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37)화 (237/246)

234화

25. 생각지도 못한

“영화관에서 보기로 했잖아요.”

제아무리 김세현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그에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둘이 영화를 본다는 점은 제법 끌렸지만, 이렇게 나왔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쉬웠다.

“형도 알다시피 집에서도 영화관처럼 볼 수 있어요.”

단호한 대답 때문일까, 김세현이 한 번 더 집에서 영활 볼 수 있다며 어필한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왔는데, 영화관에서 보면 더 좋죠.”

김세현의 집에 설치된 기기들의 성능이 떨어진다거나 해서 영화관에서 보자는 건 아니었다. 그래, 김세현의 말처럼 그의 집에는 방 한 칸이 전부 영화를 볼 수 있게끔 꾸며진 터라 몰입도를 따지고 본다면 오히려 집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분이라는 게 있었다.

사무실에서, 혹은 집에서만 보던 김세현과 함께 외출했단 건 사람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었다. 김세현은 그저 머리를 자르고,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정도로만 여길지 몰라도 내게 이 외출은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함께 숍에 갔다가 영화를 보고, 또 드라이브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루트는 누가 봐도 데이트 코스였다. 물론, 중간에 숍이 끼어있어 일반적인 데이트 느낌은 아니었지만, 함께하는 사람이 중요했다.

“혀엉.”

“그래도 안 돼요. 영화관에서 봐요.”

여기서 물러선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다. 나홀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는 모를 일이었으니까. 한 번 더 단호히 말하자 김세현의 눈매가 아래로 쳐졌다.

“난 형이랑 단둘이 있는 게 좋은데. 형은 아니었어요?”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왜 사람이 득실득실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겠다는 건데요.”

“…….”

하필 왜 그 부분을 다시 묻는 건지 모르겠다. 부끄러운 마음이 차올라 머뭇거리는데, 김세현의 표정이 더욱 울적하게 변했다.

“나랑만 있는 게 부담스러워서 사람들이 드글드글한 곳에서 봐야 마음이 놓인다, 뭐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절대로요.”

김세현과 함께하는 시간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또 설렜고.

가끔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건 김세현이 너무 과해서 그런 것일 뿐이었다.

“그러면 왜 안 된다는 건데요!”

역시 내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맞잡고 있던 손을 꽉 잡은 김세현이 얼굴을 들이밀며 어서 답하라는 듯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날을 세울수록 가까워지는 거리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말 안하면 이러고 계속 있을 거니까 그런 줄 알아요.”

“아….”

하필 가장 곤란하게 여기는 부분을 이렇게 파고들 줄은 미처 몰랐다. 난감함에 이리저리 눈을 움직이는데, 조금 전보다 훨씬 많은 시선들이 이쪽을 향해 있단 게 보였다.

여기서 더 이목이 쏠리게 된다면 난처해지는 건 내가 아닌 김세현이었다. 이미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상황인데,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접근한다면 오늘 일정은 여기서 완전히 쫑이 나 버릴 거다.

“그냥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 이거죠?”

지금은 김세현을 다독이는 게 급선무다. 어느새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이를 보며 천천히 말을 뱉었다.

“집도 좋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게 오래간만이라 그래요.”

“그것만이 아닌 거 같은데?”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려고 했건만, 눈치도 빠르다. 입가를 비뚜름하게 끌어올리며 어서 말하라 종용하는 모습을 보자니 웬만한 말 가지곤 그를 진정시키기 어려울 듯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속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데이트하는 게 이런 건가 싶어서요.”

“…….”

“세현 씨랑 같이 그 비슷한 걸 하고 있으려니 좀 더 욕심이 나고 그래서,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거 해 보고 싶어서요.”

속내를 밝혔건만, 김세현은 도통 반응이 없다. 아니지, 으르렁거리던 걸 멈추긴 했다. 그저 뚫어져라 날 바라볼 뿐인 김세현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을 때였다. 돌연 김세현이 상체를 뒤로 물리더니 남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세현 씨?”

“…….”

잠시 다른 곳을 보던 김세현이 내 부름에 눈을 마주하는가 싶더니 다시 다른 곳을 응시한다. 밀어붙일 땐 언제고 갑자기 다른 반응을 보이니 어째서 저러는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는다. 혹여 일말의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진 않을까 싶어 말없이 그를 살피는데, 순간 눈에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들어왔다.

“아….”

설마 조금 전 내 말을 듣고 부끄러워지기라도 한 걸까?

그간 얼굴색 한 번 변한 적 있나 싶은 김세현의 귓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가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때마침 음료가 나왔다는 직원의 안내가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맞잡고 있던 손을 잡아끌었다.

“음료 챙겨서 얼른 가요.”

끄덕.

내 말을 들은 김세현이 고갤 끄덕이더니 뒤따라 일어난다. 하지만 입가를 가린 손과 날 바라보지 않는 시선은 여전했다.

역시, 반응을 보건대 많이 부끄럽거나 민망했던 모양이다.

