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분은… 아시다시피 아직 미성년자고, 중요한 시기라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전투계 헌터도 아니시고요.’
‘아, 고등학교 3학년이랬나.’
‘예. 곧 수능 보십니다. 균열 들어갈 시간에 수능 특강 지문 하나를 더 보시겠죠.’
정빈이 해장국집에 처음 쳐들어온 날 엿들은 대화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3학년, 미성년자고 한참 예민할 시기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S급 헌터. 그게 윤가을인 모양이었다.
가을이 빨갛게 언 손을 쥐었다가 폈다. 아무것도 없던 손바닥에 작은 유리 조각 같은 게 떠올랐다. 조각은 만화경처럼 수많은 빛으로 영롱히 빛났다.
“조금 늦었지만 제 소개를 할게요. 제 이름은 윤가을, 새봄여자고등학교 3학년이고, 얼마 전 S급 정신계 각성자로 각성했어요. 능력은….”
의재는 윤가을의 손바닥 위에 둥둥 떠서 빛나는 조각을 보았다. 언뜻 검은빛이 스쳤다가 사라진 것도 같았다.
“세계의 편린을 보는 거예요.”
일순 감히 숨쉬기 힘들 만큼 무겁고 짙은 기운이 일렁이며 실내를 채웠다. 수상한 기운은 다리를 타고, 등을 타고, 목덜미를 타고 기어올라 숨통을 조였다. 윤가을의 앳된 얼굴이 살짝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심호흡한 후 꿋꿋이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믿으시겠어요?”
“…….”
의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윤가을은 어쩐지 씁쓸히 웃었다.
“저는… 잠들 때마다 다른 세계에서 떨어져나온 편린을 엿봐요.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요. 그곳은 우리가 있는 이 세계와 닮았으면서도 달라요. 분명 이름도, 얼굴도 같은데 다른 사람 같은 경우도 많아요. 지켜보고 있으면… 이 조각처럼 어지럽고, 혼란스럽죠.”
윤가을은 손가락으로 조각을 쿡 찔렀다. 분명 그곳에 존재하는데도 손가락은 조각을 통과했다. 대신 손가락이 수많은 빛깔로 물들어 반짝였다. 의재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금빛 눈이 그에게 향했다.
“J.”
“…….”
“이 세계에는 곧 종말이 찾아올 거예요.”
종말. 의재는 그 단어를 최근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사영이 쫓는 집단. 각성자용 마약을 풀고, 인공적으로 각성자들을 만드는 비밀스러운 사람들. 그들은 종말을 막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인다고 했었다.
가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후 말을 이었다.
“제가 꿈에서 본 것들은 전부… 이미 종말이 찾아온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 파편이에요. 종말을 막지 못해 멸망했으니 세계 자체가 부스러졌죠.”
“믿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네.”
의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쉽게 믿으실 수 없을 거예요. 미친 애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J가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계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웬만해선 찾아오고 싶지 않았고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말할 수밖에 없어요.”
윤가을의 앳된 얼굴에 단호한 기색이 깃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는… 종말을 막고 싶어요, J.”
“…….”
“종말이 찾아올 걸 알고 있는데도 방관해서… 아무것도 못해본 채로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아요.”
가을이 만화경처럼 반짝이는 손을 내밀었다.
“제가 본 편린을 봐주세요.”
“…….”
“…제발요.”
…그리고 의재는 언제나 이런 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차가운 손을 잡았다. 한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어딘가로 휩쓸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 * *
차의재는 눈을 떴다. 눈이 내린다. 아니, 흰 재다. 하얗게 부서지는 재가 소복이 쌓여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그곳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으며 불길했다. 그리고 낯익었다. 자신이 인천 균열에 돌아왔는가?
‘아니야.’
직전까지 자신은 해장국집에 있었고, 윤가을의 손을 잡았다. 필시 이곳은 윤가을이 본 편린 속이리라. 의재는 깨문 혀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나는 걸 무시하고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하늘에는 블랙홀 대신, 새하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종말이 찾아온 세계라고 했지.
끝없는 백야.
종말에는 밤이 찾아오지 않는다.
