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57)화 (57/67)

57화.

의재가 헌터 자격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후, 헌터들은 해장국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의재를 물심양면으로 챙겼다.

공부하다 먹으라고 초콜릿이며 카페인 음료를 주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소소한 선물은 의재도 거절하지 않았다. 해장국집 단골들은 평소엔 해장국 먹는 하마처럼 굴다가도 이럴 때는 꽤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30시간짜리 오프라인 헌터 기초 교육은 관리국에 서류를 제출해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균열관리청 소속, 또 다른 공무원 헌터 양혜진이 성심성의껏 서류 작성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양혜진은 사정을 듣자마자 인벤토리에서 뚜껑에 균열관리청 로고 스티커가 붙은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매일같이 공문서를 작성하는 프로의 솜씨로 의재의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쑤시개를 문 채 엄청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알바님 하루 종일 해장국집에서 일하는 거 우리가 다 알지. 그런 사람이 언제 센터 가서 30시간씩 교육을 받고 있겠어요.”

“맞아, 맞아.”

“솔직히 교육 시간 완화해야 돼.”

“하여간, 요즘 헌터들은 보고 들은 게 많아서 기강 잘 잡혀 있는데. 교육 시간 이렇게 빡세게 잡을 필요 없다니까…. 완화하자고 해도 존나게 말 안 듣죠.”

의재를 걱정하던 말은 점점 윗대가리 욕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균열관리청에서 꽤 높은 직급에 있는 그녀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하긴, 힘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피곤한 법이니까. 잠시 후, 양혜진이 거칠게 탁 엔터를 치고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다 썼다! 알바님 혹시 노트북은 없으세요?”

“네. 없습니다.”

“그럼 제가 바로 각관국 메일로 보낼게요. 이거 한 장이면 60시간 전부 온라인 강의로 넘길 수 있어요. 소리 끄고 켜놓기만 하면 되니까 파이팅!”

“감사합니다.”

프로 공무원의 면모를 보여준 혜진은 멋지게 해장국집을 빠져나갔다. 이게 동질감에서 자라나는 정이라는 걸까?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교육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엔 배원우가 신형 노트북과 핸드폰 상자를 턱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각성 축하 선물 유행이 이미 한 차례 해장국집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선물 금지 규칙은 멀쩡히 살아 있을 터다.

의재의 시선이 선물 금지 공지를 적어둔 A4 용지에 닿았을 때였다.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 아닙니다, 알바님.”

“그럼요?”

“의재님과 아주 친밀한 사이이신 저희 길드장님이 드리는 선물입니다.”

의재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배원우는 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의도치 않게 삼자대면을 한 이후로 이사영과 차의재가 상당히 가까운 관계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해명하기엔 그날 한 일이 너무 많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기운부터 빠졌다.

배원우가 엄숙한 목소리로 은근히 채근했다.

“직원 할인가로 구매해서 저렴하니까 그냥 받아주시죠.”

인천항에서 액정이 깨진 핸드폰은 그렇다 치자. 노트북은 뭐란 말인가? 어이없다는 눈빛이 배원우를 향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헤비 해장국 마니아는 자신의 제2 직장을 잃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로 본인의 결백함을 어필했다.

“참고로 전 단순 배달원. 우주선 배송. 뭐 그런 겁니다.”

“…….”

“그러니까! 출입 금지를 시키실 거면 제가 아니라 이사영을 출입 금지시키는 게 맞습니다.”

결국 본인은 예외로 놔달라는 소리였다. 다리를 꼬고 앉아 구경하던 허니비와 다른 헌터들이 우우, 야유를 보냈다.

“추하다, 방패가이.”

“헌터 네임으로 부르지 말라고!”

허니비와 배원우가 투닥대는 걸 구경하던 의재는 박스를 슬쩍 밀어냈다.

“죄송하지만 금액대가 너무 높아서 받기엔 좀 부담스럽네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럼 시험 준비하는 동안만 사용하고 토마토 마켓에 팔아버리세요. 새것 같은 중고로.”

“…….”

토마토 마켓에 끔찍한 추억이 있는 의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배원우는 뿌듯하게 코밑을 쓱 훔치고 있었다.

“사영이가 추천해준 방법입니다. 짜식, 엄청 똑똑하더라고요.”

그냥 의재를 엿 먹이려고 덧붙인 말이 아니었을까? 눈치 없는 배원우는 비꼬는 기색을 자체 필터링해서 걸렀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던 허니비가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사영은 요즘 뭐해? 통 안 보이네.”

의재도 슬슬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날을 마지막으로, 이사영은 해장국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의재가 가져다준 마약과, 마약 이동책 놈들 때문에 바쁘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그새 미운 정이 들었는지 얼굴이 아주 조금, 보고 싶긴 했다. 진짜 쬐끔. 의재는 무의식적으로 배원우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몰라, 요즘 엄청 바쁘던데. 무슨 이상한 놈들을 엄청 많이 잡았더라고. 나도 얼굴 못 보고 산다.”

“이상한 놈 잡는 건 각관국이 할 일인데 왜 이사영이 했대?”

“그러니까 말이야.”

“걔도 참….”

