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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36)화 (36/67)
  • 36화.

    빠각!!

    신이 내린 동체 시력을 이용해 목검의 위치를 파악한 그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저걸 잡아? 아니, 잡았다간 그대로 끝이다.

    의재는 제 뇌가 조금 더 빠르게 돌아가기를 바라며 머리를 굴렸다. 아니면 아픈 척을 해야 하나?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의재는 빠르게 판단을 마친 후, 몸을 조금 기울여 제 왼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 슬쩍 신음을 흘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으, 으 악.”

    “…….”

    “아 이 고 이 렇 게 아 플 수 가.”

    물론 별로 소용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매우 멀쩡한 목소리인 데다, 당황해서인지 아픈 척을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해버리고 말았다. 의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목검 내구성이 저 모양이란 말인가? 차라리 해장국집 국자가 더 튼튼하겠다!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목검은 겹겹이 쌓인 박스 사이에 퍽 소리와 함께 안착했다.

    “…….”

    “…….”

    “…….”

    “많이… 아프네요….”

    의재가 영혼 없는 엄살을 마저 부려보았지만 지독한 침묵이 컨테이너를 채우는 것은 막지 못했다.

    최석윤이 멍한 얼굴로 부러진 목검과 그대로 멈춘 목각 인형, 어깨를 감싼 의재를 번갈아 보았다. 최석윤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툭, 소리와 함께 인형의 오른팔마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독한 침묵은 이제 고요함을 넘어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의재는 바닥에 널브러진 인형 팔을 힐끗 보고 이를 악물었다.

    ‘비품 체크 똑바로 안 하냐? 공무원 새끼들, 진짜 존나 빠져가지고….’

    의재는 이 모든 돌발 상황에 대한 책임을 각관국에 돌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일단 지금은 낡아빠진 인형과 연약한 목검을 탓할 때가 아니다! 어서 이 답 없는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최석윤이 슬슬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저기, 차…의재 님?”

    “…네.”

    “지금 사용하신 그 스킬, D등급이 맞습니까?”

    최석윤의 얼굴에 일말의 의심이 깃들었다. 의재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 대답했다.

    “네, D등급 스킬 맞습니다.”

    “그런데 인형이랑 목검이 왜 부러졌는지….”

    “그건 저도 잘….”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어 낡은 운동화로 바닥을 문지르면서 중얼댔다.

    “신체가 강화된다고 적혀 있긴 한데요, 뭐가 어떻게 강화된 건지도 잘 모르겠고….”

    말끝을 흐리며 어물대던 의재가 뒷목을 문지르며 시무룩하게 물었다.

    “저기…, 선생님. 이 인형, 배상해야겠죠?”

    “예? 아니 우선은….”

    “혹시… 이거 많이 비싼가요?”

    [특성 포커페이스(B)가 활성화됩니다.]

    의재가 울상을 지은 채 목검에 맞은 어깨를 문지르자, 이제는 최석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내가 막 각성한 사람에게 무슨 소리를!’

    헌터 업계에 우스갯소리처럼 퍼진 이야기가 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각성자는 매우, 아주, 엄청나게 예민하니 폭탄을 다루듯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는!

    물론 그건 각성자 등록 센터에서 근무하는 인원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아예 없는 말은 아니라는 소리다. 신입 공무원을 교육하는 강사가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는 게 그 내용이었으니까.

    “막 각성한 신규 각성자는 갑자기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매우 예민합니다. 작은 자극이 커다란 문제로 발전할 수 있으니, 그들을 대할 때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요약하자면 신규 각성자는 72시간 밤새운 사람만큼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해 회까닥 돌아버릴 수 있으니, 괜히 건드리지 말고 잘 달래서 등록시키라는 권고였다.

    의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최석윤은 신입이었다. 일반인과 신규 각성자 배려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각성자 특례법 교육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신입!

    그가 조금만 더 눈썰미가 좋았다면 의재의 눈이 누구 하나 족칠 것 같은 기색임을 눈치챘겠지만, 안타깝게도 각성자 관리국에서 세뇌에 가깝게 받은 교육이 최석윤의 눈에 깍지를 끼웠다. 게다가 후드에 가려지긴 했어도 언뜻 보이는 의재의 잘생긴 얼굴이 신뢰를 더했다.

    ‘하긴, 3일 전에 막 각성한 각성자가 뭘 알겠어?’

    최석윤의 생각은 눈앞의 신규 각성자가 감정 기복을 이기지 못하고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잘 달래줘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또 자신은 곧 관리국으로 돌아갈 텐데 괜히 사고 칠 수는 없지. 석윤은 흠흠, 헛기침하며 부러진 팔을 주워 들었다.

