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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38)화 (38/67)

38화.

“꿰엑!”

같은 시각, 균열 안에서는 손날로 목젖을 강타당한 거대한 익룡이 날개를 퍼덕이다 축 늘어졌다. 의재는 새를 닮았으나 어딘가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지는 익룡의 목을 복날 닭목 비틀듯 확실히 비틀어버렸다.

균열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속이 울렁거려 토기가 올라왔으나 몬스터 몇 마리를 때려잡다 보니 그것도 조금 진정이 됐다. 다른 기척이 더 느껴지지 않으니 주변 몬스터 정리는 대충 끝났을 터. 의재는 익룡 사체들을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은 후, 손을 탁탁 털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균열에 휩쓸린 사람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진 듯했다.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달려드는 몬스터를 도륙 낼 수 있었다. 그는 죽어버린 익룡 앞에 서서 턱을 문질렀다.

‘그렇게 위험한 균열은 아닌 것 같지만… 몬스터 수는 줄여놓을까.’

정체를 숨겨야 하니 대놓고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몬스터를 죽여 간접적으로 안전을 확보해줄 수는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 무고한 사람이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의재는 꺾어 신은 신발을 바르게 고쳐 신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참 돌아다닌 끝에, 그는 익룡 24마리와 뿔 달린 들소 떼 무리 세 개를 박살 낸 후, 파란색 갈대밭 근처에서 바퀴가 두 개 날아간 사무용 의자와 반으로 쪼개진 책상, 땅에 반쯤 파묻힌 이사영 등신대를 찾아냈다.

의재는 애매한 얼굴로 등신대를 살폈다. 조금 도톰한 판자 주제에 용케도 부러지지 않았다.

“이걸 버려, 말아….”

고민도 잠시, 미우나 고우나 아는 얼굴, 아니, 아는 방독면이다. 게다가 공익 광고에서 하도 봤더니 슬슬 흉악하게 생긴 방독면이 친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최근엔 하은이가 이사영의 괴상한 손동작을 따라 하는 바람에 의재는 미디어가 아동에게 끼치는 영향의 무서움을 직접 경험하고 있었다.

결국 의재는 미운 정이 든 이사영 등신대를 무 뽑듯 쑤욱 뽑아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나무 아래 그늘에 흙 묻은 등신대를 똑바로 세워둔 후, 자신은 부서진 의자에 요령 좋게 턱 걸터앉았다. 몸은 기우뚱거렸지만 단정한 얼굴은 사뭇 심각한 기색이었다.

‘구조대가… 오려나?’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임시 측정소에 발생한 균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구조대가 올 것이다. 아마도.

웬만한 몬스터는 그가 대부분 처리했으니 다른 생존자의 안전도 확보되었고, 이 타이밍에 굳이 의재가 나서서 균열을 클리어할 필요는 없다. 얌전히 앉아 이사영 등신대와 함께 구조대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무작정 구조대만 기다리기엔… 그에게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오늘 저녁 장사는 어쩌지?”

바로 오후 5시에 해장국집 문을 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뿐 아니라, 의재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맑은 육수를 위해선 거품을 계속 걷어내줘야 하는데 예상 시간보다 더 방치해두는 것은 맛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았다. 심지어 약불이긴 해도 육수의 불을 끄지 않고 그냥 와버렸고….

아니, 이대로 방치하다가 혹시 불이라도 나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의재는 핸드폰을 켰다. 시계는 균열에 들어온 후 계속 3시 25분에 멈춰 있었다. 전자기기가 작동하지 않으니 할머니께 연락할 수도 없고, 현 시간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안 돼.’

이대로라면 해장국집 무사고 성실 운영이라는 자신의 프라이드에 오점이 생기고 만다!

구조대를 기다리다가 가게도, 그의 심장도 불타게 생긴 상황. 의재는 초조하게 다리를 달달 떨었다.

사실 의재가 구조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이 상황부터가 문제였다. 밍기적이 세우고 의재가 동의한 계획은 다른 헌터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자신은 길바닥에 널린 흔한 헌터인 척 등록하고 복귀하는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 심지어 임시 등록소에서 벌어진 균열에 휘말린 탓에 너무 큰 변수가 끼어들고 말았다. 예상컨대 구조대는 균열관리청 소속 헌터와 각성자 관리국 헌터, 지원 요청을 받고 달려온 길드 소속 헌터까지, 다양하게 구성됐을 것이다.

그리고 해장국집은 헌터들의 방앗간 같은 공간. 모든 종류의 헌터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던가.

만약 구조대에 해장국집에 와본 헌터가 있다면. 심지어 단골이라면? 자신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볼 테다.

‘해장국집 알바님이 이 균열엔 웬일이세요?’

‘그러게요….’

당연히 궁금해할 사안부터 시작해 온갖 대화를 나눌 테고, 아무리 숨긴다 한들 각성자 등록을 하러 왔다가 재수 없게 균열에 휩쓸렸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게 될 게 뻔했다. 적어도 해장국집 단골들은 전부 알게 되겠지. 상상만 해도 피가 차갑게 식었다.

조용히 살고 싶어 취직한 해장국집이 헌터 맛집이라 계속 헌터와 부딪히질 않나, 이사영을 만나질 않나, 마석의 후폭풍에, J의 생존이 강제로 온 세상에 까발려지질 않나, 헌터 등록하러 왔다가 균열에 휘말리기까지.

이 정도로 계속해서 악재가 겹치니, 의재는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미신을 떠올렸다.

‘씨X…. 혹시 내가 올해 삼재인가?’

