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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55)화 (55/67)
  • 55화.

    이사영네 집 소파는 대체 뭘 넣은 건지 엄청나게 푹신했다. 요즘엔 이불도 던전 부산물로 만들던데, 이 소파도 던전 부산물로 만든 걸까? 차의재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돌리며 상황을 수용하려 애썼다.

    여전히 집주인보다 편한 자리를 차지한 건 불편했지만, 여기서 또다시 말싸움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정말 소파까지 부숴 먹고 이사영과 함께 나란히 바닥에서 자야 할 것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국 침대를 부수는 데에 자신이 일조하지 않았는가. 멀쩡한 가구의 명줄을 또 끊을 순 없었다. 물론 물어줄 돈도 없다.

    ‘그래, 연장자가 져줘야지….’

    타고난 꼰대 마인드로 합리화를 마친 차의재가 소파의 폭신함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사영이 베개 두 개와 이불 두 개를 사뿐하게 던졌다. 의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낚아채며 중얼거렸다. 

    “두 개까진 필요 없는데.”

    “주는 대로 받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영의 뒤로 이불과 베개가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진 몰라도 많이도 가져왔네. 파도 길드의 고품격 수면실에 대해 알 턱이 없는 의재가 생각했다. 뭐, 덕분에 의재가 두 개씩 받는다고 이사영이 못 잘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의재가 꾸물대며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사영은 제 몫의 이불을 바닥에 깔기 시작했다.

    몇 겹의 이불을 푹신한 매트리스처럼 깐 후 이사영은 베개를 베고 누웠다. 이윽고 사영이 박수를 한 번 치자 집안의 불이 모두 꺼졌다. 멀뚱히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던 의재가 중얼거렸다.

    “…잘 자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을 바라고 한 인사도 아니니 상관없긴 했다. 소파는 푹신하고, 이불은 부드럽고, 베개도 딱 적당한 탄력과 높이로 목을 받쳐주었다. 아주 오랜만에 누워보는 좋은 잠자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느냐 물어보면…. 그건 아니었다.

    소파에 눕고 바닥에 누운 지 대략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정확히 시간을 파악할 수 있던 이유는, 말똥한 정신에 심심해서 초를 셌기 때문이다.

    ‘잠이 안 와.’

    원래 잠이 많은 편도 아닐뿐더러, 이 시간에는 자기는커녕 장사 준비를 했단 말이다. 정착된 생활 패턴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갑작스레 편해진 잠자리에 이 몸뚱어리가 타고난 천민인지 적응하지 못해 잠이 오질 않았다. 옆에 이사영까지 있으니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졌다.

    “…….”

    게다가 사영도 여전히 깨어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기는 했지만 누운 순간부터 지금까지 숨소리가 변화 없이 일정했다. 자신이 알아챈 것처럼 그 역시 제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리라. 의재는 다른 생각할 거리를 찾았다.

    고요 속에서 의재의 모든 생각은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종말, 윤가을의 만화경, 서해 균열, 사람들의 비명, 피 냄새…. 생각은 무저갱 속으로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러다간 다시 암울한 생각에 매몰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의재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입을 열었다.

    “이사영, 안 자?”

    “형은요.”

    자다 깨서 잠긴 목소리도 아니고, 방금 전까지 들었던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것도 냉큼 대답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엉망으로 엉겨붙던 상념들이 조금 가라앉고, 의식이 현실로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의재는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잠이 안 오네, 나도.”

    “형은 피곤할 만도 한데요.”

    “왜?”

    “그 난리를 쳐놨으면서 왜냐니….”

    사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빈정거리는 기색은 아니었다.

    “별로 큰일도 아니었는데, 뭘.”

    의재도 마음 편히 받아쳤다. 둘 사이에 다시 짧은 침묵이 스몄다. 아까보다는 꽤 견딜 만했다. 의재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사영에게 말을 걸었다.

    “최고요는 어때. 괜찮을까?”

    “뭐… 인천에서 서울까지면.”

    사영이 단어를 고르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하루 정도면 정신 차릴 거예요. 내일 저녁쯤.”

    “페널티가 생각보다 강하네.”

    “무한히 쓰기엔 너무 좋은 스킬이니까.”

    “그렇지….”

    드문드문 대화가 이어졌다. 사람 사이의 대화는 공백 없이 무한히 이어질 수 없었기에 필연적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의재는 더 이상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 사이로 무언가가 자꾸 비집고 들어오려 한들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사영이 먼저 의재를 불렀다.

