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왜?
의재는 남의 가게에 무단 침입한 시커먼 인영을 보고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대체 저 새끼는 어떻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왔으며, 들어오고 나서는 왜 홀 정중앙에 시위하듯 앉아 있단 말인가?
랭킹 1위, 아니, 전 1위 헌터님께선 영업 방해에 건조물 침입까지 온갖 범법이란 범법은 골고루 저지르는 중이셨다. 다리를 꼬고 앉은 방독면의 고개가 느릿하게 의재를 향했다. 음산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잘 잤어요?”
퍽 다정한 물음과 달리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듯한 목소리였다. 잘 자던 사람 깨워놓고 잘 잤냐고 묻는 꼬락서니가 역시 양심은 개나 준 게 분명했다. 의재는 대답하는 것 대신 질문으로 받아쳤다.
“여기서 뭐 하냐?”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음에도 방독면의 기세가 한층 흉흉해졌다. 잠시 심호흡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나 싶었으나 렌즈 안쪽의 보라색 눈이 순식간에 번뜩대며 의재를 쏘아보았다.
“뭐 하냐고?”
“…….”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설마… 나에 대해 뭔가를 알아냈나? 여태까지 그가 보여준 행보나 정보력을 보면 아주 무리인 추측도 아니었다. 의재는 천천히 주먹을 쥔 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먼저 연락 안 해요?”
“…….”
“씨X, 2주나 기다렸잖아.”
맥이 탁 풀렸다. 미친놈, 그것 때문이었냐?
옆에서 일렁이는 무시무시한 기운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이사영은 숨을 씨근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혼자 놔두고 재밌는 데 놀러 갔다고 삐친 애 같기도 하고….
연락 기다렸다는 사람 앞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연락을 안 한 게 아니라―
‘까먹었다….’
의재는 사영의 거래 제안에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물론 의재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유라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솔직하게 까먹었다고 말했다간 거래고 나발이고 전부 백지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의재는 가장 좋은 핑계를 댔다.
“일단, 일이 바빴어.”
“하.”
사영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의재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여러모로 고민하기도 했고.”
“아아, 고민을 하긴 했나 봐요.”
이사영은 대놓고 빈정거리더니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 턱을 괴었다. 의재는 순간 그의 정수리에다가 꿀밤을 확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 녀석의 심성이라는 것은 대체 왜 꽈배기처럼 생겨먹은 거지?
그 순간 의재의 뇌리를 불현듯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아, 설마….
‘J한테 1위를 뺏겨서?’
하긴, 저 방독면 자식이 뺀질뺀질하게 보이긴 해도 6년 연속 1위였다고 했던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은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자리를 뺏겼으니 충격을 꽤나 받긴 했을 테지.
의재의 시선에 어느새 측은함이 깃들었다. 사영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눈빛이 왜 그따위지?”
“아니, 뭐…. 힘내라고.”
“지금 사람 놀려요?”
“놀리다니.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인데.”
“아, 됐어. 나는 누구 때문에 광고도 찍었는데 2주 동안 방치나 하고. 형 진짜 쓰레기인 거 알죠.”
사영이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그의 공익 광고에 대해서는 의재도 억울한 면이 있었다.
차의재 때문에 찍었다던 이사영의 공익 광고 같지 않은 공익 광고는, 인기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튀어나와 TV를 보는 헌터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의재가 팔짱을 꼈다.
“그 광고 대체 뭐야? 갑자기 그런 건 왜 찍었어?”
“형이 광고 찍는 사람만 좋아하는데, 어쩌겠어요.”
“이게 진짜 무슨 개소리지?”
“정빈에, 허니비에.”
의재는 탱탱볼처럼 튀는 이사영의 의식의 흐름을 감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정빈과 허니비의 공통점이라곤 둘 다 이 가게 접근 금지령을 내리고 싶다 정도인데. 이사영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해괴망측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사영이 허니비의 자필 사인 포스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런 취향?”
“허니비가 그냥 주고 간 거야.”
“정빈 사인은.”
“본인이 등기로 보냈던데.”
“씨X, 저런 거나 토마토 마켓에 팔지.”
의재는 입을 꾹 다물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로 향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시선이 달라붙었다. 무시하기에는 집요하고 끈질겼다.
