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부 공무원의 비애 (232)화 (232/246)

229화

25. 생각지도 못한

“하아.”

날 뚫어져라 바라보던 김세현이 깊은 한숨을 뱉더니 이내 내 머리에 얼굴을 기댄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놀란 나머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데, 김세현이 불만 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인내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요?”

“…몰라요.”

“모르면 지금부터라도 잘 알고 있어요. 나 진짜 형이랑 한 약속 때문에 참고 또 참는 거니까.”

참는다고 하며 조금 강하게 내 머리에 얼굴을 몇 차례 비빈 김세현이 다시금 몸을 바로 해 앉는다. 따갑기만 한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는 게 느껴졌지만, 방금 전 행동 때문인지 심장이 가쁘게 뛴다.

김세현과 거리가 가까웠기에 내 심장이 얼마나 뛰고 있는지 김세현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영화로 다시 시선을 주었으나 이미 내 집중력은 완전히 흐트러진 상태였다.

그렇게 김세현을 의식하면서도 의식하지 않는 척하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다 보니 어느새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전 영화와는 달리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쿠키영상 안 봐요?”

“딱히 끌리지 않아서요.”

끌리지 않다기보다는 영화 초중반부터 김세현을 의식하느라 뒷부분은 아예 기억조차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쿠키 영상을 본다고 한들 내게 남는 건 없었다.

“그럼 나도 여기까지만 봐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올려다보던 김세현이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크게 기지개를 켜는 김세현을 보는데, 그가 하늘 위로 뻗었던 양손을 내리며 입을 뗐다.

“우리 얼른 자요.”

“좋아요. 내일 머리 자르고 영화관도 가고, 이것저것 하려면 눈 좀 붙여야죠.”

조금 전 영화를 볼 때 있었던 일은 잊었는지 김세현은 무척이나 담백하게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뒷정리를 한 뒤 양치를 하고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이렇게 같이 자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그러게요.”

“앞으론 종종 이렇게 같이 시간 보내요. 형이 시간 빼 주면 난 언제든 시간 낼 수 있으니까.”

“…하하.”

항상 회사와 집만 오가는 나보단 김세현의 스케줄이 더 빡빡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말을 하니 마치 내가 더 바쁜 사람인 것만 같다. 헛웃음을 흘리자 천장을 보고 있던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농담 같아요?”

“아뇨. 기분 좋아서요.”

말 한마디에 사람 기분이 오락가락한다고는 하나 항상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힘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매번 김세현은 말을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말로 인해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 일들까지도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전부 김세현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터였다.

기분이 좋단 내 대답을 들은 김세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뒷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제 기분 맞춰 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더더욱 이러지 않아도 되고요. 방금 한 말로 세현 씨 마음은 확실하게 전달되었으니까.”

지금이야 둘이 있어서 농담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김세현이 계속 이렇게 내게 맞춰 주고 있다는 걸 티 내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 이미 김세현이 내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는 건 팀원들도 잘 알고 있었으니 굳이 이럴 필욘 없었다.

“왜요?”

이어진 말이 의외였는지 김세현이 날 뚫어져라 바라본다. 나는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모르는 사람이 지금 같은 모습을 보고 만만하게 볼까봐요. 세현 씨는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신보다 능력이 좋은 이를 끌어내리려 안달이었다. S급 헌터 중에서도 최고라고 볼 수 있는 김세현이 저자세인 모습을 본다면 백이면 백 그를 만만하게 볼 터였다. 그런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너무 늦게 이런 말을 하는 거 같네요. 그간 매번 저한테 맞춰 주기만 했잖아요.”

말을 뱉으니 그간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이 났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매번 단편적인 모습만 보려 하는 버릇도 고치긴 해야 할 텐데….

“하늘 형.”

“네, 세현 씨.”

약간의 텀을 두고 이어진 내 말을 경청하던 김세현이 날 부른다. 곧바로 답하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집안이 정적으로 가득 찬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간 들은 적 없는 낮은 목소리가 김세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매번 날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만나서 그런가? 형이 이렇게 마음을 표현해 줄 때마다 벅차는 거 알아요?”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그저 내 뒤늦은 깨달음을 말했을 뿐인데,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 당혹감에 바로 답하며 그가 누운 쪽으로 돌아눕자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형한텐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나한텐 정말 큰 의미라고요. 그래서 더 형이 좋고.”

“…으음.”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당황하는 모습도 귀엽고요.”

“그건 좀.”

다 큰 어른에게 귀엽다고 말하는 건 역시 이상했다. 정색하며 바로 답하자 조금 전보다 훨씬 커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런 행동 하는 것도 귀여워요.”

“귀엽다는 말은 좀 그래요.”

연하에게 귀엽다는 말을 듣는 건 좀 민망했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하자 김세현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럼 멋있다고 정정할게요.”

“…그래요.”

“풉! 앞으론 귀엽다고 하지 않고 멋있다고 하면 되죠?”