쿵. 쿵.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심장을 가득 채웠다. 의재는 숨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노래방 간판, 불 꺼진 미용실 등, 카페의 입간판. 익숙하지만 낯선 것들은 전부 흰 재에 덮여 흐릿했다.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누군가 흰 재가 잔뜩 묻은 패딩을 입고 폐허를 뒤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재는 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그때 폐허를 뒤지던 자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나이를 먹어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윤가을이었다. 부르튼 얼굴에는 채 닦지 못한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날 봤나? 아니, 내가 보이긴 하나? 의재는 긴장했다. 하지만 가을의 시선은 의재를 지나쳐 더 먼 곳을 향했다. 그곳엔 팔다리가 얇고, 눈이 없는 흰 몬스터가 날개를 퍼덕이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콰앙!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흰 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건, 거대한 창에 심장을 꿰뚫려 고통스러워하는 몬스터였다.
끼이이익―
낮은 목소리가 불쾌한 비명을 짓눌렀다.
“윤가을.”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당연하다. 자신의 목소리였으니까.
의재도 가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적막과 불안을 찢고 나타난 건 검은 전투복을 입고, 검은 가면을 쓴 청년이었다. 모든 것이 흰 재에 덮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검은 존재. J는 창을 휘둘러 몬스터를 바닥에 내려쳤다. 팔다리를 휘적대던 몬스터는 곧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거침없이, 하지만 조용히 걸어왔다.
의재는 점점 가까워지는 J를 보고 침을 삼켰다. 하지만 긴장이 무색하도록, 그는 의재를 보지도 못하고, 아예 통과해버렸다.
J는 가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베이스 캠프는 저쪽이야.”
“…….”
“…허니비가 걱정하던데.”
윤가을은 건물의 잔해를 움켜쥐며 J의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그냥 조금만 더 둘러보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왔나 봐요.”
“…….”
J는 가을 앞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었다.
“여기가 너희 학교 근처랬나?”
“네… 맞아요.”
학교의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무너지고 부서진 폐허와 그 위를 뒤덮은 흰 재뿐. 멸망은 고요하다.
“…….”
J도, 윤가을도 주변에 생존자가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둘 다 S급이니 그들의 예리한 감각이 놓쳤을 리 없다. 하지만 J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살펴보고 가자, 그럼.”
“…그래도 돼요?”
“응. 몬스터가 나오면 내가 처리하면 되고, 미처 찾지 못한 생존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J는 무겁지도 않은지 거대한 창을 어깨에 척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린 그가 아, 소리를 내며 가을을 돌아보았다.
“참. 사영이한테는 비밀이야.”
“네?”
자신은 처음 보는, 윤가을과 제 모습을 눈에 담던 의재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J가 가면의 입 부분에 검지를 세웠다.
“이거 알면 또 투정 부릴 거라. 비밀.”
가을은 그제야 활짝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밝은 목소리는 유리 조각이 부딪히며 낸 청아한 음에 묻혔다. 눈앞이 크게 일렁이며 J와 가을의 모습이 아득해졌다. 무언가가 눈앞의 풍경을 실시간으로 덧그리고 있었다. 무너진 거리가 짙은 회색으로 물들었다가 곧 다른 공간을 그려냈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그러나 책장의 반은 부서지거나 기울어져 있었고, 책들은 바닥에 우수수 쏟아진 채라 본래의 용도를 잊은 듯했다.
가을이 본 편린이라 그런지 의재는 이번에도 가을의 근처에 서 있었다.
인기척과 생명의 기척이 전혀 없던 거리에 비해, 이곳은 훨씬 많은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부상자도 많았다. 사람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부상자를 치료하고 무너진 잔해를 치웠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본 장면에서 J가 말한 베이스캠프란 곳에 와있는 모양이었다.
가을도 도서관 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책을 줍고 주변을 정리했다. 의재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살피다, 문득 복잡한 실내와 유리된 듯 가만히 선 새카만 인영을 마주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서늘한 보랏빛 눈, 도톰한 입술과 그 옆에 있는 점. 무릎까지 오는 검은 가죽 코트에 검은 장갑. 기억과 조금 다른 것이라면 허리에 찬 장검 정도일까.
“…….”
이사영이다.
그가 아는 얼굴보단 조금 더 성숙한 인상이었지만, 틀림없는 이사영이었다. 저런 얼굴과 기운은 그놈 하나뿐이니까. 게다가 허리춤에 찬 장검은 의재가 인천 균열에서 주운 바실리스크의 송곳니와 흡사해 보였다.
의재는 뭔가에 홀린 듯 사영을 살폈다. 하지만 보랏빛 눈은 오롯이…
“…확실히 의약품이 부족하네.”
“경기도 쪽 병원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J. 가능하시겠습니까?”
“음… 뭐, 가야지.”
캠프 한 편에서 대화하는 J에게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