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25. 생각지도 못한
김세현이 나가고 잠시 뒤, 벌써 말을 전했는지 아저씨가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인사를 건네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는 이번에도 손사래를 치며 내 행동을 말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정말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이 이 이상 일어나는 게 결례인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무릎을 세웠다가 다시 자리에 앉자 아저씨는 조금 전 앉았던 방석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는 괜찮으셨습니까?”
“무척요. 먹는 음식마다 입에 맞아서 평소보다 폭식했어요.”
“하하, 다행입니다.”
대답을 들은 아저씨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본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날 바라보는 눈빛 속엔 따뜻함이 가득했다. 마치 동네 어르신들이, 팀원들이 날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아저씨의 시선이 상으로 향했다.
“…도련님께서 거하게 드셨군요. 내숭을 떨기에 조금만 드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김세현이 내숭을 떨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김세현이 정말 그랬나 되짚어 봤지만, 딱히 짐작되는 부분은 없었다. 의아한 마음에 그를 바라봤지만, 아저씨는 그저 웃을 뿐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평소보다 많이 드신 걸 보니 같이 드신 분의 영향이 큰 듯합니다.”
그 말은 마치 내가 있어 김세현이 더 편하게 먹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차오른 민망함을 내리 누르며 말을 돌렸다.
“…점심을 늦게 먹는 터라 많이 배고팠을 거예요.”
영화를 보며 주전부리를 먹긴 했어도 평소 먹던 양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게 먹은 상황이었다. 영화도 점심시간이 지나고 끝난 터라 이동 거리까지 생각한다면 사실 지금 먹은 양도 적다고 볼 수 있었다.
대답하고 보니 같이 식사한 사람보다는 허기짐이 식사량을 결정하는 데 더 큰 영향을 준 거 같다. 고갤 끄덕이자 눈이 커지던 아저씨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 식사량을 보고도 놀라지 않으시는 걸 보면 평소 도련님이 얼마나 드시는지 알고 계시나 보군요.”
저 말을 꺼낸 이유가 뭘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아저씬 조금 전보다 훨씬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째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빛이 나는 것만 같다. 나는 곧바로 고갤 끄덕였다.
“네.”
이미 그의 식사량은 사무실에서의 첫 만남부터 알고 있었다. 아주 잘 말이다.
“그러시군요.”
역시 내 대답을 기다렸던 게 맞나 보다. 흐뭇한 시선을 보내오는 아저씨를 보며 따라 웃는데, 그가 돌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도 없으니 마음 편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십시오.”
“네?”
“이래 봬도 도련님이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터라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으음.”
갑자기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해서 무슨 말인가 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삽시간에 목젖까지 차오른 호기심과 궁금함을 내리누르며 고갤 저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세현 씨한테 직접 물어볼게요.”
사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면 지뢰를 잘 피해 물어보겠지만, 어설프게 아는 만큼 차라리 질문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혹시 모를 일이었다. 가볍게 말을 꺼냈는데, 그게 김세현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일지 말이다.
“…어째서 도련님께서 여기로 모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하하.”
내 난감함을 다르게 해석한 듯 아저씨의 눈빛이 더욱 따스하게 변한다.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이야기가 길어질 게 뻔했다. 그저 멋쩍은 미소를 짓는데 아저씨가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부끄럼을 많이 타시나 봅니다.”
“…평소엔 이러지 않아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이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멋쩍게 뒷목을 만지며 웃음이 그치길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만에 드디어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혹여 다시 부끄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이야깃거리를 고심하는데, 아저씨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여긴 멀어 자주 오시진 못할 듯하니 분점에 기별해 두겠습니다. 그곳으로 연락주시면 바로 음식 준비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챙겨 주시겠다고 한 반찬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래, 오늘 여기서 밥을 먹은 것도 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이미 충분했다. 다급히 손사랠 쳐봤지만 아저씨는 이미 마음을 먹은 듯했다.
“도련님과 각별한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지요. 게다가 도련님의 배가 워낙 커서 냉장고가 자주 털리셨을 텐데요.”
“몇 번 안 털렸어요. 게다가…. 털릴 만큼 냉장고가 차 있는 것도 아니고요.”
김세현이 자주 왔던 것도 아니거니와 온다고 한들 배달 음식으로 배를 채웠던 상황이었다. 간혹 그가 배가 차지 않을 때 없는 반찬과 밥을 내어 줬을 뿐인데, 이런 대접을 받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막상 이곳에서 대접받은 것과 너무도 비교되는 반찬거리를 떠올리며 민망해하는데, 그런 날 아저씨가 빤히 바라보았다.
