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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15)화 (15/67)

15화.

살다 보면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뜬 순간부터 유난히 기분이 찝찝한 날이 있다. 의재에게는 오늘이 딱 그랬다.

누구라도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자다 말고 ‘이렇게 개운하면 안 되는데…’ 하며 번쩍 눈을 뜨는 순간 들리는 참새 소리와 포근한 햇살을 맞이하는 날 말이다.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고, 부랴부랴 준비해봤지만 지각 위기에 처해 있는 와중에, 하필 새 신발을 사놓고 끈을 묶어두지 않아 울면서 현관문 앞에서 신발 끈을 꿰는 그런 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날.

차의재는 이런 불길한 예감을 참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인공지능 비서를 호출했다.

“넥스비, 오늘의 운세 검색해줘.”

―오늘의 운세를 검색합니다.

그의 인공지능 비서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차의재의 오늘의 운세를 읊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다칠 수 있는 일진이니 최대한 모든 일에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무엇이든 대충 넘기지 말고 신중하게 확인, 또 확인해야 합니다.

“이게 오늘의 운세야, 살인 경고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싶었던 의재의 마음과는 달리 넥스비는 계속해서 찝찝한 운세를 전했다.

―오늘 하루는 조심조심 조용하게 지내는 게 좋겠습니다. 오후에는 달가운 만남이 있을 수 있으니 잠시 외출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길게 말했지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오늘 네 운세 쓰레기’라는 소리였다.

S급의 예리한 직감과 운세가 딱 들어맞는 날은 대부분 그대로 굴러가곤 했다. 오늘 일진이 좀 사납겠군. 조심해야겠어…. 의재는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하며 다짐했다.

하지만 차의재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운명은 아무리 조심하고 대비해도 결국 찾아오고야 만다는 점이었다.

바로 오늘, 이 가게에 재앙처럼 들이닥친 이사영처럼 말이다!

* * *

“안녕하세요, 형.”

낮게 울리는 여유로운 목소리가 익숙했다. 짧게 들었던 음성임에도 인상 깊었기 때문일까. 그와의 첫 만남이 워낙 강렬했었기 때문일까.

의재는 뚝배기를 든 채로 굳어버렸다. 제 귀를 믿고 싶지 않았지만, S급의 청각이 사람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눈에 보이는 광경도 머릿속에 떠오른 그놈과 인상착의가 완벽히 일치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위에 있는 방독면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삐딱하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이 보낸 편지 잘 받았어요.”

“…….”

“응…. 오늘은 다른 앞치마 입었네.”

“…….”

“잘 어울린다.”

방독면 렌즈 너머로 마주친 눈은 꼭 장난감을 앞에 둔 고양이처럼 신이 나 있었다.

사영의 등장으로 충격을 받은 건 비단 의재뿐만이 아니었다. 방독면을 쓴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가게 전체에 느려지는 저주라도 걸린 듯 모든 사람의 고개가 천천히 가게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누군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자기주장 세기로 유명한 헌터들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한마음 한뜻이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윽고 누군가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씨X….”

‘갑자기 왜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하신 분이?’

‘쟤가 밖에서 밥 먹는 사람이었음? 외식 절대 안 하잖아? 애초에 사람 많은 곳에 안 나타나는 놈 아님?’

‘그래, 저 새끼도 가끔 외식을 한다고 쳐, 근데 왜 하필 여기냐고!’

‘인생이 좀 무료하신가? 왜 굳이 이런 허름한 가게에 온 거임? 다른 비싸고 좋은 가게 많은데?’

헌터들의 따갑고 뜨거운 눈초리의 온도를 전자 온도계로 측정할 수 있다면 100도는 거뜬히 넘었을 테다. 허공에 물이 담긴 냄비를 올리면 펄펄 끓다 못해 냄비까지 녹였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누구보다도 경악했지만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는 차의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특성 포커페이스(B)가 활성화됩니다.]

다행히 그에게는 표정 관리를 도와주는 특성이 존재했다. 오늘만큼 이 사실에 감사한 날이 없었다. 의재는 표정 관리는 특성에게 맡기고, 이 문제의 원흉을 찾기 위해 재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그리고 때마침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우리, 저쪽 테이블… 가서 앉을까? 하하.”

