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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34)화 (34/67)
  • 34화.

    “아, 고객님을 저격하는 건 아닙니다.”

    “예에.”

    “어쨌든, 등급이 충분히 낮아지셨을까요? 부족하면 약화 포션도 드셔야 하는데요.”

    의재는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여보며 스스로의 몸 상태를 가늠했다. 한참 멀었다. 이래서야 B급이라도 뜨면 감지덕지할 수준이었다. 의재는 고개를 저었다.

    “부족할 것 같은데요.”

    “그럴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잠시만요.”

    때마침 신호가 빨간불이었다. 밍기적이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종이 상자를 꺼내 건넸다. 뚜껑을 열자 희뿌연 액체가 담긴 유리병 10개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A급 약화 포션입니다. 파도 길드의 포션 제작자들이 하룻밤 만에 만들어낸 역작이죠.”

    “…진짜로?”

    “예. 길드장님이 보너스 300%를 약속하셔서 다들 앞다퉈 야근을 자처했습니다.”

    웬 돈지랄이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였다.

    ‘내 돈 아닌데 뭐.’

    그는 한껏 가벼워진 표정으로 병 하나를 꺼내 허공에 비춰보았다. 밍기적이 어쩐지 결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래 무기에 바르는 용도긴 한데…. 마셔도 큰 이상은 생기지 않으실 겁니다. 어제 완벽하게 생체 실험을 거쳤습니다.”

    불투명한 액체를 이리저리 살피던 고개가 우뚝 굳었다. 대체 누구에게 신체 실험을 했단 말인가?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스윽 밍기적을 쳐다보던 의재는 뚜껑을 열고, 망설임 없이 포션을 마셨다.

    그러나 의재의 몸에 찾아온 감각은 밍기적의 말과는 조금 다른 결과였다.

    ‘별 차이 없는데?’

    착용하자마자 효과가 나타난 팔찌와 달리, 포션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생체 실험의 결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기엔 너무 허무한데. 의재가 오묘한 얼굴로 두 번째 병을 땄다.

    “어떠십니까?”

    의재는 대답하지 않고 두 번째 병을 들이켰다. 하지만 여전히 몸 상태는 그대로였다.

    ‘진짜 별 차이 없는데?’

    밍기적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답변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면 바로 해독제를 드셔야 합니다.”

    “밍기적 씨.”

    “예, 고객님.”

    “원래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나요?”

    “아뇨. 실험 결과에 따르면 섭취와 함께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서 그런지 한 병만 마셔도 신체 능력과 등급이 하락하더군요. 시스템 경고창도 떴고요. 약해진 능력이 이대로 고정돼버릴까 봐 식겁했습니다.”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조금 이상한데. 설마 이거 실험당한 사람이 너냐. 의재는 빈 병을 살피며 몇 번이나 확인하듯 계속해서 물었다.

    “시스템 경고창이 뜬다고요.”

    “예. 왜 그러시죠?”

    의재는 또 말없이 세 번째 병의 뚜껑을 땄다. 이쯤 되니 밍기적도 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초조하게 핸들을 두들기던 그가 물었다.

    “그, 혹시. 정말 호옥시. 아니겠지만 만약을 위해 여쭙자면.”

    “…….”

    “효과가… 전혀 없으십니까?”

    꿀꺽.

    세 병째 마셨음에도 의재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밍기적은 이젠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의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밍기적 씨.”

    “예.”

    “시스템상 약화 포션은 독으로 취급되나요?”

    “아, 그렇습니다. 어제 저희 길드장님도 같이 드셨는데, 그분은 웬만한 독이 다 효과가 없으신 터라 약화 포션도 효과가 없으…셨….”

    대답하던 밍기적의 두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의재는 조용히 상자 뚜껑을 덮었다. 바실리스크의 독이 약화 포션을 마시는 족족 말도 없이 알아서 해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A급이니 시스템창을 띄울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겠지.

    “설마 고객님, 독에 내성이 있으십니까? 그런 말은 못 들었습니다. 오히려 독에 매우 취약하니 제대로 신경 쓰라고 그렇게 개지랄을 떨던데….”

    밍기적이 초조하게 중얼거리며 물었다. 말끝에 가선 거의 혼잣말이나 다름없었다.

    “저기요.”

    “예? 예. 말씀하십시오.”

    “이것 말고 등급을 낮출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밍기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당장 헌터 마켓에 가서 법인 카드로 약화 저주 아이템을 싹쓸이하는 방법은 어떠십니까. 살면서 그런 돈지랄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죠.”

    “기각합니다.”

    “…역시 그러시겠죠. 즉시 소문이 퍼질 테니까요.”

    음울하게 중얼거린 밍기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터라… 예, 지금은 팔찌가 전부입니다.”