“…….”
아까부터 눈을 마주하고는 있었지만,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질 만큼 내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뗐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아, 제가 너무 빤히 바라봤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으면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사실 저 표정을 보며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내 말을 들은 아저씨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곡선을 그렸다.
“…말씀 주신 김에 하나 여쭙겠습니다. 혹시 도련님께서 잠도 자고 가십니까?”
“네. 몇 번 안 되지만요.”
“…….”
대답을 들은 아저씨의 표정이 묘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몹시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가는 여러 감정들을 지켜보는데, 이내 아저씨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이 정말 하늘 님을 가깝게 생각하고 계신가 봅니다.”
“하늘 님이라뇨. 그냥 이름 불러주셔도 돼요.”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놀라 손사래 치자 날 지그시 바라보던 아저씨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하늘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김세현을 도련님이라고 부른다고 하여 나까지 올려 부를 필요는 없었다. 진심을 담아 그래 주길 바란다고 말하자 아저씨가 재차 미소 지었다.
“대활 나누다 보니 상을 내보낼 타이밍을 놓쳤군요. 바로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와서 상을 내어가도록 해.”
“예.”
아저씨가 지시를 내리기 무섭게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들어와 상을 치우는데, 그 모습을 보다가 순간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
김세현과 허물없는 관계인 건 이미 본 게 있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관계라고 해서 사적인 부분을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 물어보라고 한 건 좀 아니었다.
어느새 상을 치운 이들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다. 인기척이 이곳과 멀어지는 소리에 집중하면서도 아저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함께 문 쪽을 보던 이가 드디어 시선을 마주해왔다.
“상을 치웠으니 방 정리를…. 아, 저 사람들이 걱정되셨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채에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은 전부 믿을 수 있는 이들이니까요.”
“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바로 내 생각을 알아차릴 줄이야.
역시 표정에 너무 감정이 드러나는 것 같다. 머쓱한 얼굴로 볼을 만지작거리자 아저씨는 한 번 더 눈가를 접으며 말했다.
“심심하시면 TV 보셔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TV 이야기를 꺼낸 건 내가 민망해하고 있단 걸 모른 체하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재빠르게 그의 말에 응하며 리모컨을 집어 든 나는 TV를 켜자마자 의외의 사람이 보이자 미간을 찌푸렸다.
“하.”
하필 이 순간 이영진 의원이 나올 게 뭘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숨소릴 들으며 이번엔 무슨 일로 뉴스를 탔나 귀를 기울였다.
-…이영진 의원을 비롯한 여당 의원들은 최근 생성되었던 던전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뜻을 모으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여당 의원들이 발 벗고 나선 만큼 국회에 계류 중인 던전 피해 관련된 법안이 빠르게 처리되길 시민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영진 의원이 이번에도 역시나 사람들을 찾아간 모양이다.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한 행동이란 생각을 하면 고깝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던전 피해에 대한 이슈가 뉴스를 타는 건 썩 나쁘지 않았다. 매체에 뜬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쏠릴 테고, 그만큼 윗선에서도 압박을 받아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게 될 테니까.
“…….”
하지만 그걸 이영진 의원이 주도적으로 이행하고 있단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어지는 뉴스를 보면서도 좀처럼 이영진 의원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아 불편해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TV 화면이 붉게 물들더니 익숙한 경고 문구가 떴다. 바로 던전이 생성되었다는 경고 방송이었다.
“어.”
하필 내가 쉬는 날 던전이 생성될 게 뭘까.
조급해진 마음에 어서 던전이 생성된 장소가 뜨길 바라는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화면이 바뀌며 던전이 생성된 위치가 떴다.
“…….”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몇 번이고 눈을 깜박여봤지만, 화면 속 구역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저 구역은!”
구역명을 보며 놀란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저씨가 내게 시선을 준다. 나는 곧바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문을 열었다.
“어서 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김세현의 집이 있는 곳에 떡하니 던전이 생성되었는데, 그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저씨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별채를 나섰다.
“…괜찮아야 할 텐데.”
이전에도 한 번 김세현의 집이 있는 구역에 던전이 생성되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엔 다행히 김세현의 집이 무사했지만 이번에도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
그건 그렇고 나도 사무실로 복귀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던전 난이도와 규모 모두 B급이라는 문구를 보며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방 안을 서성일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