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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48)화 (48/67)

48화.

가만히 서서 지켜보던 사영은, 상대 헌터가 본격적으로 향후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그는 적당한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J의 바로 뒤에 섰다. 과열된 채 의약품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늘어놓던 헌터가 헉,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이사영 님.”

“아, 사영아. 빨리 왔네. 동대문 게이트는 어땠어?”

J도 뒤를 돌아보고 아는 척을 했으나 사영은 마주 서 있는 헌터에게만 차갑게 대답했다.

“다른 새끼 보내.”

“예? 하지만….”

“다른 새끼 보내라고.”

무어라 더 말하려던 헌터는 사영의 사나운 기세를 뚫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물러났다. 사영이 슬쩍 고개를 숙여 J의 귓가에 속삭였다.

“개소리를 듣고만 있고….”

“너무 그러진 마. 효율 따지면 내가 다녀오는 게 맞아.”

“형까지 개소리하지 마세요.”

“말 좀 예쁘게 하라니까.”

사영이 화난 듯, 삐진 듯한 음성으로 웅얼웅얼 더 대답했지만 의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부슬부슬한 검은 머리칼이 J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푹 파묻혔다. J는 서류를 보면서도 다른 손으로 사영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 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낯선 모습을 지켜보던 의재는 떨떠름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이건 개꿈 아닌가?’

윤가을의 말마따나, 멸망한 세계의 편린이라는 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이 편린 속에 등장하는 J와 이사영은 의재가 아는 모습과 같으면서 달랐다.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왜곡된 모습처럼.

이걸 계속 지켜봐야 하나 싶을 정도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었지만, 마냥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가을의 편린 속에 등장하는 공간이… 너무나도 익숙했던 것이다.

눈처럼 내리는 흰 재와 그것으로 덮인. 모든 게 무너진 공간. 곳곳에 열린 게이트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처음 보는 몬스터.

자신이 8년 동안 헤집고 다닌 인천 균열 내부와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은가?

‘…….’

의재는 시선을 내리깔며 숨을 가다듬었다.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필름이 감기듯 빠른 속도로 수많은 편린들이 의재를 스쳐 지나갔다.

어느 장면에선 가을이 1번 채널 헌터들과 사람들을 구하고 다녔다. 뒤에 나오는 편린일수록 등장하는 헌터들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그들은 온갖 상처와 흉터, 붕대를 감고, 사지를 잃은 채로도 몬스터와 대적했다.

살아남은 헌터들이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구하고 몬스터를 죽이고, 균열을 닫았지만,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이 계속됐다. 굳세게 버티던 헌터들도 하나둘 무너졌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시공간이 바뀌었다. 이때의 가을은 무너진 건물 틈에 웅크리고 있었다. 새하얀 몬스터들이 거리를 빼곡이 메우고, 그것도 모자라 허공에 나타난 게이트에서 계속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J는 팔에 붕대를 감은 후, 창을 쥐었다.

“여긴 내가 막을 테니까 먼저 도망쳐.”

“잠깐만요! 아무리 J여도 이만큼은…”

“내가 도망치면 얘네들이 전부 베이스캠프로 몰려갈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윤가을이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흉터가 가득한 손이 가을의 머리를 토닥였다.

“괜찮아.”

“J!”

“아, 진짜 괜찮다니까.”

“…….”

“금방 끝내고 갈게. 믿어봐.”

반쯤 부서진 가면 너머로 눈이 둥글게 휘었다. 건물 너머에서 들리는 몬스터의 포효와 발소리가 점차 커졌다. 청년은 웃음기를 지웠다. 그는 피 묻은 창을 들고 일어났다.

“신호 주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

“아, 맞다. 하나만 더.”

J는 가장 처음 본 편린에서처럼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사영이한테는 비밀. 알았지?”

꿈은 거기서 끊겼다. 그러나 꿈의 뒤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J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의재는 어느새 낯선 방에 와 있었다. 침대 한가운데 누워 있던 가을은 눈을 뜬 순간부터 한참을 울었다. 그것으로 모든 편린이 끝났다. 가을의 우는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며 적막이 찾아왔다.

끝인가? 의재는 고개를 들었다. 그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소리가 울렸다. 깨진 유리 조각이 짓밟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

자각자각. 불길한 소리가 계속 이어지며 눈앞에 가을이 손바닥에 띄운 것과 비슷한 유리 조각이 나타났다. 수많은 색으로 반짝이던 조각은 곧…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의재도 칠흑에 잠겼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짐승의 것처럼 거친 숨소리만 불규칙적으로 들렸다. 언뜻 들으면 낮은 흐느낌 같기도 했다.

그때, 쿵,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칠흑 사이에서 작은 빛줄기 하나가 새어 들어왔다. 다시 한번 쿵. 꽈드득,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씨X 새끼야, 언제까지 처박혀 있을 건데!”

거칠게 문을 부수고 들어온 건 얼굴은 물론, 전신에 상처가 가득한 허니비였다. 그녀의 자랑이던 금빛 머리카락은 목덜미에서 엉망으로 잘려있었다. 그녀가 붕대 감은 손으로 어둠 속을 삿대질하며 외쳤다.

