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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조용히 살고 싶다 (5)화 (5/67)
  • 5화.

    까만 머리에 흰 목도리. 알아보지 못하려야 못할 수 없는 단 하나뿐인 가면.

    ‘초상권 침해 아니야, 이거?’

    이건 누가 봐도 헌터 J, 차의재 자신을 그려놓은 캐릭터였다. 이걸 초상권 침해라고 해야 하나, 가면 저작권 침해라고 해야 하나. 지금 내가 죽은 사람이라고 너무 마음대로 갖다 쓰는 것 아닌가?

    사실 J가 등장한 곳은 이 책뿐만이 아니긴 했다. 다들 J가 죽었으니 그냥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균열의 날 이후 시대를 설명할 때 끼워 넣기 좋아서 그런 건진 몰라도 J는 정빈 다음으로 온갖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방송 같은 곳에서 나올 땐 오히려 별생각 없었는데, 이런 데 인쇄까지 되다니 묘하게 찜찜했다. S급 각성 기념으로다가 로열티로 재단이나 하나 만들어둘 걸 그랬나. 심란해진 의재는 쩝 입맛을 다신 뒤 하은을 향해 계산대로 가자고 손짓했다.

    “삼만 원입니다.”

    ‘해장국 두 그릇 가격이군.’

    덤덤하게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한 의재는 한 손엔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론 하은의 손을 맞잡고서 서점을 나섰다.

    균열의 날 이후 물가는 지붕을 뚫을 듯 치솟았다. 할머니네 노포에서 파는 해장국도 예전엔 칠천 원이었으나 원재료비 상승으로 가격이 올라 만 오천 원이 되었는데, 그것도 근방 물가에 비하면 매우 싼 편이었다. 그래서 헌터들이 오지게 찾아오는 걸까…. 돈도 많은 놈들이.

    “삼촌.”

    “응?”

    뜬금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의재의 사색이 멈췄다. 하은이 손가락으로 의재의 다른 쪽 손을 가리켰다.

    “책 내가 들래.”

    책 한 권 정도야 어린애가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는 순순히 책을 내밀었다. 하은은 쥐고 있던 삼촌의 손을 놓고서 양팔로 책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가지고 싶던 것을 사서 기분이 들뜨는 모양이었다.

    “이제 우리 어디 가?”

    “가기는 어딜 가, 삼촌은 너 집에 데려다주고 가게 가서 저녁 장사 준비할 거야.”

    “흥. 재미없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자 하은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가게에 함께 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의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녁에는 준비할 게 많아서 안 돼. 아이스크림 사줄 테니까 가서 할머니랑 같이 먹어.”

    “…웅.”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동그란 뒤통수를 툭툭 쓰다듬고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옆에 꼬옥 붙어 걷는 하은이 못내 귀여웠는지 의재가 작은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 * *

    헌터 J가 아닌 해장국집 아르바이트생 차의재는 오늘도 헌터들에게 해장국 한 그릇을 끓여줘야 했다. 해장국집의 하루 루틴은 다음과 같다.

    오전 6시, 가게를 연다. 그럼 밤새 5차까지 회식을 달린 헌터들이 해장국집에 6차를 달리러 오거나 야근에 절어 흐물흐물해진 헌터들이 따개비처럼 문에 달라붙어 있다가 후다닥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이 시간대 손님은 대부분 말 그대로 좀비들이었다. 주문도,

    “우애.”

    “네. 해장국 두 개.”

    이딴 식으로 하곤 했으니…. 의재는 아무래도 자신의 좀비 동시통역 같은 걸 세 번째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식사를 마친 좀비들이 비척비척 기어나가면 그 후부터 좀 정상적인 손님들이 온다. 대부분 출근 전 아침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인데, 각자의 피곤을 덕지덕지 매달고 있긴 하지만 이쪽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11시 30분부터 2시. 가게 회전율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이때 오는 손님들은 당연히 십중팔구 헌터들이라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곤 했다.

    이 시간대에는 가끔 긴급 호출이 들어오면 해장국을 먹다 말고 헐레벌떡 뛰쳐나가는 헌터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변 헌터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그 뒷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토끼 같은 해장국을 놔두고 나가야만 하는 비련의 헌터가, 당장 내일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기에….

    그렇게 폭풍 같은 점심시간이 끝나면 의재는 칼같이 문에 재료 준비 시간이라는 팻말을 걸었다. 먹성 좋은 헌터들을 상대로 장사하기 위해선 브레이크타임은 필수였다. 이 시간에는 하교하는 하은을 데리러 가거나 밀린 설거지를 해치우고 재료 손질 및 저녁 장사 준비를 한다.

