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25. 생각지도 못한
“그러고 보니 너무 도련님과만 대화를 나눴군요. 제 소개부터 하지요. 저는 도련님과 절친한 친우 사이인 박병준입니다. 편히 박 아저씨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하늘이라고 합니다. 세현 씨랑은…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요.”
뭔가 다른 표현이 있을까 싶어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표현이 없다. 친하다는 말로 얼버무리자 자길 박 아저씨라 불러 달라던 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겠습니다.”
일단이라니.
마치 김세현과 나 사이에 뭔가 있다는 듯한 말이다. 어쩌면 아무 뜻도 없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다. 슬며시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맞은편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웃지 마. 부끄럼 많이 타니까.”
“하하, 예.”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싶다. 김세현을 흘겨보자, 그는 잠시 날 보며 입가를 씰룩이더니 몇 차례 헛기침을 뱉었다. 딴에 웃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지만, 김세현의 입가는 좀처럼 제자리를 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한 마디 해주고 싶단 생각이 굴뚝같다. 하지만 이 자리엔 나와 김세현만 있는 게 아니었다.
“…….”
아저씨라 불러달라고 한 이가 김세현과 가까운 사이라곤 하나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한 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는 뜻을 담아 빤히 바라보자 김세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요. 아까 말 취소할게요.”
“…확실하게 취소해요.”
취소한다고 말은 해도 표정은 전혀 취소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김세현을 빤히 바라보며 한 번 더 지적하자 김세현이 두 손을 들어 항복했다.
“큽! 완전 확실하게 취소했어요.”
확실하다는 말만 붙은 것일 뿐이나 이 정도라면 그에게 충분히 인식은 시켰을 것이었다. 내가 부끄럼을 많이 타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나는 약간의 찝찝함을 뒤로한 채 고갤 끄덕였다.
“좋아요.”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한 번 더 웃음을 참아 내더니 크게 심호흡한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딴에 노력하는 것 같으니 이 이상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상 위에 놓인 물을 마시며 마음을 다스리는데,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듯한 김세현이 아저씨라고 부른 이에게 말을 건넸다.
“나 돌아갈 때 반찬 좀 싸 가려고.”
“같이 오신 분 몫도 든든히 챙겨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여기 와서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김세현이 챙겨 간다면 오늘내일 함께 있을 것이기에 같이 먹을 수 있었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하자 이번엔 옆에서 답해왔다.
“그냥 챙겨 가요. 말은 저렇게 해도 이미 다 준비해 뒀어요.”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이미 챙겨 둔 터라 다시 풀기도 그러니 가지고 가세요.”
김세현에 이어 박 아저씨까지 말하는데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뭣했다. 나는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앞으로 종종 우리 도련님과 함께 오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으음.”
이건 내가 그러겠다고 하기도 뭣한 부분인지라 답하기 어려웠다. 침음을 삼키며 김세현을 바라보자 날 바라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갈 바라는 듯 날 바라보는데, 이번엔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날 바라보는 건지 도통 짐작하기 힘들다. 난처한 시선을 보내자 김세현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아저씨에게 답했다.
“당연하지. 앞으로 자주 올 거야.”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그런 것으로 알고 항상 기다리고 있도록 하죠. 식사 계속하셔야 하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 아저씨를 따라 일어서는데, 그가 고갤 젓는다. 그에 반쯤 일어나려다 만 자세로 배웅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형, 얼른 먹어요. 반찬 챙기고 가는 길에 장도 보고 들어가야죠.”
먹는 와중에 다시 또 먹을 이야기를 하니 기가 막힌다. 하지만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다시금 음식을 먹기 시작한 김세현을 보며 나 역시 마저 다 차지 않은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먹는 중간중간 김세현이 챙겨 주는 음식을 먹고, 또 그를 챙기다 보니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배가 가득 찼다.
“다 먹었어요?”
“네. 더는 못 먹겠어요.”
아직 삼계탕도 절반 이상 먹지 못한 상황인데, 손을 놓는 게 너무 아쉽다. 그렇다고 꾸역꾸역 먹기엔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고역일 만큼 배가 찬 상태였다. 고개를 저으며 의사를 밝히자 김세현이 곧바로 내 앞의 삼계탕을 가지고 갔다.
