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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52)화 (52/67)

52화.

물리적인 방법. 최고요는 그 단어를 되새기자니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웃긴 게시글이 떠올랐다. 양파에서 사과 맛이 나는 최면을 걸겠다며 실험자에게 생양파를 먹인 후, 사과 맛이 난다고 말할 때까지 꾸역꾸역 양파를 먹인 사람의 이야기.

최고요의 머리에 자신이 그 사과 맛 양파 최면의 실험자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스쳤다. 드디어 그는 의재의 미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할 때까지 물리 치료를 해줄게.’

그래서 최고요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마치 정답을 확신하는 퀴즈 쇼 패널처럼.

“여기가 어디죠?”

그 질문에 의재 역시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00점짜리 답변이었다.

유혈사태 없이 평화롭게 합의를 마친 후, 차의재는 정신을 잃은 납치범들을 질질 끌어다가 일렬로 늘어놓았다. 제 얼굴에 바닷물을 뿌린 놈과 코피를 흘리며 기절한 콧수염은 따로 빼놓았다.

어쨌든, 의재는 이 중에서 제일 튼튼하고 뭘 좀 많이 아는 놈 하나를 골라 깨워 조금 괴롭힐 요량이었다. 정보도 캐고, 당한 것도 갚아주고. 일석이조 아닌가. 바닷물도 좀 먹여주면 금상첨화다.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아르바이트생이 희생양을 고르는 걸 지켜보던 최고요는 교수님 앞에서 발표하는 학생처럼 예의 바른 자세로 손을 들었다.

“알바님. 여기가 어딘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제가 문을 열어봐도 될까여?”

“…문이요?”

의재가 힐끗 고요를 돌아보았다. 최고요는 두 손을 모아쥐고 기계적으로 웃었다.

“제 능력이 문을 여는 거거든여. 문을 통해 여러 사람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여. 도로명 주소만 있으면 어디든요.”

‘…배달할 때 좋겠는데?’

의재의 눈이 대학원에 끌고 갈 만한 인재를 발견한 교수처럼 번뜩였다. 해장국집 아르바이트생다운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하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른 사업 계획을 지워냈다. 저렇게 좋은 능력에 페널티가 없을 리 없으니까.

특히, 시스템의 농간인지 공간이동 관련 스킬들은 대부분 거대한 하자가 하나씩 있었다. 의재는 제일 튼튼해 보이는 놈 하나를 낚아 멱살을 쥐고 들어 올리며 물었다.

“혹시 능력에 페널티 있으세요?”

“예? 아, 있긴 한데여.”

왜인지 최고요의 눈이 살살 떨리고 있었다. 의재가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까 일단 말해보세요. 페널티를 알아야 문을 열어달라고 할지 말지 결정하죠.”

“어, 음. 그러니까 말이죠.”

“네.”

의재가 튼튼해 보이는 놈을 자신이 묶여 있던 철제 의자에 앉히고, 어느 정도 강도로 주먹을 날려야 할지 시뮬레이션해보던 순간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최고요가 빽 외쳤다.

“기절합니다!”

“예?”

마침 의재가 튼튼해 보이는 놈을 깨우기 위해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던 참이었다. 최고요는 랩을 하듯 빠르게 자신의 능력 페널티를 읊었다.

“도로명 주소나 지도의 좌표를 알면 그 장소로 문을 열 수 있는데여, 현재 있는 장소를 중심축으로 삼거든여? 중심축과 이동하는 공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오래 기절합니다!”

“혹시 문을 열면 여러 사람이 통과할 수 있나요?”

“네? 네. 문이 지속되는 동안은 계속요.”

“얼마나 지속되는데요?”

“제가 기절하기 전까지여.”

의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여러 사람을 한 번에 공간이동 시킬 수 있는 능력은 아주 귀하다. 게다가 심각한 듯 심각하지 않은 페널티였다.

‘한번 확인해볼까.’

그는 지금 있는 곳의 주소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소중한 핸드폰 액정이 박살 나 있었다!

‘미친.’

의재는 급히 잠금을 풀어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산산이 깨진 액정은 원래 화면 대신 윤가을의 만화경 같은 것만 보여주었다…. 몸뚱이는 S급이지만, 소중한 핸드폰은 S급이 아니라 몽둥이찜질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다.

의재는 심란한 목소리로 넥스비를 불러보았다.

“하이, 넥스비. 현재 위치 도로명 주소 알려줘.”

