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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39)화 (39/67)
  • 39화.

    그래, 신입은 아무래도 업무 과중으로 인해 헛것을 본 게 분명했다. 이런 곳에 이사영이 오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기가 약해져 사리 분별이 잘 안되는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소리를 할 리가 없지.

    혜진은 신입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관리청에 복귀하면 도라지즙이라도 하나 먹여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이사영의 프로필을 읊었다.

    이사영, 갑자기 튀어나온 J 본인인지, 혹은 사칭인지 모를 인물에게 1위를 뺏기긴 했으나 6년 동안 1위 자리를 유지한 강자다. 특이 사항이라고 하면… ‘각성자 관리국과 균열관리청의 요청은 대부분 무시함’ 정도일까.

    양혜진이 균열관리청에서 일한 이래로, 이사영이 지원 요청에 응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옆에 선 B급 헌터도 혜진의 생각과 다를 바 없는지 하하 웃었다.

    “에이, 이사영이 여길 왜 와. 잘못 본 거 아니냐?”

    “아, 아니. 진짜 이사영….”

    “요즘 공익 광고 보고 테크웨어에 방독면 쓰는 컨셉충이 늘었다던데. 그런 놈 중 하나 아니고?”

    “가능성 있네, 그거.”

    “그렇죠? 그 광고만 보면 저도 막 소름이 돋는다니까요.”

    하하호호,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별로 도움 안 되는 기분 전환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얼린 것은 모두가 익히 아는 나른한 목소리였다.

    “제사 지내러 왔나…. 균열 앞에 두고.”

    “…….”

    “가족 모임처럼 화목하길래.”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음성이었다. 최근에 주말 예능 프로그램이 끝나면 꼬박꼬박 들리는 목소리니 그럴 만도 했다.

    양혜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웬 시커먼 방독면이 기껏 쳐둔 접근 금지선을 훌쩍 뛰어넘어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저런 덩치에 검은 테크웨어, 빈정대는 말투,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낮은 목소리에 방독면까지 쓴 놈은… 하나뿐!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식은땀을 흘리던 B급 헌터는 급기야 안전봉으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흔들기 시작했다. 흡사 악귀를 퇴마하려는 모양새였다. 양혜진도 들고 있던 담배를 떨구고 말았다. 물론 바로 정신을 차리고 발로 비벼 껐지만.

    혼란스러운 와중,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

    ‘이 새끼가 여길 왜 왔지?’

    5급 균열이 아주 쉬운 균열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S급이 필요할 만큼 까다롭지도 않았다. 물론 이쪽에도 지원을 요청하긴 했지만, 안 올 걸 알면서 부른 거라 막상 오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비유하자면 재미로 산 로또가 1등에 당첨된 격이다.

    어느새 균열 입구 앞에 우뚝 선 방독면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 해? 안 들어가고.”

    침을 꿀꺽 삼킨 양혜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원… 오셨습니까?”

    “응.”

    “…무슨 일로?”

    “…….”

    그가 턱짓으로 일렁이는 균열 입구를 가리켰다.

    “이거 없애러.”

    그러니까 왜, 고작 5급짜리 균열에 현 2위가 직접 행차하셨는지를 묻고 있는데요…. 하지만 양혜진은 대답 듣기를 빠르게 포기했다. 한시가 바쁜 상황에 이사영과 말씨름을 할 시간은 없다.

    “각성자 관리국 쪽에서도 지원 인력이 오고 있습니다. 조금 기다리셨다가 함께 진입하시는 편이…”

    이사영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필요 없어.”

    “네?”

    방독면 렌즈 너머 무심한 시선이 신입과 B급 헌터, 혜진을 차례로 훑었다.

    “생존자나 챙겨, 너희는.”

    그는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균열로 들어가버렸다. 균열이 이사영을 삼킨 후, 신입은 균열과 혜진을 번갈아 보다 발을 동동 굴렀다.

    “서, 선배님… 어떡합니까?”

    “하….”

    혜진이 노란색 안전모를 벗어 던지곤 머리를 헝클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우리도 바로 따라 들어가야지….”

