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53)화 (53/67)

53화.

“거지꼴이 됐네요, 형?”

“어. 거지 새끼가 길드장실에 들어오는 건 너도 좀 그렇지? 얘네랑 물건만 받아 가라.”

의재는 제 뒤로 길게 늘어진 굴비 무리를 가리켰다. 사영의 입가가 딱딱히 굳었다.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 차의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비서실과 연결되는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연구팀에 새로운 샘플 가져가라고 하고, 관리국에다 수송차 한 대, 파도 길드 정문으로 보내라고 해.”

―어, 네? 수송차요?

“각성자 스무 명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걸로. 아니, 그냥 제일 큰 거 가져오라고 하면 알아듣겠지.”

―…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마이크 버튼에서 손을 뗀 사영이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자.”

“응?”

의재가 눈을 깜빡였다. 물에 빠졌다가 흙먼지 속에서 구른 것처럼 꼴이 엉망인 주제에. 사영이 책상을 손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문자 왜 안 봐요?”

“…문자 보냈냐?”

사영이 눈만 위로 치켜떠 의재를 바라보았다. 그 미친 문자가 도착하자마자 답장을 보냈는데 그걸 못 봤다고? 사영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아하…. 모르는 척?”

“아니, 야, 무슨 모르는 척이야. 진짜 못 봤어. 핸드폰 액정이 나갔거든.”

의재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의 말마따나 망치로 맞은 것처럼 액정이 완전히 깨져 있었다.

사영은 열린 문으로 슬쩍 비치는 컨테이너 내부를 훑었다. 굴비처럼 엮인 놈들 주변에 온갖 연장과 무기들이 흩어져 있다. 피는 묻어있지 않지만, 대부분 부러지거나 휜 모양이었다.

“…….”

사영은 다시 눈을 돌려 의재를 살폈다. 얼굴은 평소처럼 곱상한 얼굴 그대로다. 그러나 물을 맞은 듯 젖은 머리와 후드티, 평소의 단정한 머리는 어디 가고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앞치마에 가득 찍힌 발자국과 막대기 자국까지.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었다.

차의재의 진짜 실력은 알 수 없지만, 사영의 공격을 막을 정도의 각성자가 저 정도로 얻어맞고 흔적을 남기며 싸울 리는 없었다. 즉, 일부러 처맞아줬다는 소리다.

“…….”

그사이 의재는 인벤토리에서 웬 묵직한 검은색 배낭을 줄줄이 꺼내 길드장실에 쌓아놓고는 마지막으로 등에 멘 것까지 턱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절대 문 너머로 넘어오지 않는 꼴이 짜증 났다.

거지꼴이라고 했다고 본인이 진짜 거지인 줄 아나? 사영은 짜증스런 기색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뭐 해요, 지금.”

“잠깐만…. 이 배낭 안에 들어있는 거 다 약이야. 세 개니 뭐니 하던데 단위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겠네. 아니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할 거고.”

“…….”

“저기요, 낭만오프너 씨. 언제쯤 기절할 것 같아요?”

“…느에?”

“…곧 기절하게 생겼네.”

최고요는 이미 컨테이너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게다가 입만 간신히 움직이는 반송장 상태였다. 눈이 흐리멍덩하고 초점이 없는 게 곧 감길 것 같았다. 의재는 혀를 쯧쯧 차곤 사영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와서 이 사람 데리고 가봐.”

사영이 뚱한 얼굴로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난 거기 못 들어가요.”

“응?”

“그 문 일방통행이야.”

“…일방통행이라고?”

“최고요가 설명 안 했나 보죠? 그 문, 나가는 것만 되고 들어가는 건 안 돼요.”

의재가 낭만오프너를 한 번 봤다가, 문짝을 봤다가, 사영을 보았다.

사영은 이쯤 되니 슬슬 차의재가 저 반반한 얼굴로 무슨 또라이 같은 생각을 하는지가 뻔히 보였다. 사영은 사납게 이를 드러낸 개처럼 이미 상해버린 빈정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왜. 최고요 기절할 때까지 안 나오고 그 안에서 버텨보려고요?”

단정한 얼굴이 떨떠름히 변했다. 그는 정곡을 찔렸을 때 주로 저런 표정을 지었다.

“아니, 굳이 내가 거기로 나갈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하.”

“그냥 물건이랑 이놈들만 너한테 넘겨주면 끝 아니야?”

“인천에서 해장국집까지는 어떻게 가게요. 왜, 또 법인 카드로 콜택시 긁게?”

“심야 할증 붙여서 두 시간이면… 좀 비싸긴 하겠네.”

의재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차의재는 엉망진창이다. 사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모습도 그렇거니와, 하는 행동을 보면 머릿속도 엉망일 게 분명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하고, 제멋대로고, 꼰대 같기는 또 세계 최고고, 꼭 여분의 목숨이 있는 것처럼 위험하게 굴고.

“그래도 뭐….”

차의재는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이 정도면 꽤 쓸모 있었다. 그치?”