바로 죽상이 다 되어서 가게 안으로 들어온 배원우였다. 그는 흰색 카펫에 마라탕을 엎은 사람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얼굴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배원우가 등장하자마자 헌터들의 따끔한 시선은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헌터들 입장에선 밥 잘 먹고 있던 가게에 난데없이 독가스 나오는 운석이 떨어진 셈 아닌가!

사영은 자신을 노려보는 헌터들이나 씁쓸한 얼굴을 한 배원우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곧장 국밥집 중앙으로 걸어갔다. 마침 가게 정중앙에 해장국 세 그릇을 먹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헌터가 있었다. 그가 헉,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서자 이사영은 그곳이 자신의 예약석이라도 되는 양 당당히 앉았다.

당장 국자로 내쫓아도 모자랄 미친놈의 등장에 이마를 짚고 있던 의재가 말했다.

“손님, 자리를 아직 안 치워서요. 다른 곳에 앉으시는 건….”

“아뇨.”

이사영이 긴 다리를 휙 꼬더니 무릎 위에 두 손을 깍지 껴 올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천천히 치워주세요. 이 자리가 좋네요. TV도 잘 보이고.”

“아, 예에….”

네가 저 조그만 브라운관 TV 봐서 뭐 하게.

의재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문장을 되새기면서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어떻게든 일을 키우지 않고 별거 아닌 것처럼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여긴 내 가게가 아니니까. 혹시나 몸싸움이라도 벌어졌다간, 가게 보존은커녕 이 길거리가 통째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불쾌한 티를 내는 건 스스로 무덤 파서 관짝 열고 들어가는 행위다. 게다가 이사영과 아는 사이인 해장국집 아르바이트생이라니, 그 존재부터가 수상하지 않은가!

차의재는 어쩔 수 없이 이사영이 앉은 테이블을 깨끗이 치운 후 앞치마 주머니에서 볼펜과 계산서를 꺼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이사영이 천진하게 물었다.

“여기 메뉴 뭐 있어요?”

배원우는 억울한 눈으로 이사영을 쳐다보았다. 들어오기 전에 다 얘기했잖아, 이 자식아. 해장국 하나밖에 없다고….

의재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해장국이요.”

“그것밖에 없어요?”

“네. 해장국밖에 없어요.”

“야 인마, 내가 여기 해장국 하나만 판다고 했잖아.”

보다 못한 배원우가 말리려는 듯 끼어들었지만 사영은 부러 노포 안을 둘러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해장국 하나로 장사가 되나?”

“손님.”

“아, 공깃밥이랑 소주도 팔지. 근데 그건 식사 메뉴는 아니잖아요.”

“반찬 투정 할 거면 나가시고요.”

“아, 아하하, 저희 그냥 해장국 두 그릇 주세요.”

배원우가 아까보다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워 중재에 나섰다. 의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계산서에 2를 거칠게 휘갈겼다. 그리고 괜히 배원우를 3초간 말없이 응시했다.

배원우. 가게에 사인까지 걸어둔 단골손님. 거의 매일 점심 저녁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데다가, 한번 오면 최소 뚝배기 세 개를 비우는 단골 중의 단골이었다. 의재는 방독면과 달갑지 않은 재회의 원흉으로 누군가를 탓하고 싶진 않았지만, 잠시 동안은 그에게 화살을 돌리고 싶었다.

의재의 싸늘한 시선을 느낀 건지, 배원우는 슬그머니 눈을 피해 테이블 위로 시선을 박았다. 그리고 괜히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단골이라 봐주는 줄 알아라.’

의재는 물을 넘기는 그 울대를 한 대 쳐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누굴 원망해봤자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갑자기 터진 대형 폭탄 앞에서 짜증이 훅 샘솟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에휴,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균열에서 탈출했더니 8년 뒤의 미래에 뚝 떨어져버린 그날 이후, 의재는 체념하는 데에 재주를 붙였다. 배원우를 노려본다고 이사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미워도 싫어도 똑같이 돈 내고 밥 먹는 손님이다. 의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좋아. 정리 완료. 마인드 컨트롤을 끝낸 의재는 뚝배기 두 그릇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제발 해장국을 끓이는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저 자식이 얌전하게 굴길 바라며.