    “예? 아, 네!”

    “주인은 이사영이 알아서 잡을 테니까 신경 끄고, 우리는 생존자 파악 및 구조에 집중한다. 움직여!”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입!”

    “예?”

    신입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혜진이 형광 조끼를 벗고 두툼한 방탄조끼를 입으며 보급 트럭을 엄지로 가리켰다.

    “인원수보다 여유 있게 방독면 챙기고, 해독제랑 해독 효과 있는 아이템도 있는 거 다 가져와.”

    “그, 그건 왜…?”

    저 균열 안에 독을 사용하는 몬스터라도 있는 건가? 신입이 얼떨떨한 얼굴로 혜진을 보았다. 그녀가 혀를 차며 급하게 손짓했다.

    “이사영 독에 죽기 싫으면 얼른!”

    * * *

    균열관리청 헌터들이 헐레벌떡 보급 트럭을 터는 사이, 정작 그들의 꽁무니에 거하게 불을 붙인 이사영은 느릿느릿 이동했다. 당장이라도 균열의 주인에게 달려갈 것처럼 굴던 그는 한적한 곳에 멈춰 나무를 휘감은 보라색 담쟁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몇 분쯤 지나자 그의 그림자에서 웬 검고 둥근 것 하나가 퐁 튀어나왔다. 선글라스를 낀 밍기적의 머리통이었다.

    “길드장님.”

    밍기적, 그림자를 다루며 은신으로 먹고사는 그였지만, 그는 타인의 그림자에만 숨어들 수 있었다. 홀로 균열에 진입하지 못하고 이사영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밍기적의 머리통이 잠시 위아래로 꾸물거리더니 곧 그림자에서 기어 나와 두 발로 섰다.

    사영이 입을 뗐다.

    “조용하네.”

    “예, 그렇군요.”

    일반적인 균열은 입구로 진입한 순간 제집 앞마당처럼 어슬렁대는 몬스터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그런데 이 균열은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몬스터라곤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꼭 살아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선글라스를 슬쩍 올린 밍기적이 뒷짐을 졌다.

    사영은 바닥에 떨어진 붉은 깃털 하나를 주워들었다. 깃털은 먼지 한 톨 없이 윤기가 흘렀다. 밍기적이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깃털을 확인하곤 빠르게 중얼거렸다.

    “4급 몬스터 붉은가슴익룡의 가슴 깃털이네요. 성질이 흉포해 사람이든 다른 몬스터든, 보기만 하면 아델리펭귄처럼 달려들죠. 대여섯 마리씩 무리를 이뤄 다니는 게 특징입니다. 상태를 보니 최근에 빠진 깃털 같군요.”

    “똑똑하네. 다음 분기 신입 교육은 너한테 맡기지.”

    “죄송합니다.”

    뾰족한 가시를 느낀 밍기적이 입을 헙 다물었다. 방독면을 벗은 이사영이 주위를 살폈다.

    헌터가 움직이면 특유의 냄새가 남는다. 그것이 체취든, 무기를 휘두를 때 남은 잔향이든, 몬스터의 피 냄새든, 숨결에서 느껴지는 향이든, 혹은… 몬스터에게 당한 인간의 냄새든. 이사영은 그런 냄새를 특히 잘 맡았다.

    그러나 균열의 입구부터 이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균열 내의 식물들이 뿜는 것을 제외하면 균열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냄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흔한 피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붉은가슴익룡의 서식지 한복판에 들어왔음에도 이렇게 고요한 건 익룡이 전부 죽었다는 뜻이다. 몬스터끼리 싸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몬스터 간의 전투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아무런 흔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깨끗한데.”

    “이 균열의 주인이 매우 강력한 놈이라 몬스터들 기강이 제대로 잡혀있다, 혹은 누군가가 싹 정리했다.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균열의 주인이 몬스터를 관리해 비교적 조용한 균열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경우 주인의 힘이 매우 강해, 균열에 진입하는 순간 주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균열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후자.”

