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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22)화 (22/67)
  • 22화.

    다 들었죠?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모른 척하고 그냥 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사영과 눈이 제대로 마주쳐버렸다. 이사영은 이제 턱까지 괴고서 대놓고 의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 앞에 멀쩡히 앉은 정빈은 신경도 안 쓰는 뻔뻔한 태도에 마음 같아선 방독면을 거꾸로 씌워놓고 싶었다. 아무것도 못 보게.

    아이템까지 써서 분리한 공간에 침입한 건 자신이니 이번엔 이쪽이 불청객이었다. 섣불리 크게 행동했다간 오히려 정빈의 시선을 끌 수 있다.

    다행히 그에게는 훌륭한 핑곗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해장국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주워듣느라 잠시 잊어버렸지만, 의재는 해장국집의 아르바이트생이기에 원수 같은 두 손님에게 해장국을 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의재는 슬쩍 정빈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영을 향해 양손 중지를 척 든 후, 소리 없이 입만 달싹였다.

    ‘엿 먹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킥,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듯한 정빈의 목소리도 함께.

    “이사영 님?”

    “아냐, 아무것도. 다른 미등록자일 가능성은?”

    “곧 홍예성 님 장비 경매도 있으니까 몇 명 입국하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실력자가 이런 파장을 일으킬 리는 없어요. 조용히 왔다 가겠죠.”

    정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번 사태의 범인을 얼마 전에 각성한 아마추어, 초짜, 뭣 모르는 이상한 놈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졸지에 ‘아마추어, 초짜, 뭣 모르는 이상한 놈’이 된 의재는 억울했다. 그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는 정보가 이렇게까지 빨리 돌지 않았단 말이다. 나른한 목소리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몇 달 전에 각성한 S급 있잖아. 그쪽은.”

    지금 이 자리에만 S급이 셋인데 또 각성을 했어? 대한민국 조그만 땅덩이에 S급이 왜 이렇게 많아? 역시 조국의 안전은 자신이 없어도 잘만 유지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정빈이 침울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분은… 아시다시피 아직 미성년자고, 중요한 시기라 이럴 여유도 없을 겁니다. 전투계 헌터도 아니시고요.”

    “아, 고등학교 3학년이랬나.”

    “예. 곧 수능 보십니다. 균열 들어갈 시간에 수능특강 지문 하나를 더 보시겠죠.”

    “뭐…. 그렇다 치자.”

    자세를 고쳐 앉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재는 어느새 다 끓은 해장국 뚝배기를 쟁반에 담으며 귀를 기울였다. 이사영이 모든 걸 밝힐까?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마석의 주인이 그가 만난 미등록자와 동일인임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 미등록자가 차의재임을 밝힌다면.

    겨우 얻은 이 평온한 일상을 빼앗긴다면.

    쟁반을 쥔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때 사영이 느릿하게 말했다.

    “나도 아직 못 찾았어.”

    날을 세운 게 무색하도록 가벼운 한마디였다. 의재는 눈을 크게 뜨고 홀을 바라보았다. 실망한 기색이 어린 정빈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사영 님도 지금까지 못 찾으셨다면….”

    “글쎄…. 어디 뒤 구린 놈들이 쳐놓은 미끼일 수도 있겠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군요.”

    정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사영이 턱짓으로 허공을 한 번 가리켰다.

    “이야기 끝났으면 이것부터 좀 푸는 게 어때?”

    “그러죠. 이 이상 얘기하더라도… 해장국집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요.”

    딱, 손가락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에 맞춰 의재도 쟁반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주변 헌터들이 숙덕대며 둘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걸 보니 아이템을 해제한 모양이었다. 의재는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가 테이블 위에 뚝배기를 놓았다.

    “해장국 두 개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정빈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의재는 힐끔 사영을 보았다. 이사영은 언제 말을 걸었냐는 듯 차의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 * *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다 먹었으면 빨리 가라. 우르르 몰려왔다 우르르 나가는 헌터들을 보며 뒷말을 삼킨 의재가 받은 지폐를 다시 세는 동안, 벽에 붙은 사인지를 구경하던 정빈이 물었다.