―GPS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 위치 도로명 주소를 검색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예 고장 난 건 아니었는지 넥스비는 제대로 반응했다. 넥스비가 성실히 주소를 말했다. 의재는 오색찬란한 액정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씨X. 약정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그가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 부른 주소 기반으로 계산한다 치면…, 인천에서 서울로 문을 열면 며칠 정도 기절할 것 같아요?”

최고요가 냉큼 대답했다.

“하루 반? 길면 이틀 정도 기절해 있을 것 같은데여.”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도 생각보다 기절 강도가 셌다. 의재는 순수하게 호기심 해결을 위해 질문했다.

“그럼 혹시 미국 워싱턴에 연다고 치면….”

최고요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었다. 어쩐지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미 경험해본 자의 반응이었다. 최고요는 옷 소매로 눈물을 닦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워싱턴은 아니고, 길드장님 긴급 출장이 잡히셔서 캐나다 토론토에 열어본 적이 있는데여….”

“있는데?”

“눈을 떠보니 계절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

…좋은 능력인 만큼 페널티가 아주 세구나. 의재는 액정 깨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려다 실패하고, 넥스비에게 시간을 물었다. 오전 2시 20분. 인천항에서 해장국집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도 두 시간쯤. 콜택시를 부르는 시간까지 합치면 장사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긴 하다. 의재는 인상을 쓴 채 관자놀이를 긁적이다가 최고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미안한데… 혹시 문 좀 열어줄 수 있겠어요?”

“아, 예. 물론이죠!”

“기절하면 병원에는 데려가줄 테니 걱정 말고요.”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괜찮아여.”

낭만오프너가 양쪽 관자놀이에 검지와 중지를 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힘차게 외쳤다.

“열려라, 어디로든 문!”

저작권 두 개를 동시에 침해할 것 같은 스킬 이름이었다. 심지어 유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스킬 효과는 이름에 반비례하듯 대단했다. 드러누워 끙끙 앓는 놈들만 가득하던 컨테이너 한복판에 웬 커다란 나무로 된 대문이 나타난 것이다.

“오.”

진심으로 감탄한 의재는 케이블 타이로 기절한 찐빵들의 손목을 굴비처럼 엮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옮기기는 귀찮으니 한꺼번에 끌고 나갈 생각이었다. 찐빵 굴비를 모두 엮은 후엔, 덩치들이 메고 들어온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가방은 두툼하게 포장된 흰 가루로 꽉 차 있었다. 의재는 그것들을 전부 인벤토리에 쑤셔 넣은 뒤 하나는 등에 멨다.

‘이정도면 챙길 거 다 챙겼겠지.’

의재는 준비 다 끝났다는 듯 최고요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문을 열라고 손짓했다.

낭만오프너, 최고요는 사실 문을 연 직후부터 좀비처럼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는 지옥에라도 떨어지는 사람처럼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문에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

“…….”

이사영이었다.

‘…왜?’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사영은 널찍한 사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방독면을 벗고 안경을 쓴 채였다. 책상에 놓인 자개 명패가 영롱하게 빛났다.

‘파도 길드장 이사영’

생겨 먹은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파도 길드의 길드장실인 것 같았다. 의재는 당장 문을 닫고 파도의 법인 카드로 택시에 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왕이면 요금도 더블로 불러서.

‘문을 열라고 했더니 길드장실 문을 열고 지랄….’

순간 서늘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씨X.’

이사영이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의재는 최고요를 홱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최고요는 진동 모드처럼 떨리는 손으로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죽기 직전에나 보여줄 법한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은 할 거 다 했다는 듯 아주 후련해 보였다.

‘아 이 새끼, 병원은 괜찮다고 한 이유가…’

애초에 최고요는 의재가 원하는 곳으로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최고요의 목표는 단 하나, 이사영에게 차의재를 로켓배송 시키는 거였다!

의재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어쩐지 목적지를 물어보지 않더라니!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사영이 코앞까지 사뿐사뿐 다가와 있었다. 두 사람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섰다. 탁한 보랏빛 눈동자가 의재의 발끝부터 시작해서 다리, 허리, 목덜미, 머리까지, 빠지는 곳 없이 샅샅이 훑었다. 팔짱을 낀 사영이 입꼬리를 올렸다.

“발을 잡아두니 어쩌니 하길래… 대체 무슨 미친 짓을 하나 했는데.”

“…….”

“거지꼴이 됐네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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