    누군가가 모든 몬스터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

    이 균열에 휘말린 사람 중 그걸 해낼 만한 사람은… 사영은 국자로 제 공격을 막아내고, 피범벅이 된 손으로 제 방독면을 잡아 뜯은 의재를 떠올렸다. 그래, 차의재뿐이다. 사영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민기.”

    “네, 길드장님.”

    “형이 어디에 있을 것 같지?”

    형이라니. 이사영의 입에서 나왔다곤 믿기지 않을 예의 바른 호칭이었다. 제 귀를 의심한 밍기적은 싸늘한 시선을 받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음… 어딘가에 잘 숨어 계시지 않겠습니까? 힘을 숨겨야 하니까요. 굳이 몬스터를 잡아서 존재를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요.”

    서민기의 의견은 타당했다. 사영 역시 머리로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심지어 차의재 본인이 조용히 살고 싶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몬스터를 싹 죽여놓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균열 내부가 계속 껄끄럽게 마음에 걸렸다.

    문득 사영은 입가를 굳혔다. 생각해보니 본인은 아니라고 우겼지만, 어쨌든 차의재는 돈이 필요해 마석을 팔려고 했다. 토마토 마켓에.

    ‘설마 돈이 없어서….’

    몬스터 부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전부 죽인 건가? 그렇다면 진공청소기로 싹 청소한 듯한 이 균열의 상태도 납득이 갔다. 사영의 섬세한 얼굴선이 찌푸려지며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씨X,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하든가.’

    차의재는 이상하고, 수상하다. 도대체 어떤 행동 원리로 움직이는 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조용히 살고 싶다면서 이것저것 사고를 치더니, 거래는 또 어느 순간 홀라당 받아주질 않나. 이번엔 균열에 휘말려놓고선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굳이 나서서 몬스터의 씨를 말린다. 아무래도 그는 태생적으로 폭풍을 끌어들이는 인간 같았다.

    파란 갈대밭을 헤치며 걸은 끝에 나타난 건 잔디가 깔린 공터였다. 공터 중앙엔 흙 묻은 이사영의 등신대와 부서진 사무용 의자가 놓여 있었고, 한구석엔 죽은 익룡들이 차곡차곡 탑처럼 쌓인 채였다. 익룡 사체보다도 등신대와 눈이 마주친 밍기적이 경악했다.

    “오, 맙소사.”

    사영은 익룡 사체 더미에 다가가, 제일 위에 얹힌 것을 집어 들었다. 기이할 정도로 깨끗한 사체다. 외상이라곤 목이 비틀린 흔적뿐. 깃털을 뽑지도 않았다. 몬스터 부산물을 노린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방금 뭐랬지… 어딘가에 숨어 계실 거다?”

    “…….”

    밍기적은 종이 이사영과 진짜 이사영 사이에 낀 채 오들오들 공포에 떨었다. 아니, 차의재가 예상을 깨부수고 돌아다니는 걸 어떡하라고! 그는 극히 상식에 기반해 움직이는 범인이었기에 감히 차의재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사영은 익룡을 무심히 툭 던지고 등신대 쪽으로 돌아섰다.

    “이딴 건 또 언제 만든 거야?”

    “공익 광고가 방영된 이후 아닐까요? 정확한 건 홍보팀에 여쭤봐야 할 듯합니다.”

    “그 정도로 궁금하진 않고….”

    사영이 손을 까딱이자, 밍기적이 잘 알아듣곤 몸을 돌려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영은 등신대를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허리께까지 흙이 묻은 걸 보면 어디 땅에라도 파묻혀 있던 걸 누가 꺼내뒀나 싶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밍기적이 보고했다.

    “주변에 발자국도,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는 않았겠지.”

    “네. 기척이나 흔적을 숨기는 스킬이 있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알수록 재밌네.”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대꾸한 그때였다. 손바닥이 타들어가듯 욱신대기 시작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장갑을 벗어 제 손을 확인했다.

    손바닥을 긋고 그 피를 얽은 곳, 계약의 증거, 황금빛 선이…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사영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씨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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