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44)화 (44/67)
  • 44화.

    그 소란이 있고 며칠 뒤.

    의재는 평소처럼 가게 문을 열자마자 찾아온 좀비들에게 해장국을 대접하다가, 문 앞에서 서성대는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캡모자를 눌러쓰고, 배달이라고 적힌 두툼한 잠바를 입고 있었다.

    ‘뭐지?’

    하은이도, 할머니도, 의재도 필요한 물건은 대부분 마트에서 직접 구매한다. 해장국을 배달 판매하지도 않으니 저런 배달원이 해장국집에 방문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의재는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드르륵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서성대던 배달원이 의재를 발견하고 아, 소리를 냈다.

    “혹시 여기 해장국집에서 근무하시는 차의재 님 되십니까?”

    대뜸 낯선 사람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의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시죠?”

    배달원이 환하게 웃으며 검은 천막으로 덮인 트럭을 가리켰다.

    “차의재 님 앞으로 화환 배달 왔습니다.”

    “예?”

    상상도 못한 개소리를 들은 의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달원은 트럭에서 커다란 화환을 꺼내와 해장국집 문 앞에 턱 내려놓았다. 분홍색 긴 천에는 궁서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가족 같은 HB길드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HB길드 인사팀장 한민준’

    한 팀장. 해장국집에 가끔 와서 의재에게 몇 차례 입사 권유를 했던 인물이다. 소속 길드원이 그가 의재를 노린다며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물론 각성자가 아니라는 핑계로 다 거절했지만, 일반 전형도 좋으니 입사하는 게 어떠냐고 끈질기게 물어봤었지. 의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길드 홍보를 해장국집에서 하려는 건가? …날로 먹으시네?’

    괘씸한 마음이 채 고개를 들기도 전에, 배달원은 트럭에서 두 번째 화환을 꺼내왔다. 대체 화환 몇 개가 온 거야? 의재가 당황한 표정으로 트럭 안을 살폈다. 다행히도 이게 마지막인 것 같았다.

    이번에 꺼낸 화환은 아까 전 것과 크기는 같지만 꽃이 좀 적었다. 그나마 얌전한 편인 것 같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배달원이 그 아래에 쌀 세 포대를 갖다 쌓았다. 이번 화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의 팬♡ 알바님의 각성을 축하합니다 ―대한민국 랭킹 6위, HB길드 허니비’

    난데없는 각성 축하 문구를 본 의재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가 조심스레 쌀 포대를 가리켰다.

    “이게… 다 뭡니까?”

    “아, 이건 쌀 화환이라는 겁니다. HB 길드에서 보내셨죠.”

    어쩐지 배달원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아아, 이건 쌀 화환이라는 것이구나. …겠냐? 의재는 할 말을 잃고 손님들의 대기석을 떡하니 차지한 화환 두 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지? 신종 장사 방해?’

    이번에야말로 사진을 찍어서 신고해야 하나? 어차피 정빈과는 만날 대로 만났고, 그의 사인도 가게 안에 붙어 있으며, 정빈이 의재의 이름까지 알아버린 상황이다. 이제 더 망설이지 않고 헌터 갑질로 각성자 관리국에 신고해도 그는 잃을 게 없었다.

    화환의 습격 앞에 넋을 놓은 그에게 웬 종이와 볼펜이 들이밀어졌다. 배달원이 친절하게 딸깍 볼펜을 눌러주며 말했다.

    “저희가 확인차 수령자분 서명을 받고 있거든요. 서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해장국 섭취 후 좀비에서 탈출한 헌터들 몇몇이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문밖으로 목을 쭉 뺐다. 그리고 그 좋은 시력으로 화환에 적힌 문구를 확인했는지, 수염이 부숭부숭한 헌터 하나가 걸걸하게 외쳤다.

    “알바야! 각성했냐?”

    미친, X 됐다. 의재는 이를 악물었다.

    잠시 침묵에 휩싸였던 해장국집이 금세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좀비들이 문에 우르르 와서 달라붙더니,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알바님이 각성을 했다고?”

    “왜 말씀 안 하셨어요!”

    “헐, 저거 설마 허니비가 보낸 화환이야?”

    “한 팀장님 계속 벼르시더니 바로 화환부터 보낸 것 봐. 독기 미쳤다.”

    “등록도 하셨나 본데!”

    “와, 너무 축하드려요! 무슨 등급 받으셨어요?”

    “우리 알바는 각성 전에도 엄청났잖아. 한 B급 정도 받지 않았겠냐.”

    축하하다 말고 그의 등급을 예상해보던 헌터들은 곧 가장 중요한 화제로 이야기를 틀었다.

    “…잠깐만. 알바님이 길드에 들어가면 해장국집은 누가 운영해?”

    “할머님께서 하시지 않을까?”

    “할머님 다리 아프셔서 알바 혼자 일한 지 꽤 됐잖아.”

    “설마 해장국집 문 닫는 건 아니지?”

    “새 아르바이트생 구하지 않을까요?”

    쾅! 갑작스럽게 무언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주위를 잠재웠다.

    “이놈들아, 막 각성한 각성자 앞에 두고 시끄럽게 떠들지 마! 헌터계 국룰 모르냐!”

    “맞아요. 얼마 전에 뉴스 뜬 거 못 봤어요? 막 각성한 놈 하나가 건물 하나 때려 부쉈다고 했잖아요. 너무 큰 소리는 신규 각성자를 불안하게 하니까 조심합시다.”

    완전히 폭탄 취급이다. 시끄럽게 떠들던 목소리들이 훅 낮아졌으나 의재의 귀에는 너무나도 명확히 들렸다. 소곤소곤한 분위기 사이로 뿌듯한 목소리 하나가 선명히 들렸다.

    “…알바님이 남입니까? 적응할 때까지 우리가 도와드려야죠. 그게 선배의 역할이니까.”

    한때 모두의 우상이었을 헌터 J, 의재는 까마득한 후배들의 햇병아리 취급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이 모든 소란의 원흉인 배달원을 빨리 보내버리기 위해 수령 확인서에 대충 찍 선을 그었다. 이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며.

    하지만 차의재의 고난과 역경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으니, 냅다 화환이 도착한 다음 날부터 미친 상황이 기다렸다는 듯 연속 발생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의재가 정신없이 점심시간 장사를 마치고 나서 재료 준비 시간에 활기를 할 겸 문을 활짝 열었을 때, 그의 눈앞에는 끔찍한 것이 걸려 있었다.

    경 자랑스런 해장국집의 알바생 각성 축

    ―해장국집 단골 일동―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