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25. 생각지도 못한
식사가 끝나고 외출할 준비까지 마쳤음에도 숍에 예약한 시간이 되기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먼저 영화를 보기에도 애매한 상황인지라 고민하는데, 김세현이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형, 우리 장 보러 갈래요?”
“장이요?”
“아침에 형 냉장고 다 턴 거 같은데, 채워놔야죠.”
“아….”
그저 먹는 데 집중한 줄 알았는데, 내 냉장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김세현의 말마따나 장을 봐야 하긴 했다. 최근 집으로 배달오는 모든 걸 거절한 바람에 먹거리조차 제대로 장을 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방금 전 김세현과의 아침을 준비하며 식재료를 거의 다 소진한 상황이었다. 혼자 움직이는 게 좋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나중에 부팀장에게 부탁해 함께 장을 볼까 했는데, 잘됐다.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뒤따라 몸을 일으키자 김세현이 어서 나가자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
“형, 이번에 무거운 거 살 거 있으면 뭐든 말해요. 내가 다 들어 줄 테니까.”
“그래요.”
너무 무겁다면 마트에 배달을 부탁하면 될 터였다. 물론, 그 전에 집 상황을 설명하며 미리 연락하란 말은 해 둬야겠지만 말이다. 고갤 끄덕이며 답하는데, 그게 성의 없어 보였는지 김세현이 걸어가다 말고 날 바라보았다.
“진짜라니까요?”
“하하, 네.”
김세현이 대단한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웃으며 한 번 더 답하자 내 모습을 훑어보던 김세현이 이내 표정을 풀고는 다시 현관으로 향한다. 함께 밖으로 나와서는 하늘을 보자 거실 창밖으로 보던 것보다 더 날이 화창했다.
“오늘은 날도 좋으니 드라이브도 할까요?”
“저야 좋죠.”
“그럼 일단은 장부터 보고 우리 집으로 가서 차 타고 이동해요. 뭐, 굳이 차가 없어도 드라이브야 내가 시켜 줄 수 있지만.”
“차로 이동해요.”
날 안고 이동하겠다는 듯 팔꿈치를 몸에 붙이곤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여기서 바로 고갤 끄덕이며 물러서지 않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김세현이 날 들어 올릴 게 분명했다.
내가 바로 거절하자 조금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손을 내리며 씩 웃는다. 미련 따윈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니 끈질기게 달라붙진 않을 듯했다.
함께 동네 마트로 향하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길가가 한산하다. 덕분에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오래간만의 외출을 만끽하는데, 김세현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오래간만에 외출하는 거니까요.”
오래간만에 산보하는 것도 좋았고,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좋았다. 이 모든 걸 김세현과 함께한다는 사실 또한 좋았고 말이다. 내 말을 들은 김세현이 다시 몸을 바로 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이 사는 동네는 진짜 조용하네요.”
“그쵸? 조용하기도 하고, 사람들도 좋아서 정말 살기 좋은 동네예요.”
“그래요?”
“네.”
평소엔 조용해도 서로 도울 일이 있거나 할 땐 활기가 넘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나도 조용한 게 좋은데. 형이랑 나랑 공통점도 제법 되는 거 같네요.”
“그러게요.”
공통점이라고 하니 그간 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나 싶다. 김세현이 좋아하는 걸 하나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좋아하는데 그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형은 음식 뭐 좋아해요?”
“딱히 가리는 건 없어요. 다행히 음식 알레르기도 없고요.”
“그것도 나랑 같네요. 우리 진짜 잘 맞는 거 같지 않아요?”
“하하.”
김세현을 아는 사람이라면 음식을 가린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거다. 나와 공통점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이 반가운지 김세현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어오른다. 덩달아 웃자 그가 재차 질문해왔다.
“형은 평소 시간 남을 때 뭐해요?”
“그냥 집안일 하고 TV 봐요. 가끔 뉴스 볼 거 있으면 뉴스 찾아보고요.”
“오, 나도 TV 자주 보는데! 그럼 형, 뭘 자주 봐요?”
“드라마나 예능 위주로 보는데, 세현 씨는요?”
“그것도 나랑 같네!”
공통점을 찾는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의외로 김세현과 난 맞는 부분이 많았다. 신나게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마트에 도착했다.
“오, 나 이거 끌어보고 싶었는데.”
김세현이 마트 한쪽에 놓인 카트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날 바라본다. 마음먹고 장을 보기로 한 만큼 카트가 필요하긴 했다.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곧바로 카트를 끌고는 내 곁으로 와 섰다.
“얼른 장 보러 들어가요.”
