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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56)화 (56/67)
  • 56화.

    8,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하지 않는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각성자 등록에 성공해서 알리바이도 만들고, 이사영의 부탁도 해결한 의재는 최근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전기 대신 마석을 잡아먹는 김치 및 밑반찬 자동 셀프바는 가성비가 매우 나쁜 대신, 의재에게 아주 조금의 여유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셀프바 옆에 빈 그릇을 쌓아두기만 하면, 헌터들은 해장국 주문을 넣은 후 본인이 알아서 김치와 깍두기, 청양고추를 세팅했다. 의재는 해장국을 끓여주고 온장고에서 공깃밥만 꺼내주면 됐다. 이 궁극의 자동 셀프바를 위해 파도 길드의 엔지니어들이 통후추처럼 갈렸다더니 괜히 나온 말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차의재는 아주 조금 생긴 여유 시간에 무얼 하는가.

    “…….”

    의재는 카운터에 앉아 볼펜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가 선결제 장부를 관리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단정한 얼굴에 웬일로 짜증 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장부 대신 두툼한 책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헌터들이 해장국을 떠먹으며 숙덕댔다.

    “알바님 왜 저렇게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이신지 아는 사람?”

    “그러게요. 한 그릇 더 먹고 싶은데 엄청 빡치신 것 같아서 얘기도 못 하겠네.”

    “씁, 우리가 직접 끓여 먹으면 안 되나?”

    “으어 아이애, 응어.”

    “뭐라는 거야, 야, 더러워. 다 처먹고 얘기해.”

    “알바님 헌터 기초 교육 듣고 자격 시험 공부하고 계신답니다.”

    비교적 최근에 각성한 헌터가 대답하자, 주변에 앉은 헌터들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헌터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 그 X같은 기초 교육 아직도 안 없앴나?”

    이십 대 중반쯤 되는 헌터도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얹었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존나 귀찮으시겠다…. 그거 필수 이수 시간 몇 시간이에요, 요즘?”

    “60시간 들어야 할걸요. 오프라인 30시간, 온라인 30시간. 너무 바쁘면 각관국에 사유서 제출하고 온라인 전환이 가능하긴 한데…. 교육 다 들어도 어차피 시험을 통과해야 해서. 70점 못 넘으면 통과할 때까지 재시험 보고요.”

    “우웩. 제발 좀 없애라니까 오히려 교육 시간을 늘리고 앉았네.”

    “저 여기서 고해할게요. 사실 헌터 고시 4수 했어요.”

    “4수면 잘 붙으셨네, 뭘. 그거 원트에 통과하는 새끼가 미친 새끼인 거예요. 괜찮아요.”

    “자자, 조금만 조용히. 우리 알바님을 위해 면학 분위기 조성해줍시다.”

    4수를 했다는 헌터가 우욱, 소리를 내며 헛구역질했다.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의재도 조금 토하고 싶었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하은이가 그린 지렁이 같다.

    요 며칠 차의재는, 하은이가 왜 학습지에 지렁이를 그려놨는지 백번 이해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각성자는 각성자 특례법에 의거하여, 등록 센터에서 등록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등록이 끝나면 이름과 등급이 적힌 각성자 등록증이 발급된다.

    차의재 역시 빳빳한 D급 등록증을 받고 흐뭇해했다. 진짜 등급에서 네 계단이나 내려간 것이었으나 온갖 지랄맞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낸 끝에 받은 D급 등록증이니만큼 더 소중했다. 그는 답지 않게 단골들에게 슬쩍 자랑도 했다.

    하지만.

    “이야, 알바님 등록증 받으셨네. 축하합니다.”

    “그럼 이제 시험 준비하셔야겠네요…. 에궁, 파이팅. 제가 쓰던 기출 문제집 있는데, 필요하면 말씀하세용….”

    돌아온 건 어쩐지 애잔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D급이라고 무시하는 눈빛은 아니다. 해장국집 단골들은 등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헌터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저 뜨뜻미지근한 눈빛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의재는 의아했지만, 이후 새벽마다 인천항에 조사를 나가게 된 바람에 더 알아볼 새가 없었다.

    그러나 인천항 사건이 마무리된 후, 그 짧은 사이 소문이 돌았는지, 배원우는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낡은 문제집을 건넸다. 꽤 비장한 얼굴이었다. 의재는 의아한 얼굴로 문제집을 보았다.

    “…이게 뭐죠?”

    “이건 절대 선물이 아닙니다. 알바님의 소중한 인권이에요.”

    “예?”

    “조금 지나면 이해하실 겁니다. 오늘 해장국도 맛있었습니다, 저는 갑니다!”

    다음 날에는 허니비도 아침 일찍 찾아와, 카운터에 스프링으로 제본된 두툼한 교재를 턱 내려놓았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차의재 씨. ‘그것’ 준비한다면서요?”

    “그게 뭔데요.”

    “뭐어, 현실 도피 하고 싶을 만도 하죠. 그 마음 이해해요. 아무튼, 한 팀장님한테 얘기해서 HB 길드 신입 교육용 기출 자료를 가져왔으니 잘 쓰도록 해요. 알겠죠?”

    “허니비 씨, 던전 앞에 기자들 다 모였답니다!”

    “아, 새끼들 존나 빠르네. 그럼 전 던전 공략이 있어서 이만.”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슬슬 의재의 어이가 증발했다.

    헌터들의 이야기로 유추해본 결과, 요즘에는 각성자 등록을 마친 후 어엿한 헌터가 되기 위해선 뭔가 따로 시험을 봐야 하는 듯했다. 등록하는 것도 빡셌는데 시험이라니? 대체 무슨 시험? J로 활동할 때는 이런 철저한 등록 제도와 시험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의재는 그날 밤, 가게 문을 닫은 후 인터넷 검색에 돌입했다.

    “하이, 넥스비. 헌터 고시 검색해줘.”

    ―헌터 고시에 대해 검색합니다.

    ―헌터 고시 X같다

    ―헌터 고시 다음 시험 언제임?

    ―진짜 언제쯤 붙을까 각성을 해도 헌터 고시 통과 못해서 헌터가 못되네

    ―1월 고시 30번 문제 누가 냈냐? XX새끼

     └남우진이죠 누구겠어요

     └남우진 정정당당하게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

    ―헌터 고시 8수째입니다 질문받습니다

     └그정도면 헌터 접는 게 낫지 않음?

    ―헌터 고시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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