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33)화 (33/67)
  • 33화.

    5, 가는 날이 장날이다

    다음 날 오후 2시 40분. 재료 준비 시간 팻말을 걸어둔 의재가 육수를 끓이는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 가게 청소를 할 때였다.

    웬 정장을 입은 사람이 가게 앞으로 다가와 철제문을 똑똑 두들겼다. 재료 준비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놨는데도 노크를 하다니. 의재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다시 고쳐 쥐었으나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일 중으로 사람 하나 보낼게요.”

    의재는 빗자루를 든 손의 힘을 살짝 풀고선 문을 열었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의재를 발견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혹시 차의재 님 본인 맞으십니까?”

    “예, 맞는데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주작은기적밍기적이라고 합니다. 이사영 길드장님이 보내셨습니다.”

    아주작은기적밍기적. 워낙 길고 이상한 이름이라 1번 헌터 채널에서 스치듯 봤음에도 기억에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초면부터 네 이름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의재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예에, 우선 명함 받아주십시오.”

    아주작은기적밍기적이 양손으로 공손히 명함을 내밀었다. 덩달아 의재도 빗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공손히 작은 직사각형의 종이를 받아 들었다. 파도 길드 전투지원 1팀, 아주작은기적밍기적.

    “오늘 제가 고객님을 모시고 능력 측정 및 등록 절차를 밟을 건데요, 잠시만요.”

    아주작은기적밍기적은 인벤토리에서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보여주었다.

    ‘등급 낮게 받기 대작전!’

    폭탄이 터지는 듯한 배경 이미지와 함께 빨간 궁서체로 적은 제목이 대뜸 시선을 강탈했다. 기이한 디자인 템플릿을 본 의재의 표정이 기묘해졌으나 그에 반해 아주작은기적밍기적은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낮은 등급을 받는 게 목표시라고 들었습니다. 맞지요?”

    “…….”

    “아, 말로 대답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이 설문조사에 성심성의껏 답변하시면 됩니다.”

    밍기적이 화면을 넘기자 설문조사 항목이 나타났다. 의재는 밍기적이 건네준 태블릿 펜으로 설문조사 답변을 시작했다.

    [1. 헌터 등록 시 어떤 등급을 받고 싶으십니까? S등급부터 F등급 사이로 적어주십시오.]

    최대한 허접하고 흔한 등급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이사영과의 거래를 받아들일 때 자신이 제시한 조건이었기에 의재는 펜 끄트머리로 입가를 톡톡 치며 잠시 고민했다.

    F급은 자신의 본래 등급인 S급의 능력치를 생각했을 때 간극이 너무 커 현실적으로 받기 어려울뿐더러, 미각성자로 숨어 살 때만큼이나 해명해야 할 건덕지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F급이 맨손으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건 요행이 아니니까.

    그는 진지한 얼굴로 끼적였다.

    E, D

    [2. 당신의 시스템상 등급은 어떤 등급입니까? 등급을 밝히고 싶지 않다면 다음 예시에 맞춰 적어주십시오. (F~C: 나약하다. B~S: 강하다.)]

    배려심과 섬세함이 돋보이는 항목이다. 의뢰인이 등급 조작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완벽히 파악한 문항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거래를 다른 이와도 한 적 있나 싶을 정도로 허를 찌르는 내용이기도 했다.

    강하다

    큰 망설임 없이 예시대로 답변을 적은 의재가 시선을 내려 마지막 항목을 확인했다.

    [3. 등급을 조작하기 위해 약물과 저주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잠깐. 뭔가 이상한 문항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배려심 깊은 항목 다음엔 웬 신체 포기 각서에나 들어가 있을 법한 독소 조항이 들어 있었다. 성실하게 항목들을 채우던 의재가 손을 들고 밍기적을 불렀다.

    “저기요, 아주작은기적밍기적 씨.”

    “네, 고객님.”