장을 보는 게 신이 났는지 김세현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몹시도 기대하는 모습에 바로 발걸음을 떼자 김세현이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카트를 끌기 시작했다. 함께 장을 본다는 생각에 설레던 것도 잠시, 생각지도 못한 김세현의 폭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형, 이건 어때요?”
“이것도 맛있겠네!”
“…….”
다음에 또 장을 보려면 텀이 제법 될 듯하여 되도록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 위주로 사려 했건만…. 그런 내 계획과 달리 김세현은 보이는 족족 카트에 담기 바빴다. 잔뜩 신이 난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마트 하날 거덜 낼 분위기다. 김세현 재력이라면 그러고도 남아 문제였다. 나는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이렇게 많이는 못 사요.”
“나도 먹을 건데 듬뿍 사 둬야죠!”
“…네?”
“…뭐야, 나랑 자주 밥 안 먹을 거예요?”
질문한 건 난데, 어째서 김세현이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날 보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
이걸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까.
뭐든 내게 허락을 받겠다고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제멋대로 구는 걸까.
벌써 이렇게 폭주하듯 원하는 바를 말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한편으론 저런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김세현은 정말 만족스럽게 식사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먹을 때마다 맛있다고 말했었으니까.
“아니, 물론 형한테 허락은 받고 가야겠지만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잔뜩 신이 나 떠들던 김세현이 슬그머니 꼬리를 만다. 그리고는 눈치를 살피는데, 그런 와중에도 함께 식사하고 싶단 의지는 꺾인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눈을 마주할수록 그의 표정이 점차 시무룩해진다. 처량한 표정과는 달리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입 밖으로 웃음이 새어나가려 한다. 애써 분위기를 잡아보려 했지만, 조금 더 쳐진 눈매를 보니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짬이 나면요.”
함께 집에서 누군가와 식사하는 건 오래간만이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허락을 들은 김세현의 얼굴이 맑게 개는가 싶더니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음식들을 카트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건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폭주할 필요가 있나 싶다. 당황해 황급히 그를 뜯어말리며 방금 카트에 넣은 음식들을 자리로 돌려놓았다.
“왜요!”
“오늘은 적당히 사야 해요.”
그래, 여기서 오버하게 된다면 내 잔고가 몹시도 위험했다. 영화표도 사고 영화관에서 먹을 주전부리도 사야 했으니까.
“…알았어요.”
단호한 내 어조 때문일까, 김세현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하더니 집어 들었던 먹거리들을 다시 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한다. 풀죽은 뒷모습이 마음 쓰였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카트를 끌고 처음 먹거리를 집던 코너로 간 김세현이 다시 음식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다가와 선다. 나는 카트 안을 살피곤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형이 고른 건 다 기억하거든요?”
“…하하.”
자기가 집은 걸 기억하나 싶어 놀랐는데, 반대로 내가 고른 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자 김세현이 내 등을 떠밀었다.
“얼른 골라요. 우리 드라이브도 하기로 했잖아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 좀처럼 먹거리에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김세현은 어서 장을 보잔 말을 꺼냈다.
“알았어요.”
김세현의 폭주 이후 장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중간중간 너무 부실하게 먹는 거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들려왔지만, 이 정도라면 한동안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장을 다 보고 계산대로 향하는데 뒤늦게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형, 좀 더 영양가 있는 걸로 먹어야 몸이 버티죠.”
“매번 조금 무리했다고 지치고.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형이 자꾸 지쳐서 내가 얼마나 불만인지 알아요? 난 너끈히 밤도 샐 수 있는데!”
“안 되겠어요. 오늘은 내가 몸보신 제대로 해 줄 테니까 우리 분발해 봐요.”
“…….”
김세현의 잔소리가 이어지면 질수록 주변에서 보내오는 시선이 묘하다. 뭔가 수군거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 생각은 김세현이 날 부름과 동시에 바로 사라졌다.
“형, 듣고 있어요?”
방긋 웃는 얼굴로 김세현이 날 바라본다. 저 미소를 보니 어째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던 것인지 조금은 알 듯했다.
“…듣고 있어요.”
하긴, 김세현만큼 잘생긴 이가 이 동네에 없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계산을 마치곤 봉지를 쥐려는데, 김세현이 곧바로 그걸 인터셉트해 갔다.
“평소에도 무리하지 말고요. 계속 무리했으니까 한동안은 내가 전부 할게요.”
무리해 봤자 최근 벌어졌던 세계헌터협회 측의 망언으로 말미암아 자료 정리를 하는 것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챙겨 주니 나야 좋았다. 고갤 끄덕이며 김세현 곁에 가 서자 그가 웃으며 걸음을 옮긴다. 나는 양손 가득 봉투를 든 그와 함께 다시 집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