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42)화 (42/67)
  • 42화.

    “넘어갔냐.”

    거의 ASMR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복화술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미약한 크기였다. 바로 옆에 있는 S급 놈의 청각을 믿기에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옆에 다리를 꼬고 앉은 사영도 의재에게만 들릴 정도로 대답했다.

    “네, 뭐. 사람 구하다가 그랬다는데 뭐라 하겠어요.”

    “잘됐네.”

    “뭐, 벌금은 좀 내겠지만.”

    “…벌금도 있어?”

    “헌터란 놈들은 벌이 있어야 말을 들으니까요.”

    하긴, 사영의 말이 맞았다. 힘이 있고 능력 있는 헌터들을 제어하는 건 강력한 구속, 법이다. 표면적으로는 이 소란의 중심에 이사영이 있었으니 그에게 처분이 내려질 것이었다. 의재는 일부러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등록 사실 자체를 숨기는 건 물 건너갔네.”

    최고의 계획은 등록 사실조차 들키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는 거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균열에 휘말린 덕분에 계획이고 나발이고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의재가 중얼거렸다.

    “밍기적씨가 정말 등급 수정할 수 있는 거 맞아?”

    “뭐, 그것도 못 하면… 돈 받아먹는 의미가 없죠.”

    사영의 대답에 그는 밍기적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균열 소멸을 앞두고, 밍기적은 초조하게 종종걸음을 치다가 이내 의재의 그림자에 냅다 뛰어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고 캐묻기도 전에 다시 그림자 위로 불쑥 튀어나온 머리통이 해명했다.

    “저는 현재 부길드장님과 함께 종로 3가 던전에 들어가 있다는 설정이거든요. 사람들 눈에 띄면 큰일이 납니다. 아주 몰매를 맞을 겁니다. 욕으로 수명이 20년쯤 늘지 않을까요?”

    “저기요, 저도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거든요?”

    “괜찮습니다, 고객님. 고객님께서는 이제 막 각성하셔서 잠깐 여기 오셨다고 둘러대시면 괜찮을 테니까요. 그런데 혹시 등급은 어떻게 나오셨는지요?”

    “망했는데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아마 컴퓨터는 여기 같이 휘말렸겠군요. 그럼 오히려 일이 쉬워집니다.”

    “그 최후의 방법이니 뭐니 하는 걸 쓰시려고요?”

    “맞습니다.”

    밍기적의 머리통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컴퓨터가 망가졌으니 만사 오케이다, 그건 아니고요. 온라인상으로 기록은 남아 있을 겁니다. 측정되는 즉시 각성자 관리국 데이터 센터로 넘어가거든요. 균열이 때맞춰 터져준 덕분에 아무도 열람할 생각을 못 했을 테니, 그것만 빠르게 조작하면 해결됩니다.”

    “그 조작하는 일이 정말로 별일 아닌 거 맞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D등급 각성자로 만들어드리죠. 그럼 이만 저는 갑니다!”

    호언장담한 그는 엄지를 척 치켜들고 서서히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영화 터X네이터의 한 장면처럼…. 의재는 그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파도 길드에는 또라이만 있나….’

    바로 옆에 있는 길드장 이사영부터가 이상한 놈이니 그럴 법도 하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러고 누워 있어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왔다. 정빈과 양혜진의 기척이 사라지면 슬슬 일어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사건이 커졌는지 사람의 기척은 늘기만 했다. 구급차가 추가로 도착하며 사이렌 소리도 더 크게 울렸다.

    몇 사람이 이쪽으로 접근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곁에 있는 인물이 누군지 확인하자 모두들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못했다. 의재는 이사영 ZONE도 쓰기 나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

    “이사영.”

    부르는 말에 대답 대신 뜬금없는 자기 이름을 대다니. 이름 불러 달라는 거야, 뭐야. 눈을 뜨고 각도가 닿는 대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 이사영.”

    “응.”

    사영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톡톡 액정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핸드폰을 만지는 모양이었다. 의재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정빈 아직도 갈 생각 없어 보여?”

    사영이 음, 하고 길게 말꼬리를 늘리다 대답했다.

