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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14)화 (14/67)
  • 14화.

    다음 날, 파도 길드에서는 종로 3가 던전 공략팀을 정하는 회의가 있었다. 사영은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결정권자이니 회의실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길드원 전체의 동의 아래 공략팀은 배원우 팀으로 결정됐다. 회의 결과가 나오자마자 사영은 가장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미 끝나기도 전에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던 그였다. 초콜릿 색 회의실 문을 열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민기가 그를 맞았다.

    “길드장님.”

    그는 피곤한 얼굴을 들이대며 먼저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사영이 선수를 쳤다.

    “말해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언사에 서민기가 꿀꺽 침을 삼키는 사이, 다른 길드원들이 웅성대며 문가로 다가왔다.

    “뭐야, 왜 길을 막고 서 있어?”

    “뭐예요, 이 교통 체증?”

    “진짜 말합니까?”

    “빨리 말해. 뒤에 애들 기다리잖아.”

    사영이 출입문을 턱 막고 선 탓에 회의실 안의 인원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정작 문제의 원인인 당사자는 들은 체도 안 했다. 서민기는 울고만 싶었다. 길드장님이 잠깐만 비켜주시면 어디가 덧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길드원들의 눈치를 슬쩍 본 그가 결국 사영의 명령을 따랐다.

    “예…. 박하은, 만 나이 8세, 부모는 안양 던전 희생자입니다. 세 살에 혼자 살아남아 보육원에 갈 뻔한 걸 친조모가 거두어 길렀다고 합니다.”

    “그건 됐고. 삼촌은.”

    “그게…. 삼촌이 없습니다.”

    이사영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꿈틀했다. 서민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박하은 부모 양가 둘 다, 삼촌이라 불릴만한 친척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외동이고 아버지는 여자 형제만 있었습니다.”

    “그럼… 삼촌이라는 사람은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음….”

    민기가 눈을 굴리다 말했다.

    “그냥 생판 남인데 삼촌이라고 부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뒤져도 안 나오는 거라면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일단 여기 자료 받으십시오.”

    서민기가 두툼한 파일을 넘겼다. 사영은 파일을 받아 들고 휘리릭 넘겨 보았다.

    “하나 있는 가족인 할머니는 이 근방에서 해장국집을 운영 중이라고 합니다. 꽤 오래됐던데요.”

    서민기의 말에 사영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회의실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장국집이요? 골목에 있는 곳?”

    “아는 곳?”

    이사영의 물음에 지수가 대놓고 질린 얼굴을 하며 답했다.

    “거기 부길짱 제2의 직장이잖아요.”

    “응?”

    “부길짱 맨~날 거기서 밥 먹어요! 질리지도 않나. 회사에는 하루 한 번 출근하는데 해장국집엔 점심 저녁 두 번 출근하니까… 따지자면 거기가 제1 직장인 듯.”

    배원우가 매일 같은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는 건 사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도 많이 가서 그가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면 길드원들이 꽁무니를 빼는 것도 파도에서는 익숙한 풍경 중 하나였다. 그런데 마침 그 가게가 박하은의 할머니가 하는 해장국집일 줄이야.

    방독면 안, 사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엉? 해장국집? 거기는 왜?”

    때마침 회의실 밖으로 나가기를 포기하고서 바닥 청소나 하던 배원우가 대화에 참여했다.

    “배원우, 이 해장국집 알아?”

    사영이 파일에 적힌 주소를 부르자, 가만히 듣던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장국집 얘기만 나왔는데 배원우의 목소리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아, 내 단골집이지. 내 사인도 걸려 있어, 거기. 왜? 먹으러 가보려고?”

    “어우, 존나 불길해. 길짱님, 잠깐만 비켜주세요.”

    위험을 감지한 강지수가 다급하게 손짓하자 아까까지만 해도 길을 틀어막고 있던 사영이 한 걸음 살짝 물러났다. 그 틈에 빨간 정수리가 쏜살같이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배원우가 선수 교체하듯 천천히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민기도 이때다 싶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씀드릴 특이 사항은 이상입니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영은 서민기를 잡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두 헌터가 떠나고 마침내 새로운 목표물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사영이 의뭉스럽게 말했다.

    “오늘도 해장국집 가?”

    “어? 그렇지. 어떻게 알았냐?”

    “잘됐네. 갈 때 나도 데려가.”

    방독면 렌즈 너머로 사영의 눈꼬리가 휘었다. 순간 실내 온도가 약 3도 정도 낮아지기라도 한 듯, 배원우는 저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 층에 아직 능력 제어를 제대로 못하는 길드원이라도 온 건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남은 복도엔 둘뿐이었다.

    “네가 웬일로?”

    “간만에 점심 밖에서 먹게.”

    사영은 여전히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배원우를 재촉했다. 물론 방독면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다만, 배원우는 그간 사영을 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배원우에게 이사영은 미우나 고우나 곁에 두는 동생 같은 놈이었다. 그런데 요 녀석이 간만에 외식을 하고 싶다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가게에 가서?

