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실험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의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계획이 얼마나 수상한지는 몰라도 애초에 피험자로 각성자를 선정한 것부터가 의아했다.
일반인에 비해 각성자가 끌어들이기도, 억지로 납치하기도 힘들다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각성자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있기에 굳이 실험체로 삼았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그래도 과하게 수고로운 실험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만큼의 공수를 들이면서까지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생각에 골몰한 의재의 얼굴을 관찰하던 사영이 여상한 음성으로 물었다.
“각성하는 방법이 뭔지는 알아요?”
“…시스템에게 선택받는 것. 아냐?”
의재는 시스템이 나타난 그날을 떠올렸다. 어떤 장면은 떠올릴 때마다 또다른 감각을 동반한다. 그것은 그때 들었던 소리일 수도 있고, 맡았던 냄새나 느꼈던 촉감일 수도 있다. 의재에게 균열의 날이란 그 모두를 안고 있는 기억이었다.
모든 게 부서지고 무너진 수라장 속에서 의재는 무너진 건물 틈에 웅크린 채 부모님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었다. 매캐한 탄내와 피비린내가 섞여 지독하게 풍기던 악취. 차갑게 식어버린 체온. 쿵, 쿵, 길목을 헤집는 몬스터의 발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럼 시스템은 무엇을 보고 각성자를 선택할까요.”
사영이 손가락으로 유리를 짚자, 유리를 녹이고 나서 고여 있던 검은 피들이 흐물거리며 자기네들끼리 뭉치더니 사람과 몬스터의 형태를 이뤘다. 검은 몬스터가 작고 검은 사람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시스템은,”
작고 검은 사람의 머리 위로 네모난 창이 나타났다.
“간절한 소원에 반응한다….”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검은 사람도 몬스터를 향해 피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한참 엎치락뒤치락하던 두 형체 중, 몬스터는 검은 피로 돌아갔다.
“인간이 간절한 소원을 가지면, 시스템은 그 기운에 이끌려 인간을 찾는다.”
“…….”
“이게 일반적인 상식이죠. 균열에 휩쓸린 사람이 일반인보다 각성할 확률이 높은 이유도 그래서고요. 죽기 싫다고 비는 것도 일종의 소원이니까.”
의재는 홀로 우뚝 선 검은 사람의 형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영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검은 사람도 작은 웅덩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사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거든요.”
의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영과 마주 보았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지금으로써는 시스템이란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대부분은 이에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시스템의 그 선택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르겠지. 아마 인간 스스로 능력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한층 심각해진 의재의 표정을 읽은 사영이 턱을 괴며 물었다.
“…네가 말한 그 사람들이 마약상들이랑 동일 집단일 가능성은?”
“음, 더 생각해봐요.”
사영은 장난기가 슬쩍 묻은 목소리로 흘리듯 이야기했다.
“내가 고작 그거 물어보라고 이걸 다 말해줬을까….”
의재는 순간 옆에 있는 테이블을 들어 이놈에게 없는 버르장머리라는 것을 머리카락 대신 심어줄까 3초간 고민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꾹 참았다. 사영 또한 저렇게 되묻기는 했어도 답답하다는 기색은 아니었기에 골똘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시스템의 선택에 불만이 있다고 했지.”
만약 자신의 추측대로 인간이 스스로 능력을 일깨우고자 하는 미지의 인물들이 마약을 파는 것이 맞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미끼로 삼아, 실험체로 사용할 각성자를 모으는 중이라면….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들기 위해서 이 짓을 벌인단 소리야?”
“정답.”
사영은 이번엔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시원스레 답했다. 의재는 손끝부터 서서히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스템의 선택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오직 인간의 힘으로 각성자를 만든다. 겉보기엔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그 이면에는 분명히 다른 목적이 더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약이다. 중독되면 공격성이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이지를 잃는 데다 마지막에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더럽혀진 채 죽는다. 그딴 약을 실험이랍시고 각성자들에게 먹이는 놈들의 목적이 정상적일 리 없었다.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들었다 쳐. 그다음엔?”
그들은 각성자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셈일까. 의재가 팔짱을 끼며 넌지시 묻자 사영은 괴고 있던 손을 빼내곤 어깨를 으쓱였다.
“기억은 잘 안 나요. 종말을 막는다느니 그랬던 것 같은데.”
“종말?”
“글쎄요, 개소리를 자세히 듣진 않아서.”
종말. 균열의 날 직후에는 종말이 찾아왔다며 부르짖는 인간들이 꽤 많긴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덧 11년 전 이야기다. 게이트가 언제 어디서 열릴지도 미리 알 수 있는 이런 시대에 아직까지도 그런 인간들이 남아 있는 걸까?
