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25. 생각지도 못한
“형, 부담스러우면 그냥 집으로 갈까요?”
“아뇨. 괜찮아요.”
내가 보러 오겠다고 한 건데, 주변이 신경 쓰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 와 돌아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해놓고도 아닌 척 계속 주변을 살필 때였다. 순간 무언가가 내 볼을 찌르는 느낌에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난 진짜 집에서 봐도 돼요. 팝콘만 사서 돌아갈래요?”
이렇게 한 번 더 물어봤다는 건 어지간히 내 행동이 신경 쓰인단 말이었다. 말하면서도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김세현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괜찮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말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니 마음이 쓰일 만도 했다. 나는 김세현에게 곧바로 사과했다.
“신경쓰게 해서 미안해요. 이젠 정말 믿을게요.”
“미안은요. 난 진짜 이대로 집에 가면 좋거든요?”
그저 내 마음을 풀어주고자 하는 말인 줄 알았건만, 저 표정을 보니 진짜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주저하다간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것만 같단 생각에 스낵 코너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보고 가야죠.”
영화관에 오지 않았다면 또 모를까, 이미 예매까지 했으면서 돌아간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었다.
“그럼 영화 보고 바로 집에 가요.”
내 뜻이 전달된 걸까, 김세현이 바로 수긍한다. 하지만 저 말엔 함정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김세현의 말을 정정했다.
“…드라이브도 하기로 했잖아요. 저녁 먹을 것도 사야 하고요.”
순간 그의 유도대로 답할 뻔했지만, 바로 캐치해 다행이다. 정신을 다잡고 예정했던 일들을 읊자 김세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이내 무엇을 떠올린 건지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눈동자 역시 빛이 넘쳐흘렀고.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를 볼 때면 항상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순간 미세하게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뭔가 떠올린 게 분명했다. 기왕이면 멀쩡한 걸 떠올렸으면 했다. 긴장하며 바라보는데, 김세현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입에 담았다.
“뭐, 형이 정 그렇다면야. 대신, 오늘 저녁 반찬 맛있는 걸로 해 줘요.”
그래도 상상했던 범주 안에서의 내용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데, 그런 날 바라보는 김세현의 입가가 재차 씰룩였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답변했다.
“노력은 해 볼게요.”
여기서 머뭇대다간 이번엔 정말 상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입에 담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빨랐던 내 대답 때문일까, 김세현의 얼굴에 만족어린 미소가 번진다. 그 모습에 안도하며 따라 웃는데, 앞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수령했는지 스낵 코너의 줄이 줄어들었다. 김세현과 앞으로 이동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미리 뭘 먹을지 말을 나눴던 터라 바로 주문만 하면 되었다. 곧바로 주문을 마치고 계산하려는데, 지갑을 꺼내보니 카드가 없다. 순간 당황해 이리저리 품을 뒤적여 봤지만, 역시 카드는 없었다.
방금 표를 계산할 때만 해도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 갔지?
혹시 매표소에 두고 왔나 싶어 그쪽으로 가려는데, 김세현이 날 붙잡더니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것도 몹시 눈에 익은 카드를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예매 후 김세현이 표와 카들 챙겼었지.
카드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덕분인지 안도감이 온몸을 감싼다. 긴장이 풀린 채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받는데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김세현을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안 웃을게요.”
“좋은 생각이에요.”
김세현과 단둘이 있는 상황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서 그런지 놀림당하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웃음을 참는 이를 보며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게 보였다.
“주문하신 팝콘과 음료 나왔습니다.”
한 마디 해주려 했는데, 하필 이때 음식이 나올 건 뭘까.
내가 뭐라고 할 거라 예상이라도 했는지 김세현이 재빠르게 먹거리를 챙긴다. 뒤따라 팝콘을 챙기고는 말했다.
“얼른 가요.”
“좋아요.”
마치 내가 이 말만을 꺼내길 기다렸던 것처럼 냉큼 답변하는데, 그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난다. 내가 웃자 덩달아 웃으며 김세현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
아무래도 카드를 본인이 챙긴 것을 지적받을까 싶었나 보다. 딱히 지적할 마음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김세현과 함께 상영관에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
곧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일까, 상영관 앞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다. 어김없이 김세현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그와 함께 구석진 곳으로 가 기다리려는데, 때마침 상영관 문이 열렸다.
“가서 줄 서면 되죠?”
사람들이 줄을 서는 걸 지켜보던 김세현이 턱으로 그쪽을 가리킨다. 나는 고갤 주억였다.
“네.”