    “저건 단골손님들의 사인인가요?”

    “네? 아, 네.”

    “흐음….”

    대부분 매일같이 출석 도장을 찍는 사람들이니 단골이라고 칠 만했다. 의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빈이 방긋 웃었다.

    “하하, 몇 번이나 와야 사인을 걸 수 있으려나요. 자주 와야겠네요.”

    아니, 오지 마. 다신 오지 마.

    예의 차린 빈말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냥 안 왔으면 좋겠다. 의재는 간곡히 기도하며 정빈을 배웅했다. 소리 없이 찾아온 이사영도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두 S급이 떠난 후에야 가게에도, 의재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장사를 마치고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채 설거지통에 물을 가득 받을 때였다. 노곤한 몸은 싱크대에 기댄 채 물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톡, 소리가 들렸다. 의재의 청각으로도 간신히 들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이윽고 톡, 톡, 톡, 하는 소리는 규칙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슬쩍 목만 빼 소리의 근원을 살폈다.

    방독면이 미닫이문 유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어디 B급 재난 영화나 호러 영화에서 나왔다면 주인공이 비명을 지를 장면이었지만, 의재의 눈에는 마감을 방해하는 악마 들린 진상 방문객으로 보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문밖에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대꾸했다.

    “장사 끝났어요―”

    방독면도 유리문에 이마를 대고서 짧게 대꾸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장사 끝났다니까요.”

    “들어두는 게 좋을 텐데…. 내일도 정빈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반쯤 협박 섞인 말에 문 앞으로 날 듯이 뛰어온 의재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어차피 지금은 둘뿐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방독면을 향한 눈이 형형히 불탔다.

    “너냐?”

    정빈을 부른 게 너냐는 의미였다. 시큰둥한 음성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나겠어요?”

    “…….”

    “따지자면 여기다 그놈 부른 건 형이고.”

    “너 찾으러 왔다고 말한 걸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뭔 소리야.”

    의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따지려 들자 사영이 지금 몰라서 묻냐는 듯 받아쳤다.

    “형이 토마토 마켓에 핵폭탄을 던지지만 않았어도 그 녀석이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죠.”

    “뭐라는 거야, 토마토 마켓이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유리 너머 방독면이 의재를 빤히 응시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겠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차의재는 계속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유리를 톡톡 두들기던 검은 장갑이 동작을 멈췄다.

    “그래요. 누가 오든 계속 그렇게 모른 척해요. 그래야 할 거고.”

    “…….”

    “문 안 열어줄 거면 이거 그냥 녹여도 돼요?”

    “해봐. 바로 각관국에 신고할 줄 알아.”

    “서운하게 계속 정빈만 찾네…. 형 앞에 있는 건 난데.”

    그렇게 정빈이 보고 싶으면 당장 불러주겠다는 고상한 협박이었다. 의재는 결국 문을 열었다. 겨우 밥 먹여 보낸 정빈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일 순 없었으니까. 사영은 들어오자마자 방독면을 벗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거예요. 저런 놈들.”

    대한민국 랭킹 4위, S급 공무원 헌터 정빈을 ‘저런 놈들’로 퉁 친 사영이 카운터에 놓인 박하사탕을 입에 던져 넣었다. 창백한 뺨이 사탕 모양을 따라 볼록 부풀었다. 사영은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유독 뛰어났다. 의재는 몸서리를 쳤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그러게, 올릴 거면 중고 월드나 천둥 장터 같은 데에다 올리지 그랬어요.”

    사영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조언을 빙자한 잔소리를 이어갔다.

    “하필이면 지역 특정되는 토마토 마켓에 올려서 이 사단을 만드는 것도 재주지.”

    “나 아니라니까.”

    “그래요, 그럼. 형 말고 토마토 마켓에 마석 올린 미친놈.”

