 후, 그 위에 다른 손으로 브이를 그려 올렸다. 공익 광고에서 이사영이 했던 제스처였다.

    “티비에서 이거 한 사람 맞죠?”

    “…….”

    “이거 한 번만 해주면 안 돼요?”

    하은의 눈망울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한 번 해주면 적당히 흥미가 떨어져서 책이나 보러 가겠지. 뭐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내키지는 않았으나 질질 끌고 싶지도 않았던 사영은 광고와 같은 손 모양을 만들어 하은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박하은은 깐깐한 도자기 장인처럼 아주 단호했다.

    “그게 아니야!”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맑고 동그란 눈은 흡사 뭔가에 꽂혀 눈이 돌아간 작은 홍예성 같기도 했다. 사영은 저리 가라는 뜻으로 손을 까딱였다.

    “해줬잖아. 마저 책 읽으러 가.”

    “아아아, 한 번만 더요. 네?”

    사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다시 공익 광고에 나온 대로 손짓을 해주었다. 이번에는 부디 소녀의 눈에 들기를 바라며. 그러나 그의 기대가 무색하게 하은이 단호하게 외쳤다.

    “또!”

    “책 봐.”

    “한 번마안.”

    ‘미아 안 되게 감시만 하면 된다면서, 씨X….’

    이 순간, 이사영은 차의재가 너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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