그러면서 이상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사영은 홱 몸을 돌렸다.

“문 닫히기 전에 들어와요.”

“그냥 얘네들 그쪽으로 던져놓기만 하면…”

“한번 말하면 듣죠, 그냥.”

목소리에 날을 바짝 세워야 겨우 말을 듣는다. 의재는 그제야 밍기적밍기적 최고요를 길드장실에 밀어 넣고, 굴비처럼 엮은 놈들을 질질 끌며 길드장실에 발을 디뎠다.

마지막 굴비가 문을 빠져나온 순간, 끈질기게 버티고 있던 최고요가 마지막 단말마를 뱉었다.

“껙.”

그와 동시에 활짝 열린 문이 사라지고, 굳게 닫힌 길드장실의 문이 제자리에 돌아왔다. 사영은 최고요와 굴비들을 밖에 널어둔 후 복귀했다. 의재는 여전히 어정쩡하게 자리에 서서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일단 들어나 볼까….”

사영아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왜 일부러 뛰어들었어요?”

“응? 헤집다가 꼬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의재가 여상히 말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건진 게 뭐가 없네.”

“형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형한테 맡긴 건 단순 감시였어요. 제압하는 건 다른 전문 인력이 있고.”

“걔네보다 내가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잖아, 오늘은.”

의재의 행동이 큰 도움이 된 건… 맞았다. 각관국이나 파도 길드의 길드원들이 마약을 판매하는 놈들을 뒤쫓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뒤쫓는 선에서 그쳤었다. 이렇게 거래하는 놈들을 일망타진하고, 약까지 전부 털어온 건 처음이었다. 이만큼이나 약을 얻었으니 서원 길드도, 파도 길드 연구 팀도 꽤 쓸만한 데이터를 뽑을 수 있으리라.

사영은 의재를 향해 손짓했다.

“알겠어요. 가요.”

“그래, 간다. 하이 넥스비, 가장 가까운 버스 터미널 검색해줘.”

의재는 액정 깨진 핸드폰에 대고 넥스비를 호출했다. 이제 넥스비는 그의 영원한 동반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사영은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 듯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이쯤 되니 차의재도 이사영이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목을 꺾는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결국, 의재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또 왜, 임마.”

“아니… 일부러 이러나 싶어서.”

“뭐가?”

“버스는 왜 찾아요.”

“집 가야지. 더 늦으면 버스 끊겨.”

“그 꼴로?”

사영은 의재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비꼬는 것 같았다. 의재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젖은 물을 뒤집어써 젖은 머리와 후드티, 발자국이 가득한 앞치마까지.

차의재는 멀쩡했으나 비주얼이 멀쩡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심각한 사연이 있는 사람 같았다. 오지랖 넓고 상냥한 사람이라면 분명 무슨 일이냐며 말을 걸어올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의재는 조용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물만 안 뒤집어썼어도 그냥 가는 건데.’

아니, 생각해보니 소리 없는 발걸음을 사용하고 가면 안 들키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재가 슬그머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사영은 인벤토리에서 구겨진 A4 용지를 꺼냈다. 저번에 한번 본 홍예성표 비상 탈출 버튼이었다.

그리고 의재가 거절할 틈도 없이, 사영이 의재의 팔을 붙잡고 종이를 찢었다.

잠시 후 둘은 해장국집 문 앞에 서 있었다.

“…그거 귀한 아이템 아니야?”

“괜찮아요. 열 장이 한 세트니까.”

“…….”

의재는 떨떠름한 얼굴로 잠겨있는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쪽방으로 향했다.

가게 뒤에 딸린 쪽방은 한쪽 벽에 얼마 전에 받은 선물 박스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한 편에 정갈하게 접힌 이불과 베개가 있었다. 박스를 다 치우지 않으면 의재가 똑바로 누울 수조차 없는 크기였다.

하지만 의재에겐 정말 이 정도의 방도 충분했다. 오히려 감사했다. 균열 속에선 몬스터의 시체를 베개 삼고, 피를 이불 삼아 자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그것에 비하면 훨씬 낫지 않은가? 벽과 천장이 막혀 있고, 몸 누일 곳 있고, 이불과 베개 있고.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다.

물론 그것은 의재만의 생각이다. 사영은 이런 곳에서 사람이 멀쩡하게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의재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잔다고요?”

“내 뒷조사 다 한 거 아니었어? 그때도 여기서 나오는 거 봤잖아.”

새벽에 찾아와 대뜸 홀에 앉아 있던 그날 얘기였다. 의재의 핀잔에 사영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방 안이 이 꼴인 줄은 몰랐죠.”

랭킹 1위 아니랄까 봐 곱게 자라셨군. 하지만 의재도 한때 그랬던 시절이 있었기에 굳이 타박하지 않고 대꾸했다.

“이불 있고 베개 있고 바닥 있고 천장 있으면 됐지, 뭘.”

“…….”

“…왜?”

사영은 물끄러미 의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섬세한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자학하는 취미 있어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