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39)화 (239/246)

236화

25. 생각지도 못한

“…하아.”

계속해서 날 보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지, 어쩌면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커트 중이라 그를 담당한 이가 나와 김세현 사이에 끼어든 상황인지라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데 그래? 애인 생겼으면 형한테 바로바로 알렸어야지!

“전화도 안 가지고 갔으면서 뭘 말하라는 건데.”

애인 유무를 알리고 알리지 않고를 떠나 연락할 방도라곤 편지밖에 없는데, 뭘 어떡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퉁명스럽게 답하자 기석이 녀석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짠가 보네. 혹시 나도 만나 볼 수 있어?

“그건, 안 돼.”

만에 하나 내가 정말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기석이 녀석을 벌써 보여 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훤했다. 날 띄워 주려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말실수를 할 게 뻔했으니까.

그런 녀석에게 김세현을 보여 준다?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나 참. 그렇게 바로 싫다고 할 만큼 예뻐? 설마 너, 내가 반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지?

“…….”

앞서 말한 이유뿐만이 아니라 기석이 녀석은 내가 김세현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잘 아는 녀석이었다. 한 마디로 TV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한 김세현을 그 누구보다 바로 알아차릴 사람이 기석이 녀석이라는 말이었다.

닮은 사람이라고 속인다고 한들 잠깐은 속겠지만, 바로 알아차릴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야단법석을 떨며 주변의 시선을 끌어 모으겠지.

더군다나 기석이 녀석은 예전에도 한 번 김세현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래, 녀석이 오래간만에 휴가를 나왔을 때 김세현이 우리 집 근처에 볼일이 있다며 왔던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이제는 그 볼일이 카메라를 설치하러 온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때만 해도 김세현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는데, 이번엔 속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그저 비슷한 사람이라고 우겨도 말이다.

여기서 선을 제대로 그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래야 녀석의 관심이 사라질 것 같으니까.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그건 아니고. 게다가 애인도 아니야.”

-썸 타는 중이라면야. 나중에 잘 되면 꼭 소개해 주는 거다, 알았지?

“응.”

김세현과 잘 된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전 없이 지금처럼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건 또 무슨 마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들리는 김세현의 목소리에 그 생각은 금세 뒷전으로 밀려났다.

“형, 나 다 끝났어요.”

머리 손질을 마친 김세현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다가온다. 이미 잘생겼지만, 스타일링한 김세현은 정말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얼굴에서 빛이 났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기석이 녀석의 기가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엉? 너 설마 연하 만나?

반 박자 늦게 반응한 기석의 녀석의 목소리가 한층 올라간다. 이럴 때의 녀석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대로 전화를 이어 간다면 집요하게 상황을 묻고 또 물어볼 게 뻔했으니까. 나는 빠르게 인사를 건넸다.

“이따 전화해. 끊는다!”

-아니, 연하늘. 잠깐.

뭔가 말을 더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말을 듣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형, 전화 오는데요?”

“스팸이에요.”

그래, 기석이 녀석이 전화했을 게 뻔했기에 확인하지 않아도 스팸이었다.

“풉.”

너무도 단호하게 답했기 때문일까, 날 빤히 보던 김세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스팸 전화라고 쳐요.”

“하아.”

역시, 내 행동이 너무 빤히 보였나 보다. 김세현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작게 한숨을 뱉는데, 이어진 그의 말은 심장을 철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형,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요? 난 연하라서 형 말 잘 따르는 그거밖에 못 하겠네.”

“…들렸어요?”

“주변이 조용해서 그런지 너무 잘 들리던데요?”

아니길 바랐지만, 역시 들렸나 보다. 어느새 짓궂은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운 그가 다가와서는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내게 어디로 가냐 묻던 것과는 달리 김세현은 숍 출입구 쪽으로 정확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힘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이동하자 곧바로 김세현이 품에서 카드를 꺼낸다. 덩달아 계산하려 카드를 꺼내는데, 김세현이 먼저 내 몫까지 결제를 마쳤다. 반쯤 혼이 나간 상태에서 그가 결제하는 모습을 보다가 순간 놀라 김세현을 불렀다.

“그렇게 바로 결제해 버리면 어떡해요.”

유명세에 비해 가격은 저렴한 편이었지만, 라테에 이어 그가 계산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형이 영화 사면 되죠.”

“그래도요.”

당연히 그것도 내가 계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영화를 제외한 모든 걸 김세현이 결제하게 두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한 번 더 결제를 번복하려는데, 김세현이 뒷말을 이었다.

