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콘셉트 헌터 시대의 선두 주자. 던전 부산물로 만든 헌터 전용 염색제 CyC의 광고 모델, 대한민국 5위 헌터 허니비. 그녀는 노포 해장국집에서 윤기 흐르는 금발 탈색모를 휘날리며 팬서비스에 여념이 없었다.
스타 헌터를 만난 일반인에 빙의한 의재가 정성껏 호응해주자, 그 모습을 구경하던 다른 헌터들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 박수를 쳤다.
허니비는 흉흉한 기세를 거두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제 팬이셨구나. 너무 죄송해요. 갑자기 쳐들어와서 많이 놀라셨죠?”
“아뇨,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잠깐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의재와 마주 보고서 하하 호호 웃는 그녀의 얼굴에는 분명 우아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헌터들의 숟가락질은 서서히 빨라지고 있었다. 달그락대는 소음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어떤 놈이 오토바이를 이렇게 주차해놨어. 읏차.”
모두의 시선이 새로 등장한 인물에게 쏠렸다. 배원우가 허니비의 오토바이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채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허니비가 경악했다.
“미친, 너 그거 빨리 내려놔!”
“허니비? 네가 여긴 웬일이야?”
“일단 우리 애 내려놓고 말해.”
“네 애마야? 주차할 거면 잘해놔야지. 문을 막으면 어떡하냐.”
배원우가 투덜대며 오토바이를 슬쩍 옆으로 내려놓았다. 미간을 짚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허니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야, 방패가이. 혼자 왔어? 이사영은.”
헌터 네임 한번 잘못 지었다가 남자 중의 남자, 가이 중의 가이가 되어버린 방패가이 배원우가 몸서리를 쳤다.
“아, 헌터 네임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제발 이름으로 불러주라.”
“이사영 어딨어? 같이 안 왔어?”
“엉? 사영이? 모르겠는데. 걘 왜 찾아?”
배원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허니비는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홱 살폈다. 10위권 헌터들의 대화를 직관할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다른 헌터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주워듣고 있었다. 하지만 허니비가 매서운 눈빛을 흩뿌리자 슬그머니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천둥 같은 꼬르륵 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배원우가 배를 문지르며 불쌍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네 사연이 궁금하긴 한데, 일단 주문하고 얘기하면 안 될까?”
“…하, 그래. 나도 우선은 열 좀 식혀야겠네.”
허니비가 손부채질을 했다. 때마침 해장국을 흡입한 헌터 둘이 삼만 원을 카운터에 던져놓고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배원우가 능숙하게 카운터에 놓인 행주를 챙겨 의재에게 흔들어 보였다.
“제가 치우고 앉겠습니다. 청양고추 많이 해서 해장국 하나요. 허니비 넌 뭐 먹을래?”
“여기 뭐 있는데?”
“해장국.”
“…해장국밖에 없어?”
“응. 근데 맛있어.”
배원우가 건치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들었다. 미간을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허니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나도 해장국으로.”
“좋아.”
배원우는 의재를 향해 브이를 그려보았다. 의재도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한 후 빈 그릇에 김치와 깍두기를 담았다. 부지런히 수저를 놓고, 알아서 물까지 떠 온 배원우가 손뼉을 짝 쳤다.
“이제 얘기 좀 해봐라. 사영이는 왜 찾냐? 걔가 또 뭔 짓 했길래?”
허니비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후 배원우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가 푹 고개를 숙이고 귀를 들이댔다. 허니비가 손을 모아 속삭였다.
“토마토 마켓에 올라온 마석 너도 알지?”
물론 의재에게는 다 들렸다. 또 마석이냐. 오는 놈마다 마석 이야기를 해대니 슬슬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의재는 뚝배기에 불을 붙였다. 배원우도 덩달아 작게 속삭였다.
“응. 알지.”
“내가 그 마석이 진짜, 진짜 엄청 필요하거든?”
“응? 그 정도로?”
“그거 가져가면 홍예성이 무기 만들어준다잖아. 나 S급 무기 너무 필요해.”
“아… 맞다. 너 원래 쓰던 무기 부러졌지?”
“응. 게다가 곧 시스템 랭킹 갱신되잖아. 홍예성한테 마석 찾아준 담에, 내 전용 S급 무기 제작 맡기고, 랭킹 갱신때 규규 이기기. 딱 완벽한 계획을 세웠단 말씀.”
규규는 그녀 바로 위의 랭커였다. 그녀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이 해장국집에 방문한 것이다. 의재는 언젠가 홍예성을 직접 만나는 날 반드시 한 대 때리리라 결심했다. 참고로 홍예성은 요즘도 인하트에 마석을 그리워하는 글을 1일 1회 업로드하고 있었다.
배원우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거기까진 그렇다 쳐. 근데 왜 이사영을 찾아?”
“그 미친놈이 정보가 나올 만한 구석을 다 틀어막았으니까 그렇지!”
쾅! 허니비가 주먹을 내려쳤다. 다행히 그녀의 손이 테이블을 내려치기 직전, 배원우가 민첩하게 손바닥을 뻗어 주먹을 대신 받아냈다. 쾅 소리에 흠칫해 밖을 내다본 의재는 배원우가 테이블을 살려냈음을 확인했다. 배원우는 의재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
‘미친, 요즘 탱커는 재산도 보호해주네.’
의재는 배원우의 뚝배기에 살코기가 듬뿍 붙은 뼈를 한 개 더 얹었다.