    “형.”

    “응.”

    “나 아직도 편지 가지고 있는 거 알아요?”

    “편지? 무슨 편지?”

    “자기가 줘놓고 기억 못하네….”

    의재는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사영에게 편지라 불릴만한 걸 준 기억이 없는데? 사영이 돌아눕는 듯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의재도 소파 바깥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영은 손으로 턱을 괴고 의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얼굴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건드리면 뒤진다.”

    “…아.”

    설마 명함에 적었던 그 협박? 찾아갈 사람을 잘 찾아가긴 한 것 같은데…. 의재가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자 사영이 킥, 소리를 내고 고개를 숙였다.

    문득 푸른 빛이 시야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거실 한 면은 통창이었는데, 그쪽으로 어슴푸레하게 해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차의재는 마른세수를 하고 물었다.

    “지금 몇 시야?”

    “글쎄요…. 4시 반쯤 됐으려나.”

    “…….”

    “왜, 또 장사하러 가려고요?”

    “야, 가게 문은 열어야지.”

    “배원우 시켜요.”

    “되겠냐?”

    “그 정도 처먹었으면 해장국 정도는 끓일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사영이 퉁명스레 중얼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의재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쭉 폈다. 시간이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새로 얻은 특성과 함께라면 장사 준비 자체는 금방 끝날 터였다.

    어제 입었던 옷은 이사영이 세탁을 맡겼다고 해서, 결국 의재는 오늘도 사영의 옷을 빌려 입어야 했다. 이사영이 골라준 검은 목폴라와 검정 슬랙스를 입은 후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올라탔다.

    그래, 나란히. 의재는 사영과 대각선상으로 가지런히 서되 널찍한 엘리베이터 구석에 착 달라붙어 거리를 넓혔다. 엘리베이터 중앙에 선 사영이 비웃었다.

    “좀 가까이 오지 그래요.”

    “난 여기가 마음 편해.”

    “내 침대도 부숴 먹고, 옷도 빌려 입었으면서.”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 하지 마라.”

    “할 거 다 한 사이인데 갑자기 왜 이러지….”

    “닥쳐봐, 좀.”

    차의재는 이사영의 배웅 따위를 받을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나, 이사영의 사택이 있는 파도 길드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호텔처럼 길드원증을 찍어야 작동하는 구조였다. 계단으로 튀고 싶어도, 계단과 연결되는 문도 길드원증이 있어야 열린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차의재는 이사영이라는 거대한 출입 도구를 챙겨야만 했다. 게다가 이사영이 덧붙인 말 때문에, 차의재는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유명하잖아요, 형.”

    “내가? 왜?”

    “이 길드에 형네 해장국 안 먹어본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

    “길드원들이 알바님 왜 여기 있냐고 물어보면?”

    내 얼굴이 파도에 팔린 건 네가 해장국집에 오백만 원 선결제해둬서 그런 거 아니냐…. 의재는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오전 4시니 다른 길드원을 마주칠 일이 없긴 하겠지만, 만약 마주치게 되면? 변명할 말이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해장국 배달 왔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장국집 배달 안 한다고 못을 박아왔기에 그렇게 둘러댔다간 파도 길드장 특혜 의혹으로 기자회견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고민하던 차의재의 눈에 문득 엘리베이터 유리가 비쳤다. 전면 유리로 되어있어 채광이 좋은 엘리베이터의 바깥 면이 마치 문짝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깨고… 뛰어내려? 그런다고 해도 제 몸이 크게 다치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형?”

    “아니, 됐다….”

    물어줘야 할 유리창값이지. 이미 침대로 큰 빚이 생긴 차의재는 잡념을 곱게 접어둔 채 정면을 응시했다. 소리 없는 발걸음 스킬을 사용할까도 고민했지만, 그건 눈에 띄지 않게 기척을 숨겨줄 뿐 모습 자체를 숨겨주는 게 아니라 이런 좁은 공간에선 쓸모가 없었다.

    곧 1층에 도착했다는 알림과 함께 문이 열린 순간, 불길한 말소리가 들렸다.

    “아이씨, 무슨 던전 공략하고 나오니까 새벽이야…. 어, 길드장님?”

    “수면실에서 좀 자고 출근해… 어? 안녕하십니까! 일찍 일어나셨… 응?”

    “…엥?”