물을 따르는 그 순간까지 빤히 쳐다보는 모양새에 참다못한 의재가 뒤를 돌아 뭐냐며 쳐다보자, 사영이 기다렸다는 듯 의재의 발을 턱으로 가리켰다.
“발.”
“응?”
“원래 맨발로 다녀요?”
아, 맞다. 그제야 의재는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기습하기 위해 나왔다가, 제집 안방처럼 홀에 들어앉은 이사영을 보고 기습 의지를 잃은 탓에 자신은 맨발인 상태 그대로 가게 안을 걸어 다니게 되었다.
의재는 발가락을 꼼지락대다 뻔뻔하게 대꾸했다.
“잠 깨려고 일부러 양말 안 신은 거야.”
“슬리퍼라도 신지 그래요.”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이 야밤에 내가 맨발로 뛰쳐나온 게 누구 때문인데.
“2주 동안 고민했으면 답은 나왔겠죠.”
“그래.”
“…….”
“거래하자. 대신, 조건이 몇 개 있어.”
“잠깐.”
사영이 인벤토리에서 손가락 길이의 길쭉한 물건을 꺼냈다. 액정과 버튼, 끄트머리에 박힌 푸른색 마석. 의재가 저거 하나 구해보겠다고 용을 쓰다가 토마토 마켓과 이 해장국집으로 온갖 S급을 끌어들이고 말았던 마석 녹음기였다.
“형이나 나나, 확실한 증거가 있는 편이 좋겠죠.”
“녹음을 하겠다고. 만약 녹음본이 유출되면?”
“계약서 쓸 때만 참고하고 바로 처리할 거예요.”
“…….”
사영은 보란 듯이 장갑을 낀 손을 쫙 펼쳐 의재의 눈앞에 잔망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녹음기는 걱정할 것 없이 국자 녹이듯 녹이겠다는 뜻이었다. 저 비싼 게 너한테는 일회용 녹음기라 이거냐.
버튼을 누른 녹음기가 테이블 중앙에 올려졌다. 마석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합시다.”
이런 절차야 익숙하다는 듯 능숙한 말투였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의재는 검지를 세웠다.
“첫 번째, 해장국집 운영 시간에는 일 안 해. 네가 뭘 부탁하고 요구하든, 해장국집이 문을 닫은 저녁 11시부터 오전 5시 사이에만 할 거야.”
“아하.”
잠시 고민하던 사영이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두 번째는?”
“나 헌터 등록 하는 거 도와줘.”
“응? 저번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제 팔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기던 사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필요한 거라고.”
“알아. 더 들어봐.”
의재는 다시 헌터로 활동할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었지만, J의 생존이 밝혀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앞으로를 위해서, J와는 상관없는 아예 새로운 신분을 하나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거란 결론이었다.
사람들은 J를 찾는다. 각성자 관리국에서도 수색팀을 꾸려 대대적으로 J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J가 S급임을 생각했을 때, 힘숨헌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미등록자 신분인 것보다는 얼마 전 각성한 헌터로 위장하는 편이 몇 배는 안전할 것이었다. 아마 그쪽은 수색망에 들어가지조차 않을 것이다.
의재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헌터 등록 여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다른 건 너도 인정할 텐데.”
“…….”
“내 요구 사항은 내가 최대한 낮은 등급을 받게 해달라는 거야.”
“…….”
“E급이나 D급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리도 없겠지. 흔하니까.”
각성자의 등급은 S급부터 A, B, C, D, E, F등급으로 나뉜다. F등급에 가까울수록 각성 능력 및 신체 능력이 낮고, F등급은 일반인보다 조금 힘이 센 정도에 그치는 정도였다. 사영이 방독면의 뺨 부분을 느리게 문질렀다.
“그러니까… 등록할 때 본인 힘을 숨기는 걸 도와달라는 거죠.”
“응.”
“다른 건?”
“할머니 치료.”
“그건 저번에 얘기했고. 다른 건 더 없어요?”
“응.”
“좋아요.”
사영이 낮게 웃으며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마석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고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내 차례.”
그는 인벤토리에서 손바닥 크기의 단검을 꺼내 의재에게 건넸다. 단검의 날에는 금빛 월계수 잎이 새겨져 있었다.
[계약의 월계수 가지 (S)
이 단검으로 피를 내어 섞으면 절대로 깰 수 없는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계약을 깨는 자에게 저주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