    용달차 안의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밍기적은 계획이 틀어진 데에 큰 충격을 받은 건지 공허한 눈으로 연신 중얼대고 있었다.

    의재 또한 이 상황이 조금 막막했으나, 옆자리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우울해하는 탓에 해장국집에서 일하며 배운 스몰 토크를 시도했다.

    “불교신가봐요?”

    “예, 예? 전 무교인데요.”

    그럼 저 백미러에 달랑거리고 있는 저 염주는 뭔데. 의재는 순간 따져 묻고 싶었으나 짙은 실패의 향기에 코만 슬쩍 문질렀다. 그러나 의재가 단련한 말솜씨는 이곳에서 무너질 깜냥이 아니었다.

    “여기 염주가 있길래요.”

    의재가 염주를 손끝으로 톡톡 치자 밍기적은 그제야 자신이 그것을 달아두었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가 작은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국사 기념품 가게에서 이만 원 주고 산 겁니다. 리얼리티를 위해서. 이 차량과 굉장히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리얼리티 좋아하네. 그게 정장 입고 용달차 운전하는 놈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의재의 눈빛은 차갑게 식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스몰 토크는 제 역할을 해낸 것 같았다. 밍기적은 기세가 조금 살아난 듯 약간 흥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가 불교로 보일 정도라면 그 역할을 다한 거죠. 사서 걸어둔 보람이 있군요.”

    “아, 예.”

    의재는 밍기적의 랩 같은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조수석의 글러브박스를 열었다. 그 안엔 웬 투박한 안마기나 발 지압기, 접이식 부채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부채 하나를 꺼내 펼치자 연꽃 속에서 합장한 부처님이 의재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냈다. 의재는 글러브박스를 도로 쾅 닫았다.

    ‘이 새끼 그냥 호구 잡힌 거 아냐?’

    밍기적에 대한 신뢰가 수직 하락하는 동안, 용달차는 부지런히 달려 등록 센터 인근에 도착했다. 밍기적은 센터가 보이는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임시 등록 센터는 구청 주차장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컨테이너였다. 컨테이너 입구엔 엄지를 척 든 정빈과 방독면을 쓴 채 팔짱을 낀 이사영의 등신대가 서 있었다. 문 위에는 현수막도 하나 걸린 채였다.

    ‘당신의 각성자 등록을 응원합니다! ―각성자 관리국’

    오는 사람 기를 죽이려고 세워둔 거라 해도 믿을 만큼 압도적인 비주얼이다. 이사영 등신대는 공익 광고 이후에 세운 듯 정빈의 것보다 말끔했다. 밍기적은 상사의 등신대를 보지 않기 위함인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우선 도착하긴 했습니다만, 고객님. 팔찌 한 쌍만으로는 D급을 받기엔 약화 효과가 부족할 거라 생각됩니다. 전략적 후퇴를 했다가 다시 방문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언제요?”

    “…제가 해외 출장이 잡혀있어서 3주 뒤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말이 되냐? 하루라도 빨리 등록해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하는 의재가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자, 밍기적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방법은요.”

    “…사실 오늘 해치우는 게 최선이긴 합니다. 이 컨테이너는 본 건물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만 운영하는 거라…. 아마 제가 출장에서 다녀왔을 땐 이미….”

    “빈집 털이를 할 거면 오늘이다?”

    “단어 선택이 심상치 않으시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팔찌도.”

    의재가 손목을 매만졌다. 밍기적이 비통하게 말했다.

    “오늘 검사받지 않으면 다음에 검사받을 때까지 이대로 지내셔야 합니다. 그게 실은 일회용이라서요.”

    솔직히 내내 약화 저주에 걸려 지내는 건 별로 상관없었다. 하지만 의재는 밍기적의 말 뒤편에 담긴 속마음을 읽어냈다.

    “그냥 가서 검사받으라는 거죠, 지금.”

    “사실 그렇습니다.”

    “아까는 전략적 후퇴를 하자면서요.”

    “그건 예의상 드려본 말씀이었습니다.”

    “…….”

    “고객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고객님을 믿습니다.”

    밍기적이 두 손 모아 응원했다. 의재는 어이가 없었다. 이 자식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긍정적이란 말인가? 밍기적은 다시금 결연한 낯짝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안 되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테니까요.”

    ‘최후의 수단 사용할 생각 말고 그냥 D등급 받게 해달라고.’

    “자자, 부담 갖지 마시고. 저는 커피 사서 기다릴 테니 잘 받고 오십시오. 파이팅!”

    사람을 염주로 때리면 안 되겠지? 의재는 달랑이는 염주를 힐끗 보았다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양손을 꼬옥 주먹 쥐고서 응원을 보내는 밍기적을 뒤로한 채, 그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터덜터덜 임시 센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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