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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11)화 (11/67)

11화.

얘기를 듣자 하니 청년은 해장국집 주인 할머니의 오촌 조카의 둘째의 사돈의 팔촌이라던가 그랬다. 균열 때문에 가족을 다 잃고 살아남은 친척들을 찾아다니다 할머니를 겨우 만났다나. 기댈 곳이 없으니 세상천지 유일하게 남은 혈연인 할머니의 가게 일을 도우며 지낸다고 했다.

사실 원우는 청년의 안타깝고도 장대한 배경 이야기는 반쯤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사연은 기구한 축에 들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모두 청년을 유례없는 효자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죄다 노량진에서 헌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헌터 길드 비각성자 부문 채용을 노리지, 아무리 가족이 하는 식당이라고 한들 누가 이런 허름한 해장국집에서 일하겠는가!

이 때문에 배원우를 비롯한 헌터들은 갑자기 나타난 청년을 매우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사실 할머니 혼자 장사하기엔 본인들이 생각해도 너무 많이 처먹어 눈치가 보였다. 건강하고 튼튼한 청년은 일도 야무지게 잘해서 뚝배기 몇 개씩을 그냥 날랐다.

‘해장국집에서 30년 일한 사람 같았지.’

액면가로 보나 그의 가정사로 보나 해장국집에서 일하는 건 분명 처음일 텐데도 청년의 서빙하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출근하기 시작한 후로 가게 테이블 회전이 확실히 빨라진 것은 물론, 작작 좀 처먹으라고 할머니에게 혼나지도 않았다! 빨리 먹고 많이 먹는 헌터들에게 그의 등장은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청년 혼자 가게를 꾸려나가는 듯했다. 넌지시 물어보니 할머니의 다리가 좋지 않으시다는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청년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배원우도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하곤 빈 좌석을 살폈다. 딱 하나 남아 있는 자리는 2인석에 혼자 앉은 손님의 맞은편 좌석이었는데, 다행히 좌석의 주인은 원우와 안면이 있는 헌터였다. 그는 배원우 못지않은 단골손님이라 최소 이틀에 한 번씩 마주치곤 해서 내적 친밀감이 제법 쌓여 있었다. 원우가 넉살 좋게 물었다.

“여기 좀 앉아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웨이팅 길어지기 전에 잘 맞춰 오셨네요.”

“그럼요.”

자연스럽게 안부 인사를 나누며 합석한 배원우는 잠시 주변 눈치를 살폈다. 길드장이 요구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가 모른 척 허공에 대고 물었다.

“아, 그런데… 요즘 소주 앞치마 입는 곳이 어디 있죠?”

목소리 끝이 살짝 삐끗했지만 배원우가 생각하기엔 꽤 자연스럽게 운을 뗀 것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헌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예? 소주 앞치마? 갑자기요?”

“어어, 흠, 갑자기 궁금해서요.”

슬쩍 말을 꺼내자 주변 테이블에서도 한마디씩 얹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통 음식점에 흰옷 입고 갔을 때 옷에 안 튀게 하려고 입지 않나?”

“맞지.”

“응. 음식점에 많죠, 벽에 걸어두잖아요, 입으라고.”

“저 얼마 전에 마덕 길드 앞 닭갈빗집 갔는데 거기에도 있었어요. 헌터넷 인증 맛집이라더니 진짜 맛있던데.”

“와, 전 거기 한 번 갔다가 웨이팅 너무 길어서 그냥 포기했잖아요.”

“거기 금요일 저녁에 가면 마덕 길드원들이 회식하고 있더라고요.”

먹는 얘기로 화기애애해진 헌터들을 보며 내심 뿌듯함을 느끼던 배원우는 문득 생각했다. 여기도 음식점 아닌가? 빨간 국물 튀지 말라고 앞치마도 줬던 것 같은데.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벽에 걸린 격자형 옷걸이에 검은색 앞치마 하나가 대롱대롱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래, 저런 거. 반가움에 원우가 눈을 빛내는 사이 청년이 김치와 깍두기를 들고 걸어와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그러곤 앞치마 앞주머니에서 볼펜과 새 계산서를 꺼내…

…앞치마!

배원우는 머릿속에 섬광이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이 가게의 성실한 아르바이트 청년도 항상 앞치마를 입고 있지 않은가. 청년이 입은 앞치마 가슴 부분에는 참X슬 로고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소주 브랜드 앞치마?

“해장국 하나 맞으시죠. 고추 많이 갖다 드려요?”

배원우는 대답조차 잊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청년을 빤히 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때 웬 배우가 해장국 집에 있나 싶긴 했었다. 처음 보면 ‘이런 허름한 곳에 이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하고 놀랄 정도로 수려한 외모, 무심한 듯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맑은 검은 눈동자,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까지. 순간 배원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라?’

아르바이트생 머리가 원래… 좀 회색빛이었나? 형광등 아래에 있는 동그란 정수리가 오늘따라 검은색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회색 머리면…’

어째… 이사영이 말한 인상착의랑 꽤 비슷하지 않나? 검은색인지 회색인지 헷갈리는 머리 색에 곱상하게 생겼다고 했잖아. 심지어 회색 머리는 흔하지도 않다!

“손님?”

여긴 해장국집이니까… 국자도 있을 텐데? 원우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손님.”

“배 헌터님?”

배원우는 동석한 헌터가 저를 부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 쌍의 눈동자가 그를 이상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배원우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예. 맞습니다. 제가 잠깐 딴생각에 좀 빠져 있느라. 청양고추 많이요.”

“네. 잠깐만요.”

볼펜을 딸깍 누른 청년이 뒤를 돌아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배원우는 곧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이사영이 해장국집 아르바이트생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겠냐. 둘이 만나기는커녕 옷깃 스친 적도 없을 텐데.

…그래도 혹시?

배원우는 계속해서 청년이 들어간 부엌 쪽을 흘끔대며 일말의 가능성을 점쳤다. 하지만 잠시 후,

“해장국 나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한 톨 남아 있던 의심은 뜨끈한 해장국에 사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배원우는 흐뭇하게 웃으며 해장국 뚝배기를 설거지하듯 바닥까지 싹싹 비우고 힘차게 외쳤다.

“한 그릇 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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