    “3번 문항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예? 잠시만요.”

    밍기적이 고개를 쭉 내밀어 화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3번 문항은 정상적인 내용인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실까요?”

    “약물과 저주를 사용한다는데 이게 맞아요?”

    “예에. 아무래도 능력을 숨기려면 그 정도는 감수하셔야 합니다.”

    이 자식 사짜 아니야? 의재는 여차하면 태블릿으로 밍기적의 정수리를 찍을 준비를 했다. 밍기적은 살기를 느낀 건지 슬그머니 한발 물러나며 물었다.

    “고객님, 혹시 헌터 등록 시 능력 측정을 어떻게 하는지는 아십니까?”

    의재는 8년 전 측정법은 알고 있었지만, 최신 측정법은 몰랐다. 마석 값이 올랐듯 측정 방식도 바뀌었겠지. 한번 크게 데였던 그는 괜히 아는 척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밍기적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측정을 하러 가면 가장 먼저 수기로 서류를 작성하고, 관리국에서 개발한 기계로 능력을 측정하게 되는데요. 등급 책정 과정에서는 대표 스킬 시연까지 확인합니다.”

    “…….”

    뭐, 수기야 적당히 뻥 좀 섞어서 쓰면 되고, 그편을 권장드리기도 하고요. 대표 스킬은 대충 스킬 하나 보여주면 됩니다. 둘 다 별로 안 중요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측정기입니다.”

    “측정기?”

    “네, 그렇습니다. 그게 꽤나 정확해서, 공무원 눈 속이는 것보다 그놈한테 등급을 숨기는 게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밍기적이 검지를 척 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측정기는 마석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일반인에게는 반응하지 않고, 각성자에게만 반응하죠.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상식과는 별개로, 시스템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겁니다.”

    “…….”

    “그럼 우리도 시스템의 법칙에 따라 기계를 속이면 됩니다. 던전에서 나오는, 각성자의 등급을 하락시키는 약물이나 저주를 이용하는 거죠.”

    밍기적은 자신의 주장이 어떠냐는 듯 뿌듯한 눈치였다.

    ‘왜… 그럴듯하지?’

    의재도 듣고 보니 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어차피 웬만한 약물이나 저주는 제 몸에 크게 타격을 주지도 못할 텐데, 그냥 눈 한번 딱 감으면 될 일인 것 같았다. 가진 건 튼튼한 몸뿐인데 알뜰히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의재는 홀린 듯 펜을 바르게 잡은 후 마지막 문항에 답을 적었다.

    [3. 등급을 조작하기 위해 약물과 저주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태블릿을 받아 든 밍기적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자, 그럼… 아차, 주민등록증은 챙기셨습니까?”

    다행히 균열에서 나온 후 재발급받았던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의재는 가게 안 카운터를 가리켰다.

    “지갑에 있어요.”

    “그럼 챙겨서 차에 타시죠. 빠르게 출발합시다.”

    그가 가리킨 건 파란 용달차였다. 골목과 너무 잘 어울리는 비주얼이라 끌고 온 차가 저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재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밍기적과 먼지 덮인 용달차를 번갈아 보았다.

    ‘파도 길드에 돈이 없나.’

    “혹시 저희 길드가 가난하다는 착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이 새끼 특성 중에 독심술 있는 거 아냐? 의재는 슬쩍 시선을 피하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 안 했는데요.”

    “하하, 저도 설마 고객님이 그런 생각을 하진 않으셨을 거라고 믿지만, 참고차 말씀드리자면 이건 저희가 잠복용으로 사용하는 길드 공용 차량이랍니다.”

    “아, 진짜요?”

    “왜 이렇게 답변에 영혼이 없으신 것 같지?”

    의재는 카운터에서 지갑을 챙긴 후, 주방에 들어가 끓고 있는 육수를 확인했다. 조금 더 놔뒀다가 거품을 걷어내야 하는데…. 의재는 턱을 문지르다 밖에 선 밍기적을 향해 물었다.