그리고 잠시 후, 착실한 아르바이트생 차의재를 반긴 건 썰렁해진 해장국집의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이사영을 중심으로 그 주변 테이블들이 동그랗게 비어 있었다. 손님이 떠나간 테이블 위에는 꼬깃꼬깃 접힌 지폐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몇몇 사람은 계산대 앞에서 차의재가 계산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건지 서성거렸다.

그런 난장판 사이에 이사영만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씨X, 지가 무슨 태풍의 눈이야?’

당황한 의재는 해장국을 든 채로 문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방금까지 가게에서 해장국을 맛있게 흡입하던 손님들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저기요!”

“맛있게 먹었습니다아아―!!!”

쟁반 위에 해장국을 내려둔 의재가 잰걸음으로 쫓아 나가봤지만 헌터들은 목청 좋게 대답하며 일사불란이 사라졌다. 어찌나 빠른지 던전에서 몬스터를 피해 도망치는 모습과 흡사했다.

멍하니 텅 빈 골목을 바라보던 의재는 시선을 돌렸다. 가게 문 앞에는 자리가 비길 기다리는 헌터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벽에 붙어 있었다.

의재가 가게 안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 비었어요. 들어오세요. 금방 정리해드릴게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손을 휘휘 저어대며 도리질을 쳤다.

“괜찮습니다! 배 많이 안 고파요.”

꼬르륵.

당신 배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대기 번호 1번 손님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가 주먹을 움켜쥐며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다.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정 그러시다면야…. 의재가 대기 번호 2번을 바라보자, 두 번째로 서 있던 헌터가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꺼내 귀에 붙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국어책을 읽듯 삐걱삐걱 말했다.

“아 맞 다! 팀 장 님 그 거 오 늘 까 지 였 죠! 내 정 신 좀 봐, 깜 빡 했 네! 예, 곧 갑니다!”

그게 뭔데. 그리고 아까까지 스타카토로 말했으면서 마지막은 랩으로 마무리하는 기예까지 펼쳤다.

두 번째 헌터가 스피커를 막는 시늉을 하며 의재에게 속삭였다.

“아이고, 제가 줄을 서긴 했지만! 팀장님 심부름부터 하고 나서 먹어야 할 것 같네요. 요즘 정신이 없어서 막 깜빡깜빡… 저는 괜찮으니 다른 분부터 들여보내주십시오.”

그러나 근접 센서의 작동으로 도로 켜져버린 핸드폰 액정에는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기는커녕, 배경 화면이 그대로 보였다. 구라를 칠 거면 번호 누르는 노오력이라도 좀 해라…. 의재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대기 번호 3번을 보았다.

세 번째로 서 있던 헌터는 무표정하니 이런 상황에서도 제법 침착한 듯했다. 그럼 이 손님을 받으면 되겠다. 의재가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자, 헌터가 입을 열었다.

“저 새끼 가면 전화해주실 수 있어요? 제 번호 알려드릴게요. 010…”

취소. 전혀 침착하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입장 거부 사태가 발발하자, 의재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저 자식, 그날 밤 본 국자와 앞치마로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내서 깽판을 치러 온 게 분명했다. 해장국집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손님 리필에 실패한 의재는 다시 가게로 들어가 펄펄 끓는 뚝배기를 들고서 이사영의 테이블로 향했다.

영업방해죄는 112에 신고하면 되나? 근데 난동 부리는 사람이 헌터인데 어떡하지? 각성자 관리국에 전화하면 잡아가주나.

“손님.”

의재가 펄펄 끓는 해장국 뚝배기를 테이블 위에 턱 턱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해장국 두 그릇 나왔습니다.”

그리고 서빙을 마친 뒤에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콘셉트에 잡아 먹힌 컨셉충이라고 해도, 방독면을 쓴 채로 밥을 먹진 않겠지. 어디 한번 그 뻔뻔한 낯짝좀 보자며 의재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이사영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얼굴로 향하더니 사영이 천천히 방독면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조금 헝클어진 앞머리 아래로 보랏빛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쪽도 계속 의재를 보고 있었는지 바로 시선이 얽혔다.

“얼굴 뚫리겠네.”

의재는 어쩐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치 골목에서 이사영을 처음 만났던 그날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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