    마지막으로 저녁 타임인 5시부터 10시. 점심시간도 정신없긴 하지만, 사실 해장국집은 저녁에 훨씬 더 바쁘게 돌아간다. 다른 건 앞 시간이랑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나 소주 한 병씩만 더 팔아달라며 떼쓰는 헌터들을 상대하는 게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한 병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 빈 병을 숨기는 걸 보고 있자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쩜 레퍼토리도 다 똑같은지, 수법이라고 해봤자 인벤토리에 넣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각성자 전용 술이 아니면 취기도 못 느낄 텐데 구태여 소주를 주문하는 심리는 뭘까. 의재로서는 영 알 수 없었다.

    “후우….”

    그리고 지금, 오후 10시 20분. 안 나가겠다고 미적대는 마지막 손님을 스테인리스 국자를 휘두르며 내쫓고 나자 가게는 언제 북적였냐는 듯 한가한 노포로 돌아왔다. 테이블을 정리하던 의재가 잠시 허리를 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구나….

    테이블 닦기와 바닥 쓸기, 설거지까지 모두 끝낸 그는 부엌 구석에 있던 통마늘 바구니를 들고 카운터 바로 옆의 테이블로 와 앉았다. 해장국집에 딸린 창고 겸 단칸방에서 주로 지내다 보니 마감과 오픈 준비는 자연스레 그의 몫이 되었다.

    바스락, 바스락. 능숙하게 마늘을 까던 의재는 문득 생각했다.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관리국에서 오는 호출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지 않아도 되고, 몬스터랑 씨름할 일도 없으며 가만히 앉아서 마늘이나 까면 되는 삶이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어쩌면 난 이런 삶을 바라온 걸지도….

    이렇듯 비교적 평안한 일상을 보내던 의재의 최근 걱정거리는 할머니의 다리 건강이었다. 최근 한 달 부쩍 거동이 불편해지신 탓에 요즘엔 의재가 대부분의 가게 일을 도맡아 하는 상황이었다. 한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봐야 할 텐데, 만약에 수술이라도 하셔야 하면 어쩌지.

    의재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해장국집 장사가 워낙 바쁘니 하루 휴업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수술비를 마련하는 건 더 큰 문제였다. J는 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살았다지만 차의재는 아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선 마늘 껍질을 벗겨내며 생각에 잠겼다.

    ‘정 안 되면 던전을 몰래 돌아서… 뭐라도 좀 팔아보자.’

    던전에서 나온 부산물은 대부분 값을 제법 쳐주니까 수술비에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 의재가 머릿속으로 어디를 어떻게 뚫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따르릉― 웬일로 이 시간에 카운터의 전화기가 울렸다. 의재는 수화기를 귀에 끼고 계속 마늘을 깠다.

    “네, 해장국집입니다.”

    종종 가게로 배달 가능하냐는 문의 전화가 오곤 했기에, 늘 그렇듯 지금은 영업도 끝났고 배달은 원래 안 한다 대답한 뒤 끊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의외의 목소리에 의재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우야면 좋노, 의재야….

    “할머니?”

    할머니였다. 목소리 끝이 조금 떨리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의재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은이가 사라지삤다.

    “네? 하은이가 없다고요?”

    의재는 당황해서 얼른 수화기를 고쳐잡았다. 할머니는 진정하기가 어려운 듯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은이가 어데 가뿌고 없다, 우야노. 내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 나갔는지 모르겠다. 요새 세상이 을매나 무서븐데 아 혼자 나간 기고….

    의재는 힐끗 시계를 보았다. 오후 10시 20분.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가 혼자 돌아다니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도 설마 하는 안 좋은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으나 애써 지워냈다.

    “우선 경찰에는 제가 연락할게요. 그리고 저도 나가서 찾아볼 테니까 일단 쉬고 계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의재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칼과 마늘을 내려놓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 할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이고, 야야…. 진짜 개안큿나?

    “괜찮다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조심혀. 하은이 그 가시나 먼 데까진 못 갔을 끼라, 그쟈? 의재 니도 너무 늦게꺼정 댕기지 말고 퍼뜩퍼뜩 들어온나이, 단디하고. 알았나?

    “네. 좀 있다가 연락 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나니 책을 사고 기뻐하던 하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갈 채비를 하는 의재의 얼굴이 아까 전까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굳어 있었다. 별일 없을 거라는 말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마스크를 챙겨 쓴 의재가 성큼성큼 문을 열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문을 잠그고 빨간색 영업 종료 팻말을 걸었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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