“그럼 이거 나 먹어요?”
마치 어서 그러라고 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온다. 잔뜩 기대하는 눈빛을 보다가 슬쩍 김세현이 먹던 삼계탕 그릇을 보니 언제 다 먹었는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네, 드세요. 덜어서 먹었으니 깨끗해요.”
아무래도 양이 많은 듯해 덜어 먹길 잘한 듯하다. 내 말을 들은 김세현이 작은 소리를 뱉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편하게 먹어도 되는데, 덜어서 먹는다 했어요.”
“기왕이면 먹기 전에 덜어 드릴 걸 그랬나 봐요.”
깨끗하게 먹긴 했지만, 먹기 전에 덜어 주는 것과 남은 걸 먹는 건 기분이 달랐다.
“됐어요. 난 형이 먹던 것도 잘 먹으니까.”
“…….”
사실, 이미 전적이 있긴 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자 그가 다시금 웃음을 터뜨린다. 한참을 그렇게 김세현을 바라보는데, 그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입에 담았다.
“삼계탕 다 식겠어요.”
“…식기 전에 먹긴 해야죠.”
식사를 시작한 지 시간이 제법 흘렀기에 이 이상 식었다간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터였다. 김세현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마음을 다스리고는 가져간 삼계탕을 먹기 시작했다.
가만히 김세현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박 아저씨가 어째서 김세현이 먹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한결같은 속도로 복스럽게, 그것도 엄청난 양을 먹는 사람은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도 한 번 생각했던 거지만 김세현이 먹방 크리에이터가 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보지 않을까 싶다. 얼굴도 되겠다, S급 헌터겠다. 심지어 다른 먹방 크리에이터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식성도 갖추고 있었다.
속으로 감탄하며 계속해서 그를 보는데, 김세현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는 게 보였다. 아직 그의 식사량을 채우려면 더 먹어야 할 듯한데 어째서 벌써 느려진 건지 모르겠다. 의아함에 식사하는 입이 아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째서 김세현의 식사 속도가 느려진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곳 보고 있을게요.”
“그래요.”
내가 너무 빤히 사람을 쳐다봤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김세현이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답하진 않았을 터였다.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막지 않으며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하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한옥의 소박한 듯 소박하지 않은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세현 씨, 창 열어도 될까요?”
“저쪽 창 열면 아저씨가 꾸며 놓은 정원도 보일 테니 기왕이면 저쪽 가서 편히 앉아서 쉬어요.”
“네.”
김세현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등받이가 있는 나무 좌식 의자와 함께 배꼽 조금 위쪽으로 자리한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자리를 옮겨가 창을 열자 별채에 들어오기 전과는 또 다른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
“괜찮아요?”
“무척요.”
말로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듯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것도 아니고 나무 몇 그루와 함께 장독대와 연못이 자리한 곳은 집과 너무도 잘 어우러지는 공간이었다.
이곳에 가만히 앉아 정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너끈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가 좋아하겠네요. 취향이 맞는다고.”
“하하.”
굳이 취향이라고 할 게 있나 싶지만, 좋아할 거라는 말을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다. 그렇게 김세현이 식사하는 동안 가끔 대화를 나누며 바깥 풍경을 눈에 담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쯧!”
갑자기 김세현이 혀를 찬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리에 시선을 돌려 그를 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던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왔네요. 하,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반찬 여기로 가져오라고 해 둘걸.”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이라.
매번 생각나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기왕이면 그 사람만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김세현이 저렇게 싫어하는 걸 봐선 아무래도 그 남자가 온 것일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 남자만큼이나 김세현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가 이곳을 방문했다거나.
뭐가 되었건 간에 김세현이 저렇게 정색하는 걸 보면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일단 형은 여기 있어요.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네.”
“혹여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누가 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요. 아니지, 가는 길에 아저씨 부를 테니까 같이 있어요.”
김세현이 자릴 비운 사이에 누가 온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김세현이 나가 만나려는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님을 의미했다. 게다가 아저씨와 함께 있으란 말은 어쩌면 그 사람들이 별채로도 올 수 있단 말과도 같았다.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었지만, 내 호기심을 풀자고 괜히 움직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그를 보며 입가를 끌어당겼다.
“그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