균열 안이라 넥스비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원래도 꽤 엉망이었던 차의재의 인생은 최근 몇 주간 더 엉망진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딘가에서부터 단단히 꼬인 게 분명했다. 그는 여기서 나가면 가게 곳곳에 소금을 뿌려놓으리라 마음먹었다.

아무튼, 삼재든 아니든 이대로 자신의 조용한 삶이 날아가게 둘 순 없었다. 물론 마석과 이사영 덕분에 이미 반쯤은 너덜너덜해졌지만, ‘우리 조용한 삶 정상 영업합니다’ 현수막을 걸어야 하는 상태지만…. 그나마 남은 이거라도 지켜내야 했다.

의재는 의자에서 일어나 목을 한 바퀴 돌렸다.

‘계획이나 세우자.’

균열에 휘말린 이들을 구하기 위해 헌터들이 올 테지만, 그쪽은 자신을 위한 구조대는 아니었다. 그러니 구조대는 없다고 가정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머릿속에 잠시 아주작은기적밍기적의 뻔뻔한 얼굴과, 이사영의 반질반질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떨쳐냈다.

‘안 오겠지.’

이럴 때는 아주 작은 희망도 품지 않는 게 낫다. 뭐든지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계획을 짜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의재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진리였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한 뒤, 운동화 코로 바닥에 슥슥 그림을 그렸다. 최대 효율로 이곳을 탈출한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균열은 그 중심에 있는 균열의 주인을 처리해야 사라진다. 구조대는 생존자 전원 구출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움직이기에 주인 처리는 다음 단계로 미뤄두는 게 일반적이다. 이렇게 되면 가게 오픈 시간에 늦을 게 뻔하다.

그러니 구조대가 진입해 생존자를 구출하는 사이, 자신은 구조대를 피해가며 홀로 주인을 죽인다. 완벽하군.

의재는 운동화 밑창으로 그림을 문질러 지웠다. 어차피 생존자들도 전부 흩어져 있어 수색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균열이 사라진 후 어디 있었냐고 물어보면… 구석에 짱박혀서 숨어있었다고 하면 된다.

‘최대한 빨리 주인을 죽인 후 탈출해서 가게에 복귀, 육수를 수습하고 저녁 장사 하기.’

머릿속으로 계획을 되새기며 짧게 심호흡한 의재는 후드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 꺼냈다. 아까 용달차의 글러브박스에서 꺼낸 부처님 부채였다.

맨손으로 싸우다 옷이 더러워지기라도 하면 정각 오픈에 지장이 생긴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하는 법. 의재는 눈을 감았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부처님.’

<추적자의 눈!>

다시 뜬 두 눈은 새파란 빛이었다. 납작한 평면도 위로 불꽃이 일렁이며 피어오른다. 몬스터들은 의재가 한 차례 죽여놔서인지 그 수가 많지는 않은 듯했다. 사람 모양도 곳곳에 보이는 걸 보면 생존자들도 잘 숨어있는 것 같았다.

의재는 생존자의 위치와 수를 파악한 후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균열의 한가운데, 초록빛으로 일렁이는 거대한 불꽃이 하나 있었다.

‘저 녀석이군.’

<소리 없는 발걸음!>

두 발을 새하얀 바람이 감싸며 그의 기척을 감춰주었다. 의재는 불꽃을 향해 소리 없이 뛰기 시작했다.

* * *

균열관리청 소속 A급 헌터, 양혜진은 다크서클이 쭉 내려앉은 얼굴로 광진구 임시 등록소…였던 것 앞에 서 있었다. 컨테이너가 있던 자리는 균열이 집어삼켜 폐허나 다름없어졌다.

분명 오늘 아침에 출근할 때만 해도 한가하다고 좋아했건만,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질 줄은.

‘이래서 한가하다고 하면 안 돼…. 바로 사고가 터지잖아.’

겨울바람에 흰색 안전 글씨가 적힌 형광 조끼가 처량하게 펄럭였다. 킁, 코를 훌쩍인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웅얼거렸다.

“하…. 무슨 균열이 터져도 하필이면 임시 센터에 터지냐? 진짜 재수도 존나게 없지.”

양손에 번쩍이는 안전봉을 들고 균열 입구를 노려보던 다른 B급 헌터도 고개를 주억댔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도 휘말린 사람 대부분이 각성자라 다행입니다. 여유 시간이 좀 있잖습니까.”

“여유 시간은 무슨. 다 등급 낮고 사무직으로 일하던 각성자들이라 제대로 못 싸울 거야. 잘 숨어있기나 하면 다행이지….”

“선배님! 선배님!”

걱정이 반쯤 섞인 대화를 가르고 주변을 통제하러 갔던 신입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혜진은 담배 연기를 훅 내뱉었다.

“왔니? 기자들 몇 명이나 왔든?”

“어…. 여섯 명쯤 있었습니다! 아마 더 올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지원 인력은? 각관국에서도 온다던데.”

“어, 그게. 아, 이거 말씀드리려고 온 건데!”

허둥대던 신입이 허리를 바짝 세우고 외쳤다.

“이, 이사영 님이 오셨습니다! 균열 공략…하러요.”

신입이 전한 마지막 말에 양혜진은 담배를 다시 물려다 말고 멈칫했다. 신입은 제 사수가 대답이 없는데도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다급한 그의 얼굴보다도 보고받은 양혜진의 얼굴이 더 당혹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애한테 일을 너무 많이 시켰나?’

그녀는 담배를 든 채 멍하니 신입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자아 성찰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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