결국 의재는 추후 노트북을 반납하는 조건으로 노트북과 핸드폰을 받았다. 그렇게 장사하는 동안에는 기초 강의를 음소거한 채로 켜놓고, 해장국을 끓이며 기출문제를 외우는 나날이 흘렀다….

* * *

해장국집 단골들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의재는 기출 문제집 세 권을 달달 외웠다. 열심히 해본 적도 없는 시험 공부를 하려니 시간이 느리게 가는지 빠르게 가는지도 체감이 잘 안됐다.

그리고 대망의 헌터 자격 시험 당일.

의재는 시험 장소로 배정받은 중학교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교실보다 훨씬 시설이 좋았다. 

시험을 보는 게 각성자들이라 그런 건지 교실당 인원수가 적었다. 시험 감독관은 각성자 관리국 소속 헌터였다. 시험지가 배부되고, 의재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따르릉―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감독관이 동태눈으로 시계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예, 시험 시작하세요.”

시험지 표지를 넘긴 순간, 차의재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주변에 앉은 각성자들이 헙, 헉, 흐억, 하고 단말마에 가까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기출 문제집 문제하고 완전 다른데?’

기출 문제집의 족보 문제는 대부분 각성자 특례법과 관련된 법 조항 암기 문제였다. 법을 반드시 지키라고 세뇌하는 수준이라 느껴질 정도로. 출제자가 특례법 몰라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번 시험에는 헌터들이 반드시 달달 외우라고 찍어준 기출 문제집의 법률 문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1번부터 아예 다른 유형이었다! 주변에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걸 보면 의재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출제 위원이 누군진 몰라도, 이번 달 자격시험 문제 유형을 파전처럼 뒤집어버린 것이다. 의재는 이를 악물었다.

‘씨X, 각성자 특례법 사례까지 다 외워놨는데.’

의재의 피나는 노력이 물거품이 된 상황. 하지만 시험을 보러 왔으니 문제를 풀긴 해야 했다. 의재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문제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왜… 쉽지?’

생각보다 술술 풀리는 문제에 당황했다.

다른 응시생들은 죽 쑨 얼굴로 컴퓨터용 사인펜을 굴려 오지선다의 선택지를 찍고 있었는데, 의재의 손은 시험지 위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이번 시험의 문제들은 각 몬스터의 특성과 행동 패턴 관련된 내용 위주였다. 즉, 개같이 현장을 뛴 J의 전공 분야였다! 구 J, 현 차의재는 이론과 암기로만 공부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현장 지식의 달인이었다. 의재는 씩 웃으며 검토까지 마친 뒤 OMR 카드에 마킹했다.

‘문제 낸 새끼도 보통 또라이가 아니네….’

시계를 보니 시험이 끝나기까지 30분이나 남았다. 의재는 간만에 엎드려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 * *

그로부터 얼마 뒤, 평소에도 붐비던 해장국집은 그날따라 더 붐볐다. 그야 해장국집 알바님의 자격시험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단골들은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마늘을 다듬는 알바생을 힐끗 쳐다보며 숙덕댔다.

“이번 헌터 고시 역대급 지옥 불 난이도였다는데, 붙으셨을까?”

“야, 우리 길드 신입 시험 보러 갔다가 울면서 들어왔어. 기출 문제에서 단 하나도 안 나왔대. 무슨 처음 보는 몬스터 관련 문제만 잔뜩 나왔다더라.”

“뭐야? 던전도 안 들어가본 애들이 몬스터 문제를 어떻게 맞혀.”

“아, 그니까. 우리 애 특례법으로 재판도 할 수 있을 만큼 법에 빠삭한 인재였는데….”

불쌍한 우리 신입. 한 헌터가 소매로 눈가를 찍어내는 시늉을 하자 누군가 슬쩍 질문했다.

“이번 시험 출제자 누군데요?”

“랭킹 5위. 규규.”

“와… 그 또라이. 한국에 붙어있지도 않으면서 문제는 언제 내고 갔대.”

“몰라. 아무튼 알바님 위로해드릴 준비 해야 될 것 같다.”

시험을 본 차의재보다 단골들이 더 시무룩해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귀 밝은 헌터들은 단번에 진동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알바생의 앞치마 주머니 안이다. 시험 결과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차의재는 무아지경으로 마늘을 다듬던 칼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냈다.

꿀꺽. 헌터들은 아닌 척 의재를 살폈다.

“…….”

단정한 얼굴에 슬쩍,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설마, 역대급 불지옥 난이도 헌터 고시를 단번에 통과했단 말인가? 헌터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성질 급한 허니비가 다급히 물었다.

“뭐예요, 차의재 씨. 붙었어요?”

의재가 뺨을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붙었네요.”

“붙었다고? 한 번에?”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와… 우리 알바님 진짜 해장국집에 있으면 안 되는 인재시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해장국집의 자랑!”

누군가의 외침에 은은하게 웃던 의재의 미소에 살짝 빠지직 금이 갔다.

‘저 새끼가 현수막 문구 정했구나.’

헌터들이 우르르 주변으로 몰려와 합격을 축하해주었다. 시험도 붙고, 현수막 총대 멘 놈도 찾았다. 의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건네지는 한마디마다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의재는 문자를 확인했다.

사영 :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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