    모두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정확하게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이사영을 보고 화들짝 놀라 꾸벅 인사한 후, 고개를 들면서 구석에 처박힌 차의재를 발견하는 순서였다. 던전을 클리어하고 돌아온 헌터들은 물론, 새벽 러닝을 마친 건지 수건으로 땀을 닦던 배원우도 있었다.

    “잉? 알바님 아니세요? 여긴 웬일이셔?”

    배원우는 반갑게 인사하며 엘리베이터 문으로 다가오다가, 중앙에 버티고 선 이사영을 보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차의재는 영혼이 가출한 얼굴로 꽃 이름이나 중얼거렸다.

    “아… 네… 뭐… 네….”

    “예?”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뭐가 그렇게 됐다는 건지 차의재도 배원우도 알 수 없었다. 오직 이사영만이 태연하게 엘리베이터 정중앙에 버티고 서서 배원우를 노려봤다. 물론, 배원우는 신경줄이 굵다 못해 아주 튼튼한 와이어 같아서 이사영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눈치 없이 그들에게 말을 붙였다.

    “근데 알바님이 여긴 웬일이셔?”

    “…….”

    “여긴 웬일이세요?”

    사영은 말이 없었다. 배원우는 이사영의 대답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의재를 바라보았다. 알바님은 대답해주겠지. 그간의 정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의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막 속에서 헌터들의 의문만 증폭되던 와중, 배원우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알바님의 옷이 평소와 다른 것을 캐치해냈다. 검은색 목폴라에 슬랙스. 시커먼 게 평소에 이사영이 입고 다닐 법한 비주얼이었다.

    ‘어라?’

    저 목폴라, 어디선가 본 기억이….

    분명 이사영이 얼마 전에 입지 않았나? 순간 깨달아서는 안 되는 금단의 지식이 배원우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알바님이… 이사영의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남한테 옷을 빌려주기는커녕, 주변에 누가 오는 것조차 싫어하는 놈이? 알바님이랑 같이 내려오고? 옷을 빌려주고?

    배원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가 사정없이 달달 떨리는 검지로 이사영을 삿대질했다.

    “야, 야, 야, 야, 야 이거, 야. 어? 야, 이게.”

    “배원우.”

    “야 인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설명해!”

    “나가서 한강 두 바퀴 더 돌고 오는 게 어때.”

    표면적으로는 친절한 제안이었지만, 사영의 속뜻은 ‘꺼져’ 였다. 아무리 눈치 없는 배원우여도 이 정도로 말하면 전부 알아듣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배원우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두 사람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맴돌았다. 탱커답게 끈기가 장난 아니었다.

    ‘…이러다간 5시 지나서 가게 도착하겠는데.’

    결국 차의재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구석에서 나와 사영의 어깨를 친근하게 감싸 어깨동무를 했다. 앞에 선 파도 길드원들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사영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보는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었다.

    의재는 사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제 좀 트러블이 있었는데, 이사영 길드장님이 친절하게 도와주셨지 뭐예요, 하하하.”

    “예에? 무슨 트러블이요? 또 어떤 새끼가 테이블을 부쉈습니까?”

    손으로 감싼 어깨가 아주 작게 움찔한 것 같았다. 의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는데, 길드장님께 아주 큰 도움을 받았어요.”

    “사, 사영이가 그런 짓을?”

    배원우의 얼굴에 큰 혼란이 깃들었다. 해장국집 아르바이트생의 말을 믿어주고 싶긴 한데, 이사영이 왜 해장국집 아르바이트생을 도와준 건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의재가 쐐기를 박았다.

    “아무래도 배원우 씨가 좋아하는 해장국집 알바생이잖아요, 제가. 그래서 신경 써주신 것 같아요.”

    “뭐? …그런가?”

    안타깝게도 배원우는 의재의 알량한 세 치 혀에 홀라당 감겼다. 사영은 어쩐지 감동 받은 기색이 엿보이는 배원우의 눈빛을 차갑게 무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재는 몬스터의 공격을 피할 때처럼 민첩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와 손을 흔들었다.

    “아, 곧 가게 문을 열어야 해서 가보겠습니다, 손님! 가게에서 뵙겠습니다!”

    “어? 어, 잘 가세요, 알바님!”

    배원우가 근육이 탄탄한 팔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차의재가 사라진 후, 배원우는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사영을 보았다.

    “…그래서 알바님이 여긴 왜 오신 건데? 네가 뭐 도와드렸다는 거 진짜야?”

    계속해서 침묵하던 사영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싸늘하게 대꾸했다.

    “진짜 도움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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