    “등록하는 데 얼마나 걸리죠?”

    “으음.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한 시간은 안 넘길 겁니다.”

    약불로 바꿔놓고 다녀오면 되겠다. 어차피 육수는 오래 끓일수록 맛이 깊어지니까 적당히 시간 맞춰서 오면 별문제 없을 것이다. 의재는 뜰채로 거품을 걷어내고 불을 줄인 후, 앞치마를 벗어 벽에 걸었다.

    지갑을 챙겨 나온 의재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밍기적이 벨트를 매라는 시늉을 했다. 벨트를 맨 걸 확인한 밍기적이 시동을 걸었다.

    “저희는 각성자 관리국에 있는 공식 등록 센터에 가지 않고, 광진구에 있는 임시 등록 센터로 갈 겁니다. 그쪽이 빠르고, 시선도 덜 모이는 데다, 강한 각성자도 없거든요.”

    “새로 생긴 곳이면 더 신경 쓰지 않나?”

    “그건 생긴 직후에나 그랬고, 광진구 센터는 생긴 지 석 달 째라 조금 풀어졌습니다. 곧 본 건물이 완공될 예정이라 더 해이해졌을 겁니다.”

    밍기적이 힐끗 의재를 보더니 가벼운 턱짓으로 그 옆쪽을 가리켰다.

    “거기 옆에 검은 상자 보이십니까?”

    “아, 네.”

    “그 안에 팔찌 한 쌍이 들어있을 텐데, 착용해보시겠습니까?”

    상자 안에 든 건 뱀이 동그랗게 꼬리를 문 모양의 은팔찌 두 개였다. 의재가 팔찌를 꺼내 들자 아이템의 정보가 떠올랐다.

    [우로보로스의 굴레 (A)

    한 사람이 한 쌍을 착용할 시 착용자에게 약화 저주를 내린다.]

    설문조사 항목에 굳이 약물과 저주 얘기를 넣은 이유가 이거였나. 대뜸 저주 아이템을 쥐게 된 의재가 떨떠름히 말했다.

    “약화 저주… 아이템이네요.”

    밍기적이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등급을 깎으려면 약화 저주가 걸린 아이템을 착용하는 게 가장 빠르고 편해서요.”

    “이거 저주 해제는 됩니까?”

    “그럼요. 저주 해제 스크롤도 제대로 챙겨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측정이 끝난 후 바로 풀어드릴 겁니다.”

    체계적으로 거짓말을 하려니 과정이 험난했다. 의재는 왼쪽 손목에 팔찌 두 개를 전부 착용했다. 왼팔을 중심으로 모래주머니를 찬 듯 전신이 무거워졌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몸이 좀 무거워진 느낌인데요. 그런데….”

    의재가 손목에서 잘그락대는 팔찌를 툭 건드렸다.

    “이런 걸로 등급을 속이면 들키지 않나요?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밍기적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 괜찮습니다. 착용 아이템을 검사하기도 하는데… 그건 기존 헌터들이 재검사받을 때나 하는 절차고요.”

    “…….”

    “막 각성한 각성자가 측정할 때는 아이템 검사를 안 합니다. 할 생각을 못 한다는 게 맞겠죠. 헌터 등록도 안 한 사람이 어디서 아이템을 얻겠습니까? 미등록자는 헌터 마켓 이용도 못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밍기적은 여유롭게 좌회전을 하며 말을 이었다.

    “다들 높은 등급을 받고 싶지, 낮은 등급을 받고 싶어하진 않으니까요.”

    “…….”

    “아, 고객님을 저격하는 건 아닙니다.”

    말이나 말지. 의재는 조금 떨떠름하게 그의 옆얼굴을 잠시 쳐다보았으나 틀린 말도 아니라 금방 수긍했다. 손목에 감긴 팔찌가 잘그락거리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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