    간만이라는 사영의 말마따나 이사영이 밖에서 밥을 먹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독이라는 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치명적인 능력이었기에, 만일을 대비한 나름의 규칙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개인행동을 선호했고 팀 단위로 나가는 전투에서도 능력을 최대한 사리는 편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배원우는 사영이 밖에서 점심을 먹고 싶다는 말에 마음이 찡해지는 감각마저 느꼈다. 곁에 사람을 두는 일에 신중한 사영에게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쓰인 탓이었다.

    “아― 그래, 그래. 가끔은 너도 나가서 먹어야지.”

    1초 전까지만 해도 온몸을 감쌌던 소름 끼치는 감각을 금세 털어낸 배원우가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이사영을 바라보았다. 사영 역시 비슷하게 웃으며 배원우를 마주 봤다. 비록 이사영의 미소는 시꺼먼 속내를 감추기 위한 음흉한 미소였지만.

    배원우가 든든한 가슴을 팍팍 쳤다.

    “오늘 내가 밥 산다!”

    “거기 맛있어?”

    “맛있지! 너도 한번 먹으면 매일 출근 도장 찍게 될걸?”

    “아주 이직하지 그래.”

    “그럴까 생각 중이다, 이 자식아.”

    그렇게 두 사람은 점심 약속을 도모하며 각자의 사무실로 흩어졌다. 길드장과 부길드장 사이에 껴서 눈칫밥 먹고 싶지 않았던 헌터들의 마음은 전혀 모른 채….

    대망의 점심시간. 배원우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사영을 해장국집 앞까지 안내했다. 이미 점심 장사를 시작한 후에 도착해서 그런지 가게 안이 더 북적이는 것 같았다. 허름한 가게 외관을 훑어보던 이사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배원우에게 물어보았다.

    “여기 맛집 맞아?”

    “야, 나 못 믿어?”

    “응.”

    사영의 의심이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게 입구는 너무 낮아서 코가 닿을 것 같았고, 허름한 외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는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딱 봐도 낡고 오래된 이 가게는 깔끔한 걸 좋아하는 이사영의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못 믿어도 내 혀는 믿어도 돼.”

    “여기 메뉴 뭐 있는데?”

    “해장국.”

    “또?”

    “공깃밥.”

    “또?”

    “소주, 막걸리.”

    “끝?”

    배원우는 떨떠름한 그의 낯에 대고 네가 뭘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해봐. 얼마나 맛있으면 해장국 하나로 승부 보겠냐. 속고만 살았어?”

    “응.”

    “넌 의심이 너무 많아, 인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찬찬히 들으니 맞는 이야기 같긴 했다. 여기서 오래 운영한 식당이라면 그만큼 찾는 손님들도 많다는 뜻일 테고. 사영은 그제야 의심을 조금 거둔 채 미닫이문의 유리로 내부를 슬쩍 살폈다.

    미어캣처럼 살펴본 해장국집 안은… 헌터들로 가득했다. 보통 많은 것도 아니고 그냥 헌터 밭이었다! 여기서 던전 경매라도 열리나 싶을 정도였다. 이사영은 유리창에서 살며시 얼굴을 떼어낸 뒤 의심스럽게 배원우를 바라보았다.

    “왜 또 그러고 쳐다봐? 뭔데?”

    “…길드 이적 고민 중이야?”

    “뭔 개소리야? 내가 파도에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얼만데?”

    “근데 여기 헌터가 왜 이렇게 많아. HB 길드 인사팀 팀장도 있잖아.”

    그제야 배원우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답시고 해장국에 눈이 멀어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는 지치고 배고픈 헌터들의 천국. 기사들의 쉼터, 기사 식당 같은 곳. 헌터들이 인정한 헌터 공인 맛집. 그런 곳에, 내 손으로, 이 예의도 모르는 싸가지 바가지 길드장을 데려왔다고? 꼴 받으면 숟가락질하다가 독을 뿜을 수도 있는 애를?

    X 됐다.

    강렬한 예감이 밀려들어오며 자신을 우주로 날려 보내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시비라도 털려서 싸움이라도 나면 X 된 수준이 아니라 이미 X 된 채로 9시 뉴스에 출연할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가야 하나? 원솥 도시락이나 먹으러 가?

    고뇌하는 배원우를 내버려두고, 사영은 앞 손님이 나가 본인들 차례가 오자마자 미닫이문을 열고 해장국집 안으로 홀랑 들어가버렸다. 누가 랭킹 1위 헌터 아니랄까 봐 붙잡을 틈도 없이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사영은 낮은 천장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시선을 치켜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어서 오세…”

    그토록 찾던 얼굴이 나타났다. 그날 밤 보았던 얼굴은 마스크에 반쯤 가려져 있었으나, 사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소주 브랜드 앞치마. 국자 대신 뚝배기를 든 청년.

    “…찾았다.”

    청년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구겨졌다. 이사영은 보이지 않는 입매를 밀어 올리며 나직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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