귀엽다는 말 대신 멋있다는 말을 쓴다, 라.

저 말도 자주 들으면 민망할 것 같았지만, 적어도 귀엽다란 표현보다는 훨씬 나은 듯했다. 대답 대신 고갤 주억이자 김세현이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천장을 바라보며 눕는다. 덩달아 몸을 돌려 정자세로 눕자 아직도 켜진 TV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 형.”

“네.”

“우리 내일 영화는 뭐 보죠? 주말이라 가서 예매하기엔 자리가 좀처럼 나지 않을 거 같은데.”

“요즘 나온 영화는 전부 액션 영화던데. 다들 평이 좋아서 아무거나 봐도 괜찮을 거 같아요.”

유독 평점이 높은 영화가 있다면 그걸 봤겠지만, 모든 작품이 호평을 받는지라 고르는 건 무의미했다. 게다가 스토리도 모두 흥미를 끌었기에 아무 거나 봐도 문제될 건 없는 듯했다.

“그럼 19금으로 봐야겠다!”

19금을 거론하는 김세현의 얼굴 가득 장난기가 넘친다. 만에 하나 정말 19금 영화가 있었다면 또 모를까, 이미 난 개봉한 영화 전부를 둘러본 상황이었다. 나는 그런 김세현과 눈을 마주하며 피식 웃었다.

“아쉽지만 전부 15금이에요.”

“…하여간 도와주질 않지.”

영화 등급이 뭘 도와준다고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말을 뱉는 김세현의 표정에 어린 아쉬움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려 한다. 결국 웃음을 터뜨리자 유심히 날 바라보던 김세현의 입가에도 다시금 미소가 번졌다.

“그럼 그냥 가서 좌석 남는 영화로 볼까요? 머리 자르고 점심도 먹고 하다 보면 얼마나 시간이 딜레이될 지도 모르고.”

“좋아요.”

“일요일도 있으니 빡빡하게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여기저기 드라이브도 하고 돌아다녀요. 아, 오늘은 형 집에서 잤으니까 내일은 우리 집에 올래요?”

“…세현 씨 집을요?”

김세현의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며 주말 내내 같이 있겠다고 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의 집으로 초대받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의외의 제안이기 때문일까, 괜히 고민이 된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 가지 못했다. 순간 미소를 지운 김세현이 불만 어린 시선을 보내왔으니까.

“지금처럼 손만 잡고 자면 되잖아요.”

“어….”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고민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뿐이랴, 손만 잡고 잔다는, 뜬금없는 소리까지 하는 거다. 의외의 발언에 연거푸 놀라자 김세현이 말을 덧붙였다.

“형 집에서만 자면 내가 너무 받기만 하는 거 같잖아요.”

말을 한 김세현이 내 눈치를 살핀다. 당당한 말투와는 달리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내 표정을 살피는 걸 보니 확실히 오해했단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김세현의 손을 한 번 꼭 쥐었다가 힘을 풀며 답했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은 세현 씨 집으로 가요.”

“말 바꾸기 없어요?”

“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세현과 약속하는 건데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갤 끄덕이자 김세현이 맞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싣는다. 나 역시 슬쩍 그의 손을 붙잡자, 멈칫하던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예의 그 후욱대는 소리를 내며 말이다.

사무실이었다면 그저 웃고 지나갔겠지만, 지금은 집이었다. 그것도 잠을 자려고 누워 있었고. 별 뜻이 있어 보이는 것 같지 않은 숨소리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몰라도 저 숨소리가 괜히 자극적으로 들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얼른 자요. …숨 그렇게 쉬지 말고.”

매번 김세현이 저렇게 숨을 쉴 때면 마음이 복잡했다. 긴장도 되고 말이다. 내 말에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그가 이내 풀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어요. 그만하고 자면 되잖아요.”

“그렇게까지 풀 죽진 말고요.”

내가 한마디 했다고 저렇게 풀이 죽으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이리저리 김세현의 표정을 살피는데 누가 봐도 시무룩했던 김세현의 입꼬리가 미약하게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알았어요, 진짜 잘게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요. 진짜 긴장되니까.”

힐난 섞인 시선을 보내자 김세현이 결국 시무룩한 척하던 표정을 풀며 백기를 든다. 말뿐만이 아니라 맞잡고 있던 손과 함께 다른 손까지 머리 위로 들며 항복하자 그제야 치켜떴던 눈을 바로 했다.

“TV는 좀 있다가 끌 테니까 어서 자요. 나는 TV 좀 보다가 잘 테니까.”

“네.”

이따 잔다고 하는데 굳이 얼른 자라고 할 순 없었다. 오래간만에 외출하는 걸 대비하기 위해 바로 눈을 감았다.

“…….”

김세현을 곁에 두고 과연 잠이 올까 싶었지만, 그건 내 기우일 뿐이었다. 한동안 김세현을 의식했지만 제법 피로했던 모양인지 얼마 가지 않아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눈을 떠 김세현을 보다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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