    “말 곱게 해. 그 사람도 뭘 몰라서 그랬겠지.”

    “내가 아는 헌터들 다 토마토 마켓 깔았어요. 마석 주인 추적하려는 놈들도 많고.”

    “…….”

    “거저 주는 거나 다름없는 가격에, 대놓고 지역 인증 달려 있는 토마토 마켓에 글 올리고. 아주 나 여기 있다고 광고를 하고 싶었나 봐.”

    “…그 사람도 후회하고 있을 거야.”

    “그런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데.”

    사영은 단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왜인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명백한 의재의 실책이었으므로 사탕을 먹느라 볼록해진 사영의 얼굴에 대고 닥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직전까지 불청객을 쫓아내기 위한 방도를 수없이 생각하던 의재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당장 차의재가 힘을 숨긴 걸 아는 존재는 이사영뿐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 상황에서 의재의 조용한 삶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사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왕 글러 먹은 거, 랭킹 1위의 정보력을 이용하면 어떨까? 어쨌든 이놈은 현직 헌터 아닌가.

    의재는 두 손을 깍지 껴잡고 전에 없이 공손하게 사영을 불렀다.

    “이사영 씨.”

    “웬일로 존칭을 다 하세요, 형. 저보다 밥을 오천 그릇은 더 드신 분이.”

    뒤끝 한번 더럽게 길었다. 의재는 바로 존댓말을 갖다 버리기로 했다.

    “닥쳐. 아무튼, 상담할 게 있어.”

    “흠….”

    “내 주변에 좀 큰 실수를 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사영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과연 진짜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들어주는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재는 가장 중요한 몇 마디를 덧붙였다.

    “본인은 그게 큰 실수인 줄 몰랐고.”

    “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도 몰랐대.”

    “저런.”

    사영이 전혀 안타깝지 않다는 투로 공감해주었다.

    “그런데 형, 형한테 친구가 있었나?”

    “있어, 네가 뭘 알아.”

    의재가 허공에 주먹을 흔들어 보이자, 사영이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곤 두 손을 모아 입가를 가리듯 턱을 괸 뒤 눈을 접어 웃었다. 화려한 얼굴에 흥미로운 장난감을 보는 듯한 장난기가 가득 묻어 나왔다.

    마치 뻔한 거짓말이지만 속아주겠다는 제스처처럼도 보였다. 의재는 기대에 부응하듯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실수가 큰가 봐. 주변에 온갖 날파리들이 막 꼬이고 있대.”

    “으응, 안됐네.”

    “그런데 그 친구는 자기가 한 실수를 최대한 조용히 수습하고 싶어 하거든. 아무도 모르게.”

    “왜요?”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 어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의재가 답했다.

    “조용히 살고 싶어서.”

    “아하….”

    “…….”

    “조용히 살고 싶어서, 라.”

    짧은 침묵이 흐르고, 사탕을 까드득 깨문 사영이 낮게 웃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사영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졌다. 긴 그림자가 의재를 덮칠 것처럼 기울었다. 주문을 외우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거래하죠, 우리.”

    “…….”

    “형이 벌여둔 실수, 말끔하게 수습해줄게요.”

    어느새 주어는 다시 친구가 아닌 차의재로 돌아와 있었지만, 의재는 더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공짜는 아닐 테고.”

    “그럼요. 거래니까.”

    “뭘 원해?”

    역전되어버린 눈높이에서, 의재는 사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 미친놈의 머릿속에서 어떤 조건이 나올지 알 길이 없었다. 일을 도와달라고 하려나, 던전 공략을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고, 혹은 길드에 들어와달라는 부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섬세하게 세공된 듯한 얼굴은 그 오차 없음만큼이나 끔찍한 거래 조건을 제시할 것 같았다. 최악을 상정하자면 누구 하나를 죽여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그런 요구 사항을 말한다면 거절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나 사영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그는 검지 하나를 세우며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

    “…….”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는 사람.”

    이사영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형을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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