“형이 영화 내고 저녁거리 사 들고 집에 가서 같이 만들어 먹으면 딱 맞겠다. 얼른 가요. 영화표 예매해야죠.”

“…좋아요.”

김세현의 말을 들으니 여기서 더 머뭇거리는 건 좀 그랬다. 이미 김세현이 결제를 한 마당에 내가 주저한다면 그의 면이 살지 않을 테니까.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역시 이 대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와 함께 숍을 나와 바로 차로 이동했다.

“형, 잠깐만요.”

“네.”

차에 타려는데 김세현이 날 불러세운다. 무슨 일일까 싶어 그를 바라보는데, 그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닌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형, 고개 옆으로 해 봐요. 머리카락 붙은 게 있네.”

열심히 털었음에도 머리카락이 몇 개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김세현이 가리키는 방향 쪽으로 고갤 기울이자 그가 고갤 기울이며 거리를 좁혀 왔다.

“후우.”

“읏!”

손으로 털어 주는 줄 알았건만, 김세현의 행동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순간 목덜미에 쏟아진 뜨거운 숨에 흠칫하며 다급히 그곳을 가리자 김세현이 그 손을 떼어 냈다.

“아직 머리카락 안 떨어졌어요.”

“손으로 떼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한 번 더 불어 보고요.”

“…….”

한 번 더 불 정도면 내가 말한 것처럼 손으로 털어 내는 게 더 빨랐다. 하지만 내 손을 붙잡은 김세현의 손에서 좀처럼 힘이 빠지지 않는다. 나는 결국 한 번 더 김세현이 목에 바람을 부는 것을 그대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형 말처럼 그냥 손으로 떼어 낼 걸 그랬나 봐요. 잠시만요.”

한 번 더 불었음에도 머리카락이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내 손을 놓은 김세현이 이번엔 목덜미로 손을 가져간다.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김세현의 그 행동이 너무도 느리게, 그리고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건 따로 있었다.

김세현의 손이 닿자 그 부위가 이상하게도 뜨겁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버튼이라도 되는지 그곳에서부터 번져 가는 소름이 삽시간에 온몸을 뒤덮는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소름이 이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질 순 없었다. 반사적으로 부르르 떨리는 몸을 느끼며 목을 움츠렸을 때였다.

“형, 하나 더 떼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김세현의 말을 따르지 않고 그냥 머리를 감을 걸 그랬나 보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보단 머리카락이 덜 묻어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얼른요.”

“그냥 차에서 제가 거울 보면서 뗄게요.”

“지금 바로 떼 내면 되잖아요.”

김세현의 목소리가 어째 조금 낮아진 것만 같다. 설마 하며 그를 본 순간, 내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게 바로 이걸 말하는 걸 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세현이 일부러 시간을 끌어 보려고 했단 걸 바로 알아채자 이보다 배신감이 크게 느껴질 순 없었다.

“아니, 진짜 머리카락 묻어 있다니까요?”

“확인부터 해야겠어요.”

“형, 나 못 믿어요?”

“…….”

항상 그를 믿지만, 지금은 못 믿겠다.

다급히 표정을 수습했다고는 하나 조금 전 내가 본 얼굴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잔뜩 습해진 시선 하며, 거친 숨을 애써 참아 내는 그것 하며.

그 정도만 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김세현의 입이 문제였다. 마치 목이 타기라도 했는지 연신 아랫입술을 혀로 적시는 모습은 쉬이 넘길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지금 짓는 김세현의 표정은 누가 봐도 지금 내 목에 머리카락이 없단 걸 알려 주고 있었다.

“형, 그냥 좀 만지면 안 돼요? 아까 머리 자르는 사람은 만져도 가만히 있던데!”

“그건 불가피한 상황이었잖아요.”

머리를 자르며 각도를 조정하느라 터치하는 게 뭐가 속상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헛웃음을 터뜨리는데, 그런 나완 달리 김세현은 잔뜩 성이 난 표정을 지었다.

“난 내 머리 자르는 사람한테 터치 못하게 했거든요?”

“…아.”

디자이너가 집중해 머리를 자르던 이유가 설마 그것이었던 걸까. 그저 김세현의 용모가 빼어나 오래간만에 예술의 혼이 불타오르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김세현이 터치하지 못하게 하자 조심히 잘랐던 모양이었다.

숍 안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한 번 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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