    “괜찮습니다. 이 인형이 많이 낡긴 했어요. 본 건물로 옮길 때 교체할 예정이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일단 스킬 시연은 이걸로 마치고, 이제 능력 측정을 할까요?”

    석윤이 온화하게 웃으며 측정 기계를 가리켰다. 의재도 마주 웃기는 했으나 속으로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산 넘어 산이네.’

    이 망할 측정이 끝나질 않는다.

    최석윤이 발판을 가리켰다.

    “신발 벗고 여기 올라가시면, 기계가 시스템에 등록된 등급과 능력치를 확인해 모니터에 띄워줄 겁니다. 의재 님은 그냥 서 있기만 하시면 되세요. 참 쉽죠?”

    “예에.”

    너무 쉬워서 문제였다. 실제 등급에서 한 단계 하락한다 쳐도 차의재의 현 등급은 A급. 그가 원하는 D급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의재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기계와 연결된 모니터는 책상에 놓인 것 하나. 결과를 확인하고 마땅치 않으면 저걸 부수면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최석윤의 시선을 돌리거나, 아예 이 방에서 내보내야 했다. 의재는 신발을 벗다가 말고 손을 들었다.

    “저기, 선생님.”

    “예, 무슨 일이시죠?”

    “방금 맞은 어깨가 좀 아파서요… 혹시 포션 좀 마실 수 있을까요?”

    [특성 포커페이스(B)가 활성화됩니다.]

    의재는 최대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등록하러 온 각성자에게 지급하는 건 값싼 비품 포션일 테니 개인 인벤토리에 들어 있지는 않을 것이고, 가지고 있는 개인 소유 포션을 주기에는 값이 비싸니… 결국 창고에 다녀와야 할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최석윤은 주변을 두리번대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포션이 지금 창고에 있어서… 잠깐 다녀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동안 측정하고 있죠, 뭐. 어차피 기계가 해주는 거라면서요.”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발 모양에 맞춰 서시면 됩니다. 웬만하면 크게 움직이지는 마시고요. 기계에서 종소리가 나면 내려오신 뒤 결과 확인하시면 됩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석윤이 잰걸음으로 방에서 빠져나감과 동시에 의재는 민첩하게 신발을 벗고 발판 위에 올라섰다. 푸른 빛이 발부터 시작해 전신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종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빨간 알파벳이 나타났다.

    [93번, 차의재 님의 등급은 A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새끼야.’

    의재는 ‘파이팅!’을 외치던 밍기적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 측정을 하는 게 정말 최선이 맞았느냐고 멱살을 짤짤 흔들며 묻고 싶었지만, 본인 몸에 실험했던 포션이 먹히지 않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테니 따진다고 해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컴퓨터 본체를 아주 살짝만 손 봐줘야겠다. 증거 인멸을 위해 의재가 발판에서 내려와 신발을 구겨 신은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세상이 크게 울렸다. 얼마 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우르릉, 바닥과 컨테이너가 덜덜 떨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태풍처럼 강한 바람이 불었다. 이곳은 창문이 없는 컨테이너 안인데도!

    거센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의재가 푹 눌러 쓰고 있던 후드가 홱 벗겨졌다. 의재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한발 물러서 겨우 중심을 잡았다.

    “각성자님! 괜찮으십….”

    포션 꾸러미를 든 최석윤이 문 앞에 나타났다. 그 또한 바람을 가르며 겨우 이곳까지 당도한 건지 온 머리가 산발이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던 의재는 그 뒤로 펼쳐진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최석윤의 뒤쪽으로 푸르게 빛나는 소용돌이가 나타나 있었다.

    균열이다!

    의재는 황급히 최석윤을 향해 손을 뻗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 손 잡아요!”

    “예? 어, 어? 으아악!”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던 최석윤이 비명을 지르며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의재는 이를 악물었다. 이유 모를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속이 울렁거린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목구멍으로 울컥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이대로 자신마저 균열에 빨려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의재는 스멀스멀 떠오르며 자신의 의식을 가득 채우는 끔찍한 광경에 숨이 조금씩 가빠오기 시작했다.

    살려달라며 매달리던 손, 몬스터에게 짓밟힌 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던 누군가의 사체들, 어디서 묻은 피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잔뜩 남은 혈흔.

    그리고 균열 속에 남겨진….

    ‘아, 씨X.’

    푸른 빛이 파도처럼 그의 머리 위를 덮쳤다. 차의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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