자세히 듣지 않았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사영은 시큰둥한 태도였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형한테 부탁할 일이 있진 않아요.”
사영은 처량하게 굴러다니고 있던 단검과 빈 감로수 병을 인벤토리에 쑤셔 넣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지작대며 이만 가보겠다는 뉘앙스로 덧붙였다.
“우선 헌터 등록부터 처리하는 걸로 하죠. 내일 중으로 이쪽에 사람 하나 보낼게요.”
“그래. 아, 그리고 하나 더.”
용건이 더 남았냐는 듯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의재가 시커멓게 녹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은 처리하고 가라.”
“…….”
독 때문에 시커멓게 녹은 테이블에 손님을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영의 보라색 눈이 ‘진심이냐?’ 하는 의미를 담아 이쪽을 바라보았으나 의재는 뭘 꾸물대냐는 표정으로 꿋꿋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다운 법이라는데, 네놈 성질머리는 아름답긴 글렀으니 그 반반한 얼굴값이라도 제대로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결국 사영은 망가진 테이블도 인벤토리에 쑤셔 넣은 뒤에야 돌아갈 수 있었다.
이사영이 왔다 간 뒤에도 이른 아침의 해장국집은 평소처럼 출근 전 아침 식사를 하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물론 그 무리에는 배원우도 끼어 있었다.
하품을 쩍 하며 제2의 직장인 해장국집에 출근한 배원우는 잠시 문가에 가만히 선 채로 눈을 껌뻑였다. 왠지 가게가 평소보다 휑해 보였다.
“어? 테이블이 줄지 않았나?”
“어라? 그러게요.”
그의 곁을 지나처 들어오던 다른 헌터가 힐끔 안을 살피더니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원우의 눈썰미에 따봉을 날려주며 감탄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쩐지 좀 비어 보이더라. 알바님, 여기 있던 테이블 하나 어디 갔어요?”
“…….”
‘꼭 이럴 때만 눈치가 개빠르지. 평소에 좀 이래 보든가.’
헌터라는 놈들은 꼭 필요할 땐 둔탱이 같다가 쓸데없이 사소한 것에만 눈치가 빨랐다. 잠시 아련하게 텅 빈 가게 중앙을 바라보던 의재가 대답했다.
“테이블 다리가 부러질 것 같길래… 일단 치워놨습니다.”
해장국집에서 일하며 느는 건 거짓말뿐이었다. 그러나 헌터들은 의재의 아련한 얼굴을 보고 그 안에 다른 속사정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고 있을 때, 한 헌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어떤 씨발라먹을 헌터 놈이 테이블을 부숴버린 겁니까?”
예, 전 랭킹 1위가요. 의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우수에 찬 그의 얼굴은 긍정의 의미나 다름없었다. 분기탱천한 헌터가 테이블을 쾅 내려치려다 민첩하게 각도를 틀어 제 허벅지를 내려쳤다. 테이블을 부순 것으로 추정되는 씨발라먹을 놈이랑 동급이 될 순 없었다.
“젠장, 이래서 헌터 갑질이 사회적 문제라는 거야.”
“어떤 새끼야? 우리 해장국집 테이블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아?”
“안 그래도 자리 부족해 죽겠는데!”
“누군지 초성만 알려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족치겠습니다.”
헌터들의 쉼터이자 작고 소중한 해장국집을 건든 누군가를 향해 쉴 틈 없는 비난이 쏟아졌다. 마지막 말의 주인공은 배원우였다.
‘님이 이사영을 어떻게 족쳐요.’
족치기는커녕 이사영에게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릴 그의 미래가 보여 의재의 얼굴이 더욱 아련해졌다. 가이 중의 가이, 의리남 배원우는 든든해하라고 저런 말을 했겠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하필 새벽에 한바탕 피를 뱉어 오늘따라 안색도 파리했기에 그의 얼굴에 깃든 슬픔은 배가 되었다.
웅성대던 헌터들이 애써 의재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알바님, 슬퍼하지 마세요.”
“저희 길드 제작자에게 의뢰 맡겨서 존나 튼튼한 테이블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이참에 테이블하고 의자 싹 바꾸시죠. 저희가 돈 모아 올게요.”
해장국집을 걱정하는 마음이 참으로 갸륵했다. 혹은 식사 시간의 자리 싸움이 더 치열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일지도. 의재는 진심을 담은 걱정과 자리가 부족해졌다는 사적인 분노가 반씩 섞인 헌터들의 제안을 웃으며 거절했다.
“하하…. 필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