    “오늘 새벽까진 여기 있을 걸요…. 생각보다 꽤 큰 문제라.”

    최악의 소식이었다. 씨X. 의재가 욕을 작게 중얼거린 때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뒤쪽, 의재의 목덜미에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닿았다. 생각보다 크게 움찔하고 만 그는 전투 후라 모든 감각이 예민해서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아파요?”

    “뭐?”

    장갑을 낀 손가락이 목덜미를 더듬다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낯선 감각에 등골을 타고 쭉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간 단번에 정빈과 양혜진의 이목을 끌 것이었다. 의재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뭐 해.”

    “식은땀이 나길래.”

    “놔둬. 곧 괜찮아져.”

    “…….”

    의재의 머리에 무언가 톡 와닿았다. 이사영이 머리를 기댄 모양이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고 있었다. 쓰다듬는 건가? 의재는 혼란스러웠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도대체 이사영의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능숙하고 영악하게 굴다가 또 어린애처럼 굴질 않나, 사람 살살 건드리다 한순간 휙 물러나질 않나….

    “형 진짜 미친놈 같은 거 알죠.”

    모르겠다는 말 취소.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놈은 그냥 개자식이다. 의재가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미친놈 중의 미친놈에게 이런 불명예스러운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시비 거냐?”

    “거짓말도 존나 잘하고.”

    “원래 서비스직종은 거짓말하면서 먹고 사는 거야.”

    “이런 변명은 어떻게 생각해냈지?”

    “캐내려고 하지 마. 알면 다쳐.”

    사영이 낮게 웃었다. 뒷머리를 헤집던 손가락이 한층 부드럽게 움직였다. 꽤 긴장했던 탓일까. 아주 오랜만에 수마가 몰려왔다.

    “형 진짜 수상해요.”

    “수상하면 어쩔 거야…. 이미 나랑 계약했으면서.”

    “그러게. 내가 왜 형이랑 계약했지. 이렇게 수상한 사람이랑….”

    손가락이 목덜미를 툭툭 건드렸다. 의재는 사영에게서 풍기는 달큰한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으려다가…

    ‘이런 미친.’

    해장국집을 떠올렸다.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재의 몸이 바짝 굳어서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영도 그의 변화를 눈치챈 건지 뒷머리를 헤집던 손을 멈췄다. 의재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사영.”

    “응? 왜요.”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구급차의 뒷좌석. 구급 대원들은 다른 생존자를 돌보느라 바쁘고, 이사영 때문에 이 구급차엔 접근하지 않는다.

    “너 운전할 줄 알아?”

    “…뭐라고요?”

    “내가 좀 바쁘게 살아서 면허를 안 따놨거든. 혹시 면허 있어?”

    의재가 운전대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잠시 눈을 깜빡이던 이사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거봐, 미친놈 맞지.”

    * * *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사실 일사천리라고 하기엔 다소 사건 사고가 많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간 내에 해장국집에 도착하는 데엔 성공했으니 의재의 기준상 일사천리가 맞았다.

    안타깝지만 이사영도 면허가 없었고, 광진구청에서 해장국집까지 뛰어가기엔 거리가 꽤 멀었다. 택시를 잡아타기엔 이 근처 도로가 전부 마비된 상태라 어차피 큰 도움은 안 될 것이었다. 의재는 역시 구급차를 탈취해서 가는 수밖에 없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이사영은 직전까지 골골대다가, 어떻게든 해장국집으로 가려고 계획을 짜는 의재를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무조건 가야 돼요?”

    “응, 무조건.”

    “그거 강박이에요.”

    “헛소리하지 말고 너도 빨리 생각해봐.”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턱을 괴고 흥미롭게 구경하던 사영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의재의 손에 쥐여주었다. 웬 구겨진 A4 용지였다.

    “…쓰레기?”

    “쓰레기라니. 홍예성의 역작인데 말이 심하네. 설명부터 읽어봐요.”

    [장인의 비상 탈출 버튼 프로토타입 (S-)

    이것을 찢으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단, 균열과 던전 안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며, 일회용이다.

    제작자: 홍예성]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