지금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항상 사람을 기대게 만들던 김세현의 존재감이 무척 조그맣게 느껴졌다. …한 마디로 귀엽단 말이었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며 음료를 챙겨 다시 차 앞에 도착할 때까지 김세현은 그저 묵묵히 나를 따를 뿐이었다. 아쉬웠지만 슬슬 차에 타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피니 아직은 김세현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나는 음료 캐리어를 든 손으로 차를 가리켰다.

“이제 차에 타요.”

끄덕.

카페도 나왔으니 슬슬 말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김세현은 여전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맞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자 김세현도 내 손을 놓더니 곧바로 조수석 문을 연다. 차에 올라 자리를 잡자 김세현이 곧바로 문을 닫더니 운전석으로 이동해 차에 탔다.

“…….”

건네 준 음료를 빨대로 저을 뿐인 김세현을 보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하긴, 평소 이렇게 조용한 김세현을 보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어째서 김세현이 날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본 건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시선이 얼굴에 머물수록 미세하지만 다채롭게 변하는 표정이 보였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김세현을 바라보는데, 드디어 그가 입을 뗐다.

“형, 인제 그만 보면 안 돼요?”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완 달리 몹시도 작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부끄러웠는지 빨개졌던 귀에 이어 목까지 붉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뿐이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이보다 더 심금을 울릴 순 없었다. 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답했다.

“왜요. 세현 씨도 항상 이렇게 봤잖아요.”

“…민망해서 그래요.”

“하하.”

민망하단 말을 듣자마자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마음 같아선 아주 큰 소리로 웃고 싶지만, 이 이상 주변의 이목을 끌 순 없었다. 차 안에 있음에도 주차장을 오가는 이들 몇몇이 이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더 크게 웃는다면 더 많은 시선이 쏠릴 터. 애써 소리 죽여 웃는데, 그 모습이 김세현에겐 놀리는 것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나는 점차 불퉁해지는 표정을 보며 한 번 더 폭소하고 싶은 마음을 내리눌렀다.

“하, 날 이렇게 놀리는 것도 형이 처음인 거 알아요?”

“처음이라 좋네요.”

“하늘 형이니까 봐주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놀리는 낌새가 보이는 순간 바로 치워 버렸을 거라고요.”

“그래요, 그래요.”

딴에는 웃지 말라며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민망하단 말이 계속 뇌리에 남아 있어 그런지 몰라도 저 으르렁거림 또한 귀여웠다. 항상 거대하게만 느껴지던 김세현이 제 나이 또래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뭐, 그래도 형이 웃으니 좋긴 하다! 하늘 형은 그렇게 웃어요. 웃는 게 예쁘니까.”

“…예쁜 게 아니라 멋지다고 해 줄래요?”

날 예쁘다고 표현하는 건 동네 어르신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로 말을 정정하자 날 뚫어져라 보던 김세현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풉, 알았어요. 멋져요, 멋져.”

“네.”

“그건 그렇고 하늘 형.”

“네, 세현 씨.”

날 부른 김세현이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한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모습에 가만히 기다리자 김세현이 작게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꺼냈다.

“우리 오늘은 확실하게 데이트 코스 밟아요.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도 하고. 호텔 가서 저녁도 먹고. 내가 바로 룸 잡을 테니…. 아니지, 저녁 먹고 바로 집으로 가요. 잠들 때까지 한 번 코스 밟아 봐요.”

룸을 잡는다고 말하던 김세현이 빠르게 말을 정정한다.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집으로 간다니 이보다 다행일 수가 없다. 아니지, 잠들 때까지 코스를 밟자는 말을 들으니 괜히 긴장된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노력하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요.”

“일단 데이트하는 거니까…. 오늘은 계속 손잡고 움직여요.”

“으음.”

손을 잡고 다니는 거야 요동치는 심장만 바로 잡는다면 문제 될 것 없었다. 하지만 괜히 주저하게 된다. 혹여 김세현을 알아본 이들로 인해 괜한 소동이 벌어지진 않을까 걱정하는데, 김세현은 그런 내 모습을 다르게 이해한 듯했다.

“데이트라면서요!”

“세현 씨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요.”

“알아보면 뭐 어때요. 아니지, 혹시 나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형한테 피해가 가는 건가?”

“그게 아니고, 저야 일반인이지만 세현 씨는 아니잖아요. 괜히 시끄러워질까 싶어서 그래요.”

지금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김세현이었다. 날 기준 삼아 말하는 이에 바로 말을 정정해 주자 김세현이 뚫어져라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사람들 이목이 쏠리면 형 많이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요. …안 되겠다. 마음 같아선 계속 손잡고 다니고 싶은데, 다들 안 볼 때만 잡고 있는 걸로 해요.”

고민하는 듯싶던 김세현이 절충안을 내놓는다. 하긴, 김세현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안 볼 때 손을 잡고 있다면 문제 될 건 없을 듯했다. 만에 하나 김세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나와 김세현은 그저 친한 지인 정도로만 보일 테니 말이다.

…한 마디로 데이트 코스를 밟고 있다는 건 인지하지 못할 터.

나는 바로 고갤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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