허니비가 씩씩대며 분을 삭이다 물었다.
“테이블 부서졌어?”
“아니, 내가 잘 막았어.”
“고마워. 아무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보가 알음알음 돌았거든?”
이후로 지리멸렬하게 이어진 허니비의 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토마토 마켓에 홀연히 마석을 올리고 삭제한 후 튀어버린 EZ. 거기까지였다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겠지만, 최고의 장인 홍예성이 장비 제작 의뢰권을 현상금으로 걸면서 일이 산처럼 커지고 말았다.
홍예성의 장비 제작 의뢰권이라니! 몇백억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비매품이 아닌가.
일확천금을 노리는 헌터들은 개미 떼처럼 모여 EZ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얼마 전 소중한 무기를 잃은 허니비도 의뢰권을 노리고 익명으로 추적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게 그들은 추적 팀을 이뤄 정보를 공유하며 으쌰으쌰 힘을 모았더랬다.
허니비가 금빛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마석 확대해서 보정한 다음 뭐 비친 게 있나 확인해보고, 사진 분석 맡겨서 핸드폰 기종도 알아보고, 마석 배경으로 나온 신문 내용 대조해서 어떤 신문인지도 찾아보고, 정말 그 사진 한 장을 나노 단위로 뜯어가며 온갖 루트로 추적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렇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의재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기술의 눈부실 발전이 이렇게나 무섭기란 또 처음이었다. 그리고 헌터 놈들의 집착도 무서웠다. 배원우도 좀 질린 얼굴이었다.
“…그렇게까지?”
그는 의재가 할 말을 대신 해주었다. 허니비가 으앙,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퍽 엎어졌다. 이번에도 그녀의 머리가 테이블을 내려찍기 전에 배원우가 냉큼 손을 뻗어 머리를 받쳐주었다. 그녀의 머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테이블을 지키기 위해서.
의재는 배원우에게 공깃밥 하나를 서비스로 주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런 얘기가 싹 끊긴 거야. 단체로 던전 들어간 것도 아니고! 추적팀도 하나둘 조용해지고. 그래서 물어봤지. 혹시 요즘 무슨 일 터졌냐고.”
“응.”
“뭐라는 줄 알아? 자기들은 이번 일에서 손을 떼겠대. 그렇게 열정적이던 애들이!”
“저런.”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지. 그랬더니 겨우 하는 얘기가, 파도 길드 법무팀에서 연락이 왔대. EZ 추적에서 손 떼라고.”
“뭐? 우리 길드가?”
배원우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허니비가 머리를 헤집으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계속 찔러봤는데 딱 거기까지만 얘기하더라. 입막음한 건지 뭔지…. 근데 네가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거 아냐. 그럼 남는 건 이사영밖에 없지.”
“그…건 맞는데.”
“이사영은 웬만해선 사람 안 만나잖아…. 그래서 물어볼 수가 없단 말이야.”
둘의 이야기에서 좀 더 정보를 캐내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기다렸다간 해장국 국물이 다 졸아들게 생겼다. 의재는 뜨거운 뚝배기 두 개와 공깃밥 두 개, 김치와 깍두기, 청양고추 다진 것을 쟁반에 담아 나갔다.
때마침 허니비는 머리를 박고 있었고, 배원우는 얼빠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니, EZ랑 우리 길드랑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데?”
넋이 나간 배원우의 중얼거림에 의재가 속으로 대답했다. 길드하고 관계가 있는 건 아니고, 이사영하고 관계가 좀 있다…. 의재는 배원우의 생각이 더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냉큼 해장국을 내려놓았다.
“해장국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어? 저희 공깃밥 안 시켰는데요.”
배원우가 얼빠진 얼굴 그대로 의재를 보았다. 의재는 쟁반을 옆구리에 끼며 무심히 대꾸했다.
“서비스입니다.”
얼빠진 얼굴에 감격, 감동, 뭐 그런 것들이 차올랐다. 머리를 박고 앓던 허니비도 냉큼 고개를 들었다. 의재는 쿨하게 몸을 돌려 주방으로 복귀했다.
해장국을 주고 나니 이제 두런두런 작은 말소리만 들렸다. 작은 서비스 하나로 정보도 얻고 평화도 되찾기. 참 쉽다. 의재는 밀린 설거지를 해치우고 배원우와 허니비의 추가 주문도 능숙하게 해치웠다.
잠시 후, 배원우가 카운터에서 손을 흔들었다.
“알바님! 계산이요!”
“네. 구만 원이요.”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돌려주자, 허니비가 돌돌 말린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죠?”
“펼쳐봐요.”
의재는 건네받은 종이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히 펼쳤다. 허니비의 포스터였다. 한쪽 귀퉁이에 커다란 사인이 있는 자필 사인 포스터. 그녀의 팬들에겐 최고의 굿즈이리라. 그러나 의재의 표정은 일순 묘하게 변했다.
‘이걸 왜 주는데?’
그리고 이 포스터는 대체 어디에서 갑자기 구해왔단 말인가? 분명 세상 요란하고 휘황찬란하게 등장할 땐 없었는데. 그녀가 어쩐지 흐뭇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아까 보니까 뭐, 다들 벽에 사인을 붙여놨더라고요?”
“아, 네.”
“선물이에요. 제 것도 붙여두세요.”
의재는 떨떠름한 얼굴 그대로 허니비를 쳐다볼 뻔했으나, 지금은 포커페이스를 쓰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