내가 먼저 발을 떼자 김세현이 걸음을 맞춰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줄 쪽을 바라보는데, 김세현이 말을 걸어왔다.
“형이랑 영화관에서 영화 볼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저도요.”
오래간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보는 것이었지만, 그보단 김세현과 함께 영화를 본다는 사실이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부푼 마음을 안고 줄이 사라지길 기다린 지도 잠시, 이윽고 나와 김세현이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함께 표를 확인받고 상영관에 들어서자 익숙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돈을 아끼고 아껴 영화관을 찾곤 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영화를 보러 올 시간이 없었다. 물론, 다른 이유로 말미암아 외출하는 게 쉽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점차 커지는 설렘을 느끼며 김세현 쪽으로 고갤 돌렸다.
“생각했던 것보단 작네요.”
잠시 내부를 둘러보던 김세현이 날 보며 소감을 밝힌다. 의외의 말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김세현은 곧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걸 보면 제법 규모가 있어 보였는데 말이죠. 뭐, 그래도 집에서 보는 것보단 여기서 보는 것도 색다르고 좋을 거 같긴 하네요.”
“…하하.”
하긴, 김세현은 직접 영화 제작사로 연락해 방영 중인 영화를 집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긴 했다. OTT로도 풀리지 않았던 영화를 함께 보았던 사실이 떠올라 웃음을 터뜨리자 김세현이 따라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표에 적힌 자리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는데, 김세현이 두 다릴 꼬아 앉으며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앞자리라 잘 안 보일 수도 있다는 거치곤 자리는 편하네요.”
“다행이에요.”
김세현이 저렇게 말하는 이윤 앉은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독보적인 다리 길이를 보며 고갤 끄덕이는데, 김세현이 들고 있던 음료를 내게 건넸다.
“영화 중간에 팝콘 사러 가거나 하면 민폐겠죠?”
“민폐까진 아니지만, 이목이 쏠릴 거예요.”
맨 앞자리이기도 하고, 또 키도 워낙 큰지라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내 말을 들은 김세현이 팝콘 통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더니 이윽고 그 통을 내밀었다.
“팝콘이랑 음료 좀 더 사 올게요.”
“그럼 카드 가지고 가요.”
워낙 대식가인지라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먹거리들을 잠깐 바닥에 내려놓은 뒤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이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자 김세현의 얼굴에 미소가 자리했다.
“그럼 팝콘 하나랑 음료 하나 더 사 올게요.”
“네.”
좀 더 살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선택이다. 의외라고 생각하며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그대로 상영관을 나섰다.
“…양이 적긴 하네.”
평소 김세현이 먹는 양을 생각해 보면 방금 산 주전부리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보는 눈이 있어 자제했다고 여겼겠지만, 김세현은 아니었다. 아마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정말 최소한만 주문했던 것일 터.
“…….”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고 있을 김세현을 떠올리니 이보다 더 미안할 수가 없다. 상영관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김세현을 기다리는데, 영화관 직원들이 상영관 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직원들이 저렇게 움직인다는 건 이제 곧 영화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기왕 보는 거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보고 싶은데, 왜 이리 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초조함에 계속해서 입장하는 문 쪽을 지켜볼 때였다. 기다리던 이의 얼굴이 보임과 동시에 스크린에 영상이 뜨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형, 왜 그렇게 한숨 쉬어요?”
자리로 돌아온 김세현이 의아한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나는 나갈 때 했던 말과는 다르게 커다란 팝콘 하나와 음료 하나씩 더 사 온 이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늦으면 어쩌나 했어요.”
“길이라도 잃어버릴까 걱정했어요?”
그건 아니지만, 걱정한 건 맞았다. 점차 조용해지는 영화관 내부에 대답 대신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미소 지으며 스크린 쪽으로 턱짓했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네요. 영화부터 봐요.”
주변이 조용해지고 있는 걸 인지했는지 김세현의 목소리도 제법 줄어들었다. 그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스크린을 보는데, 주의사항 영상이 끝났는지 스크린엔 CF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매번 바뀌는 CF이긴 하지만 이렇게 큰 화면으로 보려니 기분이 참 묘하다. 그렇게 흘러가는 광고들을 보는데,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나오는 불법 복제물과 관련된 캠페인 영상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불법 복제물을 보지도, 다운받지도 말자는 캠페인의 내용과 함께 유명 인사들이 나와 한마디씩 거든다. 연예인부터 시작해 정계의 내로라하는 이들이 나와 이야기하는 걸 지켜보던 와중이었다. 영화가 시작되길 바라며 영상을 보는데 돌연 무언가가 내 시야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