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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43)화 (43/67)
  • 43화.

    가게가 멀쩡한 것에 안심한 의재는 주방으로 가 육수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육수가 좀 졸아들긴 했지만… 이만하면 양반이었다. 양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리는 의재의 뒤를 따라온 사영이 그의 어깨 너머를 기웃대며 쳐다보았다.

    “뭐 해요?”

    “조용히 해봐.”

    의재는 딱히 종교를 믿지는 않았으나 오늘만큼은 부처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기로 했다. 밍기적의 부채에 그려져 있던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부처님께 자신이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도 기억해냈다. 그는 마음속으로 감사와 사죄 인사를 몇 번이고 전한 뒤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렇게 안 생겨서 종교쟁이인가 보네.”

    “닥쳐, 오늘만이야.”

    “그것도 나이롱 신도.”

    의재는 저놈의 불공불손함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어 용서 좀 해달라고 속으로 다시 한번 기도했다. 딱히 이사영을 위해서는 아니고 옆에 있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서였다.

    다시 주방 밖으로 나가 앞치마를 챙겨 입고 들어온 의재가 장사 준비를 위한 모든 장비를 갖추며 그를 불렀다.

    “야.”

    “이사영.”

    저게 또…. 의재는 슬쩍 방독면을 흘겨보았으나 이곳으로 빠르게 데려다준 은혜가 있으니 순순히 사영의 요구에 응해주었다.

    “이사영, 부엌에 있는 거 만지지 마.”

    “구경도 안 돼요?”

    “해장국집 손님 단체 독살 사건 만들 일 있어?”

    “방독면이랑 장갑이랑 다 꼈는데.”

    사영은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반짝반짝 흔들어 보이면서도 기꺼이 주방 밖으로 나갔다. 의재는 그 뒷모습을 휙 쳐다보고는 필요한 재료를 이것저것 꺼내놓았다.

    “이사영―”

    “응, 왜요.”

    “지금 몇 시야?”

    “4시 40분.”

    “…….”

    “…형?”

    오픈까지… 20분?

    의재는 천천히 주방을 돌아보았다. 저녁 장사는 오전보다 훨씬 바쁘다. 게다가 요즘은 J에 대한 토론회를 해장국 집에서 진행하는 통에 손님도 더럽게 많았다. 잠시 천장을 보고 마음을 다스린 그는 잠시 물끄러미 홀에 서 있는 이사영을 바라보았다.

    방독면이랑 장갑 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끔찍한 생각을 해버린 의재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를 불상사도 문제였고, 저놈이 요리에 쥐약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사영도 이 점을 알기에 순순히 자리를 비켜준 것일 터였다.

    이렇게 나의 해장국집 무사고 성실 운영 신조가 무너지고 마는가. 어엿한 해장국집의 대들보가 된 아르바이트생 의재가 절망할 때였다.

    “이야― 제가 돌아왔습니다.”

    “…….”

    “여기는… 부길드장님이 자주 오시는 해장국집이네요! 고객님, 현장에서 무사 탈출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의재의 그림자에서 둥그런 게 불쑥 튀어나왔다. 눈가에 손차양까지 만들고 휘휘 주변을 둘러보는 경쾌한 모습에서 의재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다녀왔냐는 예의상의 인사도 깜빡한 채, 그림자에서 막 튀어나온 밍기적의 손목을 붙들고서 다급하게 말했다.

    “밍기적 씨.”

    “예.”

    “칼질 좀 합니까?”

    “예?”

    “아니, 못해도 돼요. A급이면 어지간한 정도는 하겠죠.”

    “고객님, 그건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밍기적이 소심하게 반항해보았지만 해장국집이 낳은 괴물인 의재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의재는 나무 도마와 식칼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은 후 그에게 손짓했다.

    “청양고추 썰어서 이 통에 넣어주세요.”

    “예?”

    “앞치마는 저기서 꺼내 입으시면 되고요.”

    “예? 예에….”

    “혹시 눈물 나면 고글 빌려드릴 테니까 일단 썰어요. 시간 없어요, 지금.”

    의재가 눈에 불을 켜고서 하나하나 지시하자 얼떨떨하게 되묻기만 하던 밍기적이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곤 주춤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 손에서 칼은 내려놓고 말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요, 이걸로 찌를까 봐요?”

    “…….”

    “당신 찌르고 피 닦을 시간에 장사 준비하는 게 효율적이니까 빨리 움직입시다.”

    아무래도 고객님은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았다. 하지만 의지의 직장인 밍기적,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소임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고, 고객님. 그런데 일단 약화 저주부터 해제한 다음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영업에는 지장 없을 텐데 이따 밤에 하죠.”

    밍기적은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주저앉을 뻔했다. 이따 밤에 하자니, 아무렇지도 않게 야근을 명령하는 고객님의 얼굴 위로 왠지 모르게 제 악덕 상사의 시커먼 방독면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밍기적은 주머니에서 얇고 긴 직사각형 형태의 가죽을 주섬주섬 꺼내며 자신에게 스크롤이 있음을 어필했다.

    “칼 드신 김에 여기 가운데 자르시면 바로…”

    “이거 주방 칼인데.”

    “…그럼 다른 걸로 부탁드립니다.”

    의재는 허리를 살짝 숙이고서 안쪽에 놔뒀던 작은 가위를 꺼냈다. 하은의 문구 세트에 들어 있던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택배 개봉용 칼로 요긴하게 쓰이던 것이다. 손잡이 부분에는 귀여운 리본 무늬가 달려 있어 오픈 시간에 쫓기는 아르바이트생의 험악한 얼굴과는 대조적이었다.

    싹둑―

    가죽이 끊김과 동시에 의재는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제 됐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밍기적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는 주방 구석 바구니에서 냉큼 앞치마를 꺼내 입었다. 의재도 깨끗하게 손을 씻고 위생모와 앞치마, 장갑을 착용했다.

    센터에 가기 전 밥을 안쳐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가 밥솥을 열어 뒤적인 후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고유 특성, 숙련자의 손(S+)이 활성화됩니다.]

    [특성 숙련도를 한계까지 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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