“너 하나 빠지면 전력 손실이 얼마나 큰 줄 알아? 목숨 걸고 싸우는 놈들은 호구야? 정신 안 차려? 산 사람들이라도 살아야 할 것 아냐!”

“…….”

“너만 슬퍼? 너만 씨X, 너만…! 너만 세상 잃은 것처럼 굴지 마!”

“허니비, 진정해. 상처 벌어진다.”

뒤따라온 배원우가 허니비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곤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개새끼야! 정빈이 죽은 건 알아? 오늘은 목태오가 죽었어. 씨X, 목태오가…. 그 멍청이 새끼가 죽었단 말이야!”

씩씩대던 허니비가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배원우는 착잡한 얼굴로 허니비를 지켜보다가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는 갈색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왼쪽 소매가 텅 비어있었다.

“…사영아.”

“…….”

“네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흉터가 가득한 배원우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다, 결국 입을 꾹 닫았다.

“…아니다. 가자, 허니비.”

배원우는 허니비를 거의 업다시피 부축해서 방을 빠져나갔다. 울음소리가 멀어진다. 방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J.”

어둠 속에서 공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의재는 홀린 듯 어둠 속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 순간.

“형.”

어둠 속에서 보랏빛 불꽃이 번쩍였다.

쐐애액! 어둠 속에서 무언가 맹렬히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만화경처럼 반짝이는 거대한 손이 차의재를 감쌌다. 다급한 가을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J! 정신 차려요!”

“허억, 윽….”

의재는 급히 숨을 들이켜면서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해장국집 내부였다. 맞은편의 가을이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의재가 눈을 뜬 걸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이다….”

“방금 무슨….”

의재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가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수많은 빛깔로 반짝이던 그녀의 오른손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가을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의 그건, 저도 본 적 없는 조각이에요.”

“…….”

“뭐였지? 대체… 분명 그 세계와 이어지는 것 같긴 한데….”

“잠깐, 진정 좀 해요.”

오히려 의재가 달래주어야 할 만큼 가을은 평정을 잃은 상태였다. 입술을 짓씹던 가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이걸 남한테 보여준 건 처음이라서, 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요. 진짜 죄송해요. 설마 다른 곳에 끌려갈 줄은….”

“일단 숨 좀 골라봐요. 다른 곳으로 이끌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그게….”

의재가 심호흡하라는 듯 박자를 맞춰 손짓했다. 그제야 윤가을은 그 손을 따라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평온을 되찾은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J가 본 편린들은 제가 직접 길을 만들고 이끈 거예요. 모든 기억을 보면 이곳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뒀는데, 갑자기 그 길이 끊기더니… 전혀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갔어요.”

“다른 사람이 개입한 건가요?”

“그걸 모르겠어요.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손은요.”

“네? 아….”

윤가을의 오른손에는 새까만 기운이 끊임없이 파도치고 있었다. 가을은 롱패딩 소매 속으로 손을 감추며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아마. 관리국에 말하면 치료해주실 거예요.”

“마지막… 그 편린 때문이죠?”

“그런 것 같아요.”

“…….”

“J.”

의재가 고개를 들었다. 윤가을이 중얼거렸다.

“그, 차의재 씨가 J라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진 않았어요. 정체를 숨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앞으로도 저는 계속 비밀을 지킬 거고요.”

“…….”

“아! 물론 관리국에서 저한테 이번에 나타난 J가 인천 균열에 들어간 J가 맞냐고 물어보긴 했는데… 아, 맞다고 하긴 했거든요? 아니 그게, 저도 끝까지 숨기고 싶었는데 국장님이랑 독대하면 너무 쫄아가지고….”

“…….”

“…죄송합니다.”

가을이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의재가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더 말 안 해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보았던 J의 모습과 해장국집 아르바이트생의 간극은 꽤 클 텐데…. 가을은 용케 두 인물을 동일인이라 확신하고 자신을 찾아왔다. 국장 앞에서 쫄았다곤 했지만 그녀는 은근 담이 큰 인물일지도 몰랐다.

“그냥…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았어요. 이 세계에도 종말이 찾아온다는 걸.”

“이걸 각성자 관리국에 말하진 않았나요?”

“물론 얘기했죠.”

“그럼 그쪽에서도 대비하지 않겠어요?”

“…네. 그래서 문제예요.”

그녀의 대답에 의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비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게 가을이 바라는 바일 텐데.

가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각성자 관리국에선 종말을 막기 위해 여러 방법을 고려했는데… 때마침 J가 랭킹에 나타났잖아요. 종말 대처를 위해서 필사적으로 J를 찾고 있어요. 이미 수색팀이 움직이고 있을 거예요.”

“…….”

“헌터 등록을 하신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에요. 수색팀은 J가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서, 미등록자와 일반인 위주로 수색한다고 했거든요.”

차라리 기억을 잃었으면 좋았을 텐데. 입맛이 썼다. 어쨌든, 조금만 늦었으면 수색망에 포함됐을지도 몰랐다